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89화 (189/191)

〈 189화 〉 칼리

* * *

남자는 신을 저주했다.

"오빠..."

"괜찮아. 오빠 여기 있어."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발갛게 올라온 볼이 한눈에 봐도 위중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동생의 손을 꼭 붙잡은 청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신을 저주하고 증오했다.

부디 다른 신이 있다면, 자신을 괴롭히는 그 신을 막아주었으면 했다.

"괜찮아. 곧 나을 거야."

다시 잠이 들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작은 손마저 뜨거웠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부모도 없는 불쌍한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짓을.

밤마다 사내를 괴롭히던 격통이 사라진 건 얼마 전이었다. 드디어 신이 포기했구나. 몸 안에 끓어 넘치는 힘은 여전했지만, 지난 몇 달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던 통증이 사라진 것만으로 사내는 만족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신이 찾아오지 않았다.

근 일 년 만에 사내는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신의 손길이 동생에게 향했다.

원인도 모를 열병에 시달리기 시작한 동생이 결국 침대에 누운 건 어제였다.

하루가 다르게, 한 시가 다르게 몸이 뜨거워졌다.

신을 증오한다.

신을 저주한다.

세상 어디를 가도 신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음이라. 전쟁터가 된 칼리를 떠나 대륙 끝까지 왔음에도 의미가 없었다.

사내의 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증오했다.

자신을 저주했다.

이 빌어먹을 저주에 빠진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그때, 사내의 등 뒤가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신이 찾아왔다는 것을.

"운명은 피할 수 없다."

무슨 운명입니까.

이 어린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제 운명은 도대체 무슨 운명입니까.

"떠나라. 칼리로 가라."

반쯤 허물어진 빈집을 보수한 지 한 달이 안 됐다. 동생과 탈 작은 배도 만들었다. 이제 좀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동생이 먼저입니다."

발뺌하면 정말로 달려들 생각이었다. 잔병치레 하나 없던 동생이 갑자기 원인도 모를 병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이유는, 신밖에 없었다.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 저주받은 운명으로 내몰면서 약속을 지키라는 저 뻔뻔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등 뒤로 노란빛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이 방해될까 사내가 급히 물러났다.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신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던 노란 빛이 소녀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확신이 들었다. 동생을 괴롭힌 건 신이었다는 것을.

"칼리로 가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등 뒤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던 사내가 다시 동생에게 다가갔다.

조금 열이 내린 걸까. 아니면 화가 나서 몸이 달아올랐을까. 아까보다 미지근해진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남자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은 살리리라. 그리고 에어로크든 파딘이든, 다 부숴버리리라.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동생과 행복하게...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아직 정신이 안 돌아왔는지 뒤척이는 동생을 품에 안고서, 그렇게 사내가 집을 나섰다.

방향은 북쪽.

한 달 전 동생과 함께 걷던 그 길을 따라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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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는 어때?'

'어떨 거 같아요?'

'유리한가 보네.'

'후후. 맞아요.'

오랜만에 듣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알만 평야에 주둔해있던 다나크 제국의 병력의 절반이 동부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파딘 제국의 마법사를 암살했던 그 날 이후로 두 달이 흘렀다. 그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알만 국왕의 망명이었다.

모든 귀족이 반으로 갈라졌다. 영토는 양 제국과 동맹이었던 에어로크가 점령했다. 괴뢰국으로 탄생했던 알만 왕국의 당연한 최후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자주적으로 독립하려 했던 알만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듣기로는 에르딘으로 망명을 갔다고 들었다. 헤르트라는 선택지를 놓고 에르딘까지 갔다는 건, 완전히 왕국을 포기했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파딘은 어때요?'

'똑같아. 조용해.'

한숨 섞인 목소리에 헤일리가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에 한숨이 또 새어 나왔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전쟁을 일으킨 건 자신들이잖아.'

'혹시... 카인의 암살 실력이 무서운 게 아닐까요?'

'퍽이나.'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천진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들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예요.'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

알만 평야는 두 달째 묘한 대치 상태였다. 병력이 반절로 줄은 다나크와 마법사를 상대할 방법을 찾기 전까진 전진할 생각이 없는 에어로크, 두 방향을 막아야 하는 파딘 제국.

서로를 향한 눈치 싸움이 지속되는 중이었다.

마법병단이 없었다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갔을 것이다. 고작 3M도 안 되는 낮은 성벽으론 수성이 불가능하니까.

그놈의 마법병단이 문제였다. 피해를 감수하고 공성을 시도하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소모되는 병력이 많을 게 자명했다.

'헤일리. 마법병단을 상대할 좋은 방법은 없어?'

'음... 가장 좋은 건 같은 마법병단으로 상대하는 거에요.'

'마법사가 없어서 문제지.'

에어로크에도 마법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파딘 제국처럼 전력으로 사용할 만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에어컨을 틀거나, 확성 마법을 조금 사용할 수 있을 뿐.

'그러면 좋은 방법이 하나 더 있어요.'

'뭔데?'

'암살을 하는 거에요.'

'끄응...'

꺄르륵거리는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놀리는 거다.

성에 잠입해 마법사들을 죽였다는 말을 하면 안 됐다. 처음엔 무모했다고 한참 열을 내더니 요즘엔 퍽하면 그걸로 나를 놀려 먹었다.

참모 맞냐고.

'다나크로 도와주러 오시면 그때도 검을 들고 싸우실 건가요? 저를 위해?'

'...유리하다며.'

'맞아요. 후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갑작스러운 기습이 무색하게 헤르트, 에르딘 연합군은 끝없이 밀리는 중이라 들었다.

얼마전 헤르트에서 편지가 날아왔었다. 다나크와 편을 먹었냐는 노골적인 비난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나크를 공격하라는 말이 장황하게 쓰여 있었다.

'이런 편지까지 보낼 정도라면 헤르트가 급하긴 한가보군.'

물론 그 편지는 수도로 가지 못했다. 알케스 후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찢어버렸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적은 없다. 당연히 영원한 친구도 없다.

허탈한 얼굴로 돌아가는 헤르트의 전령을 보며 안타깝긴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승님과 엘라의 고국이었으니까.

여전히 헤르트의 대리자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헤일리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장을 살폈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고 했다.

한 가지 특이사항은 에르딘의 성녀라는 사람이 점점 힘을 잃고 있다고 했던가.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예지를 대가로 몸이 약해지던 미하일이나 최면에 의존하다가 내게 무너진 헤일리처럼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내 능력에 대한 부작용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전쟁 외에는 의식적으로 구슬에 손을 대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점점 시력을 잃는다던가. 아니면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다던가.

'그럼 전쟁 끝나고 만나야겠네.'

'...다나크가 위험해요. 도와주러 오세요.'

'그거 애교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아라도 그렇고 엘라도, 헤일리도 나름대로의 귀여운 애교를 곧장 부리곤 했다. 현대의 여자들처럼 노골적인 애교는 없었지만, 자신들 나름대로 사랑 받기 위해 노력했다.

'금방 갈게. 파딘 제국이 무슨 꿍꿍이일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움직임이 없으면 복귀할 거야.'

이 성에 주둔한 병력이 7만, 엑센 성과 주변 성에 주둔한 병력이 3만. 총 10만의 병력이 두 달째 놀고 있었다. 식량이 남아 도는 건 아니니 파딘 제국이 더이상 공격 의사가 없다면 부대를 해체할 계획이었다.

'후후. 어서 와요.'

'...그 말투는 좀 무서운데.'

만나자마자 눈을 빛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다시는 옆에서 못 떨어지게.

어쨌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시아라도, 엘라도 보고 싶었다.

후작에게 말하고 조금 빨리 복귀할까. 지금 출발해도 영지에 도착하면 눈이 펑펑 내릴 터였다.

두 여인 모두 배가 불러오고 있을 것이다. 졸지에 못난 아빠가 됐다.

엘라와 시아라의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분명 귀엽게 생겼겠지. 스승님에게 엘라의 자식을 보여드리겠다고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스승님은 잘 계실까. 야전에 계시기엔 건강이 너무 좋지 않으셨다. 부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셨으면...

벌컥!

"참모."

"후작님?"

내 상상을 깬 건 갑작스레 막사를 찾아 온 알케스 후작이었다. 직접 찾아온 적은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불안감에 구슬에서 손을 놓고 일어났다.

너무 즐거운 상상만 했을까. 신의 질투를 샀을 지도 모르겠다. 전쟁터에 나온 놈이 정신은 꽃밭에 가 있다고 말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

"칼리를 뺏겼네."

"...예?"

즐거운 상상을 대가로 들은 소식 치고는 대가가 너무 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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