〈 190화 〉 추적
* * *
"일격에 성문이 부서졌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는 아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그것도 마법의 힘일까요?"
무료하기 짝이 없던 에어로크 왕국군에게 지그하르트 후작의 패전 소식은 어마어마한 화젯거리였다. 그새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옆에 선 로그멜 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보면 알지 않겠나?"
해줄 말은 별로 없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도 벅찼으니까. 잠시 로그멜 경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여름호수를 바라봤다.
배는 오랜만이었다. 예전 헤르트를 오갔을 때 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차라리 진작 서쪽으로 향할 걸 그랬다. 목숨이 아까워 가지 않았다고 하기엔 이미 잠입까지 해버렸다.
'구슬이 조금만 멀리 보이면 좋은데.'
구슬로 볼 수 있는 거리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사흘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몇 년째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가만히 앉아서 전 대륙을 둘러볼 수 있으면 너무 사기성이 짙긴 했다. 덕분에 지금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왜 조용하나 했더니 뒤로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군요."
"..."
그의 말엔 나도 동감했다. 설마 지그하르트 후작을 처리하기 위해 본대를 돌렸을 줄은 몰랐으니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대비도 하지 못했다.
식량을 생산하는 알만 평원보다 칼리가 중요한 이유? 알만 평원을 포기하고 지그하르트 후작 부대를 공격한 이유?
알케스 후작의 말을 듣자마자 칼리로 출발한 지 사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백작님이 직접 가시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만..."
중요한 걸 간과한 느낌이었다. 여러 방면에서 머리를 굴려봐도 파딘 제국이 굳이 칼리를 재탈환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연신 등을 간지럽히는 불안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호수를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로그멜 경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자꾸 인상 찌푸리시면 저도 덩달아 불안해집니다."
"..."
"알케스 후작께서도 백작님을 직접 보내신 건 백작님을 믿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니까 불안한 표정 좀 짓지 마십시오. 평소처럼... 흠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는지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연히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깨달았다.
허나, 그 뒷 내용이 궁금했다.
"계속 말해보게."
"...평소처럼 그러니까... 쾌활하게..."
"얄밉게?"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졌다. 소식을 듣고 처음 짓는 미소였다. 생각해보면, 사흘 내내 인상을 쓰고 있긴 했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일부러 까분 거다.
"투구도 안 써서 머리 박으면 아플 텐데."
"..."
참 속이 깊은 사내다. 신분은 달랐지만 비슷한 또래라는 친밀감은 존재했다. 매 전투마다 그를 끌고 다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사흘 내내 인상만 쓰고 있어서 걱정 됐을까. 좋은 타이밍에 끼어든 오지랖이었다. 아름다운 수평선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상념에 빠져있었으니까.
아까와는 다름 마음가짐으로 호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많으니 들어가지."
"...진심이십니까?"
"가신에게 얄밉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파면하지 않나? 혹은 목을 자르거나."
"..."
그의 의도를 파악한 속내와 달리 겉으론 모르는 척 정색하자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눈치채리라 믿었었나 본데.
그의 기대대로 눈치는 챘다.
다만,
"들어가지."
"...백작님?"
분위기를 깼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낯선 공간이었다. 평생을 허름한 나무 천장만 바라보던 그에겐 서 있는 것조차 죄송스러운 화려한 장소였다.
"고개를 들어라."
거대한 대전, 높다란 계단 위 화려한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중년의 사내가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품은 분노와는 별개로 평민이라는 유전자가 각인된 그에겐 본능적인 경외와 공포를 주는 존재였다.
"자네가 레논인가."
"그, 그렇습니다."
청년의 고개가 다시 밑으로 떨어졌다. 똑바로 쳐다만 봐도 불경죄가 될 것 같은 기분에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몸 안에 내재된 힘과는 무관한 문제였다. 중년의 머리 위에 얹어진 화려한 왕관의 힘이었다.
살면서 황제를 직접 볼 줄은 몰랐다. 그것도 변방이나 다름없는 칼리에서.
몇 번 보지도 못했던 마법사들이 좌우로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엔 화려한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격에 성문을 부신 자신의 힘을 직접 본 자들이다.
노골적인 경계의 시선을 받은 레논의 고개가 더욱 떨어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었다. 파딘 제국을 도와 대륙을 일통하는 것. 그렇기에 순순히 자신을 찾는 병사를 따라 칼리의 내성으로 따라왔다.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단 부대와 함께 행동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
허나, 영주나 만나겠지 싶었던 자리에 황제가 앉아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 대전에 들어오자마자 레논은 혼이 쏙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황제도 얼굴은 처음 봤지만, 제국에서 머리 위에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흐음... 자네가 레논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어떻게 아는 걸까. 황제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혹시 신이 이야기했을까. 수많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감히 황제에게 질문해도 되는지 몰랐다.
"자네가 가진 힘은 얼마나 사용할 수 있지?"
"자,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힘이 모자랐던 적은 없었습니다.'
"호오..."
황제의 눈이 더욱 빛났다. 한도도, 시간도 제한이 없다는 걸까? 아니면 한계까지 써본 적이 없는 걸까.
흥미로운 시선이 계속해서 청년을 훑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큰 수확이었다.
에어로크와 다나크가 전쟁에 참여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다나크에게도, 에어로크에게도 알만 평야는 목숨이나 다름 업었으니까.
허나 두 나라가 연합을 맺은 건 예상외였다. 두 나라는 불과 재작년까지 서로 검을 맞대던 사이였다.
순조롭게 정복한 헤르트 남부와는 다르게 알만 평야는 난국이었다. 에어로크와 다나크, 그리고 파딘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 삼파전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라진 탓이었다.
그 상황에 에어로크가 산맥을 넘어 제국을 침략했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전쟁을 겪은 에어로크 군대는 비어버린 서쪽을 순식간에 유린했다. 그 덕에 칼리까지 속수무책으로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전쟁의 양상에 황제가 당황한 그때, 신이 찾아왔다.
파딘이 주신으로 섬기는 파르샤께서 직접.
'칼리로 가라. 역발산의 기개를 지닌 레논이란 자를 찾아라.'
일격에 성문이 부서졌을 땐, 온몸에 전율이 일었었다. 주먹 하나하나가 마법병단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단숨에 성벽을 오른 청년이 순식간에 성벽을 점령했다. 날카로운 창에도 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은 신화 속의 영웅 같았다.
그렇게, 한 달째 대치 중이었던 칼리를 고작 반나절 만에 탈환했다.
그때 황제는 깨달았다.
신께서 나를 돕는구나.
대륙 일통을 위해 영웅을 내려주셨구나.
파딘은 대륙을 통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엔 저 젊은 청년이 있을 것이다.
야수같이 왕국군을 도살하던 아까와는 달리 순박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연신 눈치를 살피는 청년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는가?"
"예, 예?"
"백작의 지위를 주겠노라. 에어로크와 알만은 네가 다스릴 땅이 될 것이다."
조용하던 대전이 더욱더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을 보며 황제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파딘을 위해 검을 들어라. 파딘이라는 이름 아래 대륙이 통일된 날, 너는 공작의 지위를 받을 것이다."
이동은 순조로웠다. 무엇보다 불편하기 짝이 없던 갑주를 벗은 것에 만족했다.
다나크 제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는데 에어로크 왕국의 상징은 녹색 갑주를 입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알만 왕국 특유의 화려한 의복은 조금 낯설었지만, 갑주에 비하면 불편한 축에도 들지 못했다.
다만,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기분입니다."
"다 왔으니 조금만 참게."
검은 머리카락까지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 밀어버릴 수도 없는 탓이라 화려한 모자를 썼는데, 정말 미친 듯이 더웠다.
"큭큭. 망국의 졸부가 된 느낌은 어떠십니까?"
"머리가 근질근질한가 보군."
"..."
화려한 의복에 화려한 모자까지 쓴 젊은 청년. 영락없는 졸부였다. 알만 왕국의 귀족을 모방할까 했지만, 그러기엔 수행원이 너무 적었다.
"혹시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글쎄. 고기밥이 되지 않을까."
도망칠 방법?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배는 적진 한가운데인 칼리로 가는 배였다.
애초에 전쟁통인 지금 배편이 많은 게 더 이상하지.
그나마 이 배편도 칼리가 재탈환 됐다는 소식에 파딘 제국의 상단이 부랴부랴 움직인 덕에 탈 수 있었다.
저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낮은 성벽과 하얀 건물들, 도시 뒤로 보이는 끝없는 사막까지. 지금까지의 문화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긴장하게."
"예."
옆에서 주절거리던 로그멜 경이 조용해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곧장 배에서 내려 방을 잡고 서쪽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면서 구슬로 왕국군을 찾는 게 일차 목표였다.
전령이 오는 데 걸린 시간과 다시 내가 이곳까지 오는 시간을 더하면 칼리가 무너진 지 이미 한 달이나 지났다.
왕국군이 어디까지 밀렸을지는 모르겠다.
허나 지그하르트 후작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리 멀리 후퇴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거래를 원한다고?"
"예. 다만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려면 안전했으면 좋겠는데... 저번처럼 에어로크가 쳐들어올 일은 없겠죠?"
"에어로크 그놈들 산맥까지 후퇴한 걸 모르는구먼? 배에 있는 동안은 소식을 못 들으니 그럴 수 있지."
"...예?"
연신 부채를 부치던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나도, 로그멜 경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배에서 내려 곧장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그중 사람이 적은 작은 포목점을 골라 들어온 상태였다.
"이제 보니 알만에서 왔구먼. 자네 입장에선 속 시원하겠어. 의리도 모르는 에어로크 놈들이 큰코다쳤으니 말이야."
그래도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는데 말이야 라며 노인이 중얼거림을 들으며 포목점을 빠져나왔다.
"그러니까 거래는 물론 가능... 자네 어디 가나?"
시간이 없다.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을 뒤로 하고 주위를 살폈다. 때마침 로그멜 경이 입을 열었다.
"말을 빌려오겠습니다."
"서쪽 성문으로 바로 오게."
"예.'
노인이 말하는 산맥이 에어로크와 파딘의 국경인 아르페온 산맥이면 급박한 상황이었다. 거기만 넘으면 바로 지그하르트 영지다. 반대로 침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말을 타고 일주일.
전속력으로 일주일을 달려야 산맥의 초입이다.
그로부터 약 삼십 분 뒤, 두 필의 말이 성문을 박차고 나왔다. 방향은 서쪽. 아르페온 산맥이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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