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87화 (187/191)

〈 187화 〉 고집

* * *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순박한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제야 정말로 잠에서 깨어난 게 실감이 됐다.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이틀 지났습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천으로 칭칭 감은 거 보면 알 텐데.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연신 식상한 멘트만 날리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따끔한 옆구리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사람을 웃겨가지고.

이럴 때가 아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로그멜 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후속 공격은 없었습니까?"

담벼락 뒤에 숨어 폭발의 중심지는 못 봤지만, 등으로 느껴지던 열기만 생각해도 셩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게 뻔했다.

그들이 그런 마법을 얼마나 자주 쓰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게 중요한 겁니까?"

설마 로그멜 경에게 미련하다는 눈빛을 받을 줄은 몰랐다. 울컥 화가 올라왔지만 한 번 참았다. 내가 생각해도 전쟁에 미친 놈처럼 보일 것 같긴 했다.

"빨리요."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하루에 한 번, 혹은 반나절에 한 번씩만 써도 답이 없었다.

무조건 후퇴.

혹은 마법을 날아오자마자 돌격.

"부디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면 좋을 텐데요."

"...맞습니다."

섣불리 공격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지금 그들이 방심을 유도하는 거라면 공성의 시작과 동시에 마법이 끝도 없이 떨어질 테니까.

그럼 끝이다.

더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했다. 마법이란 이름 아래 하늘에서 떨어질 재앙은 일반 병사들에겐 사신과 다를 바가 없다.

마법사.

그리고 마법병단.

로그멜 경과 치료를 마친 사제가 방을 나섰음에도 내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초인에 이어 마법병단까지.

혹시 주신이 다스렸던 나라가 파딘 제국일까. 그래서 밸런스가 안 맞는 게 아닐까. 어이없는 상상을 하며 습관적으로 구슬을 손에 쥐었다.

답답할 때마다 녹색 구슬을 손에 쥐는 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푸른 하늘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원도 보였다. 드문드문 세워진 낮은 성들과 푸른 밀밭이 보인다.

시선으로 돌려 발밑을 바라봤다. 작은 신전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완전히 무너져내린 성벽이 보였다.

마치 이빨이 빠진 모습이다. 비어버린 이빨 주위로 수많은 병사들이 달라붙어 성벽을 재건하고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파괴력이다. 내가 파딘 제국에서 빙의했으면 진작 대륙을 통일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불공평함에 투덜거리며 시선을 움직였다.

비슷한 성이 보인다. 이곳도 성벽이 낮았다. 알만 왕국의 모든 성이 비슷했다.

마법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들이 어디서 지내는지, 마법 준비엔 얼마나 걸리는지 샅샅이 알아낼 생각이었다.

정말 시전 시간이 길다면 희망이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더 철저하게 방법을 찾아내면 된다.

마법은 무적이 아니다.

파훼 방법이 전혀 없다면, 이미 이 대륙은 파딘 제국이 통일했을 테니까.

그러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성을 돌아다녔다.

특권 의식이 있는 걸까. 아니면 이질적인 그들의 존재를 격리한 걸까. 그들은 모두 한 건물에 모여 있었다. 여러 개의 방과 식당까지 있는 큰 저택이었다.

하나같이 보랏빛 로브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나무 지팡이는 상상 속의 마법사 그 자체였다.

찾기 쉬워서 좋다.

저렇게 복장이 통일되어있다면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듯싶었다.

접근만 할 수 있으면 저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허나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가장 후방에 꽁꽁 숨을 게 뻔했다.

그렇게 저택을 돌아다니며 한참을 관찰하는 동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놀러왔나?'

단 한 명도 긴장을 집어먹은 마법사가 없었다. 각자의 방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일반 병사들에 비하면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저택을 지키는 몇 명의 병사만 아니었다면 이곳이 전쟁터인지 마탑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역시 어느 부대나 꿀보직은 있는 걸까. 새삼스레 군 생활이 떠오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몰래 가서 죽여?

날씨 좋다고 창문 열어 놓은 꼬라지 좀 봐라. 창밖의 정원을 보며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봤을 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붉은 구슬만 있다면 로그멜 경을 보낼 텐데.

아쉬움에 혀를 찼다. 예전 실험했던 그 방법을 쓰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나는 구슬로 주변을 살피고, 로그멜 경은 아바타가 되어 내 지시대로 움직이고.

그러나 불가능하다. 남은 한 개의 붉은 구슬은 헤일리 품속에 있으니까.

'...그러면.'

녹색 구슬로 주변을 살피면서 마법사들이 있는 저택까지 접근할 수 있는 사람.

나 혼자뿐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먼저 일어났다. 목숨이 안 아까웠으면 진작 제국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저택을 나서고 있었다.

가능할까.

저택을 나와 천천히 시야를 넓혔다. 하고 싶으냐? 당연히 하기 싫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죽은 목숨이니까.

허나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조건 마법사를 제거해야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 태양을 닮은 불덩어리를 직접 눈앞에서 본 후로 그 생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니 해야만 한다.

로그멜 경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능력을 믿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천천히 진입 루트를 살폈다. 삼엄한 감시가 이뤄지는 성벽만 넘어가면 성공 확률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오늘도 어김없이 세 개의 달이 휘영청 뜰 무렵 구슬에서 손을 뗐다.

들어갈 방법... 찾았다.

­­­­­­­­­­

"안 되네."

"부탁드립니다."

"자네는 참모야."

"이대로면 공성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병사들을 시키게. 자네가 할 일이 아니네."

그 병사들은 구슬이 없습니다. 꺼내지 못한 대답을 눌러 삼켰다. 절대로 안 된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지은 알케스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위치를 기억하게. 백작이자 이 부대의 참모장이야. 나는 지휘관으로서 허락할 수 없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나 역시 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사지로 뛰어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해야 했다.

둔재인 내가 짜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다.

이대로 전선이 굳어져도 된다. 이미 점령한 평야만으로 에어로크는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나, 내가 이렇게 무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다음 달이면 다나크 제국군의 병력이 반으로 나눠진다.'

헤르트를 막기 위해 부대를 돌리라는 헤일리의 명령이 날라오고 있을 터였다. 그때부턴 공성과 수성의 위치가 뒤집힌다.

다나크 제국과 에어로크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그고, 파딘 제국은 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온다.

그 전에 최대한 파딘 제국의 전력을 깎아야 했다.

"...후작님."

"젊고 혈기가 넘치는 건 이해하네. 지난 엑센 성을 공략할 때도 고작 삼백의 기병으로 공격을 갔었지? 이번에도 막무가내로 혼자 뛰어들 건가?"

"..."

"우리 왕국의 영웅이 단명하는 꼴은 못 보겠네."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를 말이다. 단언하듯 한번 더 고개를 저은 후작이 눈을 감았다. 더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방법... 말씀이십니까?'

'보통은 화살로 저격을 시도합니다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최대한 산개해서 공격해야 합니다. 병사들 역시 떨어지는 마법이 무한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기를 비는 것 뿐이죠.'

마법병단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후작을 찾아오기 전 대화를 나눴던 젊은 참모의 대답이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내가 시험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었다.

그의 대답은 들은 나는 큰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파훼방법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다만 마법과 마법 사이의 간격이 크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둘러봤던 저택엔 스무 명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 정도 규모의 마법병단이 얼마나 큰 전력인지는 잘 모르겠다.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허나, 그들이 작은 마법을 스무 개씩만 날려도 저 평야가 불바다가 될 거라는 건 알았다.

여름이 훌쩍 다가오며 밀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저기에 불이 붙는다면, 지옥이 재현될 게 뻔했다.

"...아직도 안 나갔는가?"

"부탁드립니다."

"...휴우."

후작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일까.

혈기가 넘쳐 만용을 부리는 고집쟁이?

과연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나 자신도 아직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어떡해.

병사들이 몰살당하느니 이게 낫다.

내가 위험을 감수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결국 대륙 통일이 한 걸음 빨라진다.

언제까지 암습만 할 수는 없다.

단발적이고, 제한적인 작전이다.

암습을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저들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한 번이라도 발각되는 날엔 그대로 목숨을 잃는다.

그래도 해야 한다.

마법사를 상대할 좋은 방법이 떠오르기 전까진, 이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여유롭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고집이 셀 줄은 몰랐군."

"..."

"어차피 자네는 내가 말려도 갈 것 같군."

정답이었다. 대답 대신 시선을 살짝 피하는 걸로 암묵적인 표현을 했다. 내 모습을 본 후작이 다시 한 번 한숨을 터트렸다.

"...위험해지면 무조건 돌아오게."

"감사합니다."

됐다. 곧바로 나온 대답에 후작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벗어났다. 뻐근한 왼팔과 옆구리가 시큰거렸다.

부러지진 않았다. 잔뜩 긁혀서 그렇지.

이 정도면 검을 휘두르긴 충분했다. 게다가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을 찌르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지도 않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이제야 사람을 죽이러 간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그것도 무려 스무 명이 넘는 목숨을.

덜컥 겁이 들었다. 잘 할 수 있을까. 혹시 말로만 듣던 알람 마법이 울린다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참모가 아닌 검사로서.

장장 오 년을 갈고 닦은 검술이 빛을 내기를 바라면서.

품 속에 손을 집어넣은 사내 하나가 성벽을 넘었다. 그리고 이내, 길게 자란 밀밭 사이로 사라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