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예지몽
* * *
"와아!"
별이 담긴 눈동자에 푸른 파도가 담겼다. 낯선 소금 냄새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환한 미소가 피었다.
"오빠! 바다야!"
호수와는 다른 색이었다. 에멜랄드를 물에 빠트린 듯 찬란한 바다 빛에 넋이 나갔는지 사내 역시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바다는 처음이었다. 동생을 데리고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동생이 노래를 부르던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특히 어린 동생을 데리고 보름 가까이 사막을 횡단한 건 무모했었다. 중간에 찾았던 작은 오아시스가 아니었다면 분명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거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던 고통까지.
"이제 여기서 살 거야."
"정말?"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좋을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저 멀리 작은 마을로 시선을 옮겼다. 바닷가에 걸친 작은 마을이다. 동생의 손을 잡은 청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작은 마을이라면 분명 일손이 부족할 터. 마을에 잘 녹아들기만 한다면 이래저래 품을 팔아 먹고살 만할 것 같았다.
"오빠! 나 바닷물고기 먹어보고 싶어."
"바닷물고기?"
"응!"
어부로 사는 건 어떨까. 레나와 함께 매일 바다로 나가는 거다. 처음엔 고생 좀 하겠지만 더이상 동생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마을에선 더더욱.
"지금 가볼까?"
"지금?"
마을로 향하던 발걸음이 모로 꺾였다. 동그란 눈이 더 커졌다. 설렘이 가득한 동생의 얼굴을 보며 사내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시는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이거면 행복했다. 이렇게 동생과 같이 살면서 소소하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 자신은 전쟁터보다 이런 삶이 어울렸다.
그러니 제발 신이시여.
제 능력을 거둬가 주십시오.
수백 번도 더 빌었던 기도에 또 하나의 횟수가 더해졌다.
그러나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힘은 변함이 없었다.
익숙한 방이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두 여인이 느긋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흐릿한 시야처럼 기억도 흐릿했다.
"카인, 일어났어?"
"홍차 마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집어넣은 시아라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나 보다. 깜빡 잠이 들었구나. 초점을 맞추려 눈을 비볐다.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었나 보다.
"오늘도 예쁘네."
"..."
매일같이 하는 말을 던졌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도,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도,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피부도 예뻤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애정표현을 할 때면 시아라는 당황한 눈빛으로 부끄러워하곤 했다. 나랑 몇 년을 함께했는데도 여전히.
연기일까. 연기일 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았다. 내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일 테니까.
"...시아라만 보는 거야?"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단정하게 묶인 환한 금발. 잔뜩 굳은 얼굴로 질투심을 나타내는 건 엘라였다.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 표정도 역시나 연기다. 내가 저런 눈빛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후 자주 보이는 표정이었다.
"엘라도 예뻐."
"..."
내성도 없으면서 질투는 한단 말이야. 언제 노려봤냐는 듯 만족한 얼굴로 찻잔을 드는 엘라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만난 건 이 세상으로 넘어와 얻은 가장 큰 행운이 아닐까. 천천히 식기 시작하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 대화를 나눈다고 그새 차가 식었나? 오늘따라 유난히 옅은 향을 맡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여유로운 걸 보니 파딘 제국이 아직 전쟁을 일으키기 전 아닐까.
그러면 오늘도 할 일은 없다. 완전히 마음을 풀어버리고 다시 찻잔을 들며 두 여인을 바라봤다.
시아라의 붉은 눈, 엘라의 푸른 눈, 그리고 헤일리의...
그러고 보니 헤일리가 안 보인다.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어디라도 갔을까.
다시 한번 흐릿한 향을 맡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역시나 맛이 약하다. 헤일리 답지 않은 차였다.
"헤일리는?"
"뭐?"
"쉬러 갔어?"
반응들이 왜 이러지? 놀란 눈일까. 아니, 슬픈 눈이었다. 두 여인 모두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장난이라도 치려는 걸까.
내가 잠든 사이 잠깐 쉬러 갔나 보다. 이 둘은 내가 일어나면 놀리자고 작당을 한 것이고.
차라리 화난 척이나 모르는 척을 하지. 저렇게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 그다음 내용 예상이 어렵다. 적당히 맞춰주려고 했는데 두 여인의 속셈을 모르겠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무난한 질문을 던졌다. 두 여인의 말을 들으며 적당히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여인의 행동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원망 어린 시선이었다. 그 눈빛을 받자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라가 이렇게 연기를 잘 했나?
단단히 준비했구나 속으로 놀란 그때, 그녀가 얼굴을 가렸다.
"...이제 그만해. 부탁이야..."
"뭐?"
"언제까지 언니를 찾을 거야."
찻잔을 들었던 손이 멈췄다. 두 손 뒤로 숨은 시아라의 얼굴이 붉었다. 이쯤 되면 연기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그 상대가 연기와는 담을 쌓은 시아라라면 더더욱.
결국 마음을 바꿔먹었다. 슬픈 장난을 치려는 것 같은데,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했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엘라를 바라봤다.
"장난 그만 쳐. 헤일리보고 빨리 나오라 그래."
"..."
"나 이제 화낸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쯤 되면 나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반응을 노렸나 싶기도 했다. 여전히 마음 한쪽에는 지금 이 상황이 두 여인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겠어. 시아라 연기 잘 하네. 진짜 속을 거 같으니까 빨리 나오라 그래."
무슨 상처를 받은 걸까. 내가 말을 꺼낼 때마다 시아라의 흐느낌이 깊어졌다. 엘라의 반응도 비슷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늘 고고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있었다.
나를 원망하는 눈빛이다. 그 시선에 가슴이 아팠다. 이유는 모르겠다. 조금의 장난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원망이라 그럴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릿거려 입술이 떨렸다.
"왜... 왜 그러는데."
"카인..."
간신히 울음을 참는 잠긴 목소리였다. 푸른 눈 주위가 붉게 변하며 원망이 안타까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카인이 충격을 받은 건 알아... 그러니까..."
"..."
가슴이 싸했다. 천천히, 그러나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엘라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줄게..."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마음 한켠엔 이 상황이 장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존재했다. 이렇게 연기를 잘했었나? 이 정도면 속아줄 만 하지 않을까.
다만, 용납하지 못할 내용이 엘라의 입에서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 말이 나오면, 아무리 장난이어도 화가 날 것 같았다.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
"...카인."
결국, 엘라의 고개도 꺾였다. 곱고 가느다란 두 손 뒤로 엘라가 숨었다.
예상이 맞았다. 자연히 화가 났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저기 방 안에서 멀쩡히 자고 있을 헤일리를 죽이다니?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셋이 친해졌다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헤일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은유적 행동일까.
어쨌든, 장난은 끝났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평소 헤일리가 자주 쉬던 쪽문을 향해 다가갔다.
벌컥!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다르게 헤일리는 보이지 않았다. 문을 붙잡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 숨었구나. 정말 제대로 장난을 치려 하는구나.
다시 발걸음을 돌려 방문으로 향했다. 옆방이든, 헤일리와 처음 관계를 가졌던 구석진 방이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찾아내서 혼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문 손잡이를 잡았던 나는 찢어지는 시아라의 비명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부탁이야... 흑. 헤일리 언니는 이제... 없어."
벌떡!
"허억...! 허억...!"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낯선 천장이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끄윽..."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사지를 칭칭 동여맨 하얀 천이 보였다. 왼팔은 부목을 갖다 댔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
구슬은 어디 있지?
온몸에 붕대가 감긴 탓에 옷이 전부 벗겨져 있었다. 신음을 흘리며 팔을 뻗었다.
'헤일리.'
'헤일리!'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뇌가 돌기 시작하며 꿈이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가슴 속의 불안함은 여전했다.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불렀을 때, 헤일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일리?'
'무슨 일이에요?'
'...'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안도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보고 싶어서.'
당연하게도 나긋한 타박이 들려왔다. 다급하게 부르는 나 때문에 회의도 잠깐 멈춘 듯했다.
정말 꿈이었구나.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못살겠다는 듯 한숨을 쉬는 헤일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이루어지면서 뇌가 똑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옆구리와 왼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축축한 식은땀에 등이 찝찝했다.
꿈이었구나.
무슨 그런 개꿈을 꾸는 거야.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홍차 향이 안 느껴지던 이유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개꿈에 기분이 나빠졌다.
가장 안전한 다나크 한가운데 숨어있는 그녀가 왜 죽는단 말인가. 차라리 세 아이에게 둘러싸여 육아의 고통을 느끼는 꿈이 더 현실성 있었다.
불길한 기분에 억지로 기억을 떨쳐내고 있는데,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일어나셨군요."
온몸을 가리는 하얀 사제복, 검은 모자에 목에 걸린 종교의 증표. 젊은 신관이었다.
나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사제가 다시 방을 나서더니 이내 누군가를 데리고 돌아왔다.
"백작님!"
"로그멜 준남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