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환영인사
* * *
"오백이 넘게 다쳤고... 지그하르트 후작 역시 부상을 입었다...는 말씀입니까?"
미지에 대한 호기심은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 헤일리는 최면을 썼고, 미하일은 예지 능력이 있었다. 헤르트는 여전히 조용했고, 에르딘은 성녀가 나타났다고 했다.
헤르트와 파딘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수천 번도 넘게 상상하지 않았을까. 밥을 먹을 때도, 시아라와 차를 마실 때도, 욕조에 앉아 몸을 녹일 때도 불쑥불쑥 올라오던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육체 능력자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수십 번도 넘게 했었다.
허나 파딘은 아닐 줄 알았다. 마법의 나라인 파딘에서 육체 능력자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그 능력자가 본대 한가운데서 후작을 공격할 정도로 강력할 줄은 더더욱 상상 못 했다.
"후작께선 어떻습니까?"
다급한 내 목소리에 알케스 후작이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그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거겠지.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라 하더군. 잠깐의 기절과 타박상이 전부라고 들었네."
"..."
단신의 몸으로 거칠게 달려오는 사내가 일격에 성문을 부순다. 성벽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도 그의 단단한 근육을 뚫지 못한다. 반파된 성문으로 파딘 제국군이 쏟아져 들어온다.
살아있는 공성 병기이자 전장을 휩쓰는 살인 병기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놈의 밸런스는 어떻게 되먹은 건지. 혹시라도 단둘이 만나면 저항도 못 해보고 목이 꺾여 죽을 게 뻔했다.
이곳 알만이 고착 상태에 빠지면 후작이 있는 서쪽으로 옮기려 했는데, 어림도 없게 됐다.
내가 대리자라는 사실이 발각된 순간 주둔지로 난입을 할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불행한 사실은, 나는 에어로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다.
파딘 제국의 대리자가 내 정체를 알 확률은 애완견이 집으로 돌아온 주인을 반길 확률과 비슷했다.
"그 후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동생으로 추정되는 소녀를 안고 빠져나갔다는군."
밸런스 망겜 맞네 이거.
한 손이 묶인 상태에서 광장을 빠져나갔다니... 누구는 관음쟁인데 누구는 조자룡이다.
"...아무튼 칼리는 무사히 접수했으니 다행이지. 곧장 도시를 빠져나간 이후로 다시 접근한 적은 없다니 그나마 다행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알케스 후작의 말에 눈이 커졌다. 이건 정말 좋은 정보였다.
능력을 쓰는 것에 쿨타임이 존재하거나, 혹은 시간제한이 있거나, 아니면 부작용이 있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단지 이유가 없어서 같은 우울한 상상보단 훨씬 그럴듯했다.
"그래도 좋은 기회입니다. 파딘 제국의 시선이 완전히 돌아갔으니 움직일 때입니다."
"그렇지. 모레까지 출전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겠네."
"예."
고개를 숙이고 지휘 막사를 나왔다. 하늘의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는 초여름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십만이 넘는 부대가 주둔한 칼리라 하더라도 성문이 열리면 수성이 어려워진다. 게다가 성벽을 때리는 마법과 성벽 위를 돌아다니는 파딘 제국의 대리자까지.
상상만으로 막막한 기분이 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분명 약점이 있을 거다. 완벽한 능력은 없었다. 내가 그래고, 헤일리가 그랬으며, 미하일이 그랬으니까.
그러니 모순이다.
약점을 찾아내려면 제국 서쪽으로 직접 넘어가야 한다. 어디서 지내는지, 뭐를 먹는지, 누구랑 사는지, 능력 유지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그러나 내 정체를 들키면 그 순간 죽은 목숨이었다.
아무리 주둔지 깊은 곳에 숨는다고 하더라도, 야심한 새벽에 난입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날아갈 게 뻔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서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정보를 모으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선택은 당연히,
'절대 안 가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움직일까 말까 고민이나 하지 않을까. 헤일리와 함께 간다거나, 혹은 함정에 빠트린다거나.
그러니 우선은 알만부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계획대로 됐다. 등을 찌른 지그하르트 후작을 막기 위해 반수 이상의 병력이 후방으로 물러났다. 헤르트 남부를 점령했던 병력이 돌아오기 전 병력의 공백기가 생긴 지금이 적기였다.
그렇게 알만 왕국을 완전히 에어로크와 다나크가 점령하면, 파딘 제국은 알아서 몰락할 것이다.
점령한 헤르트 남부 역시 적지 않은 소출량을 자랑하지만, 알만 평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렇게 이틀 후, 알만 왕국 남부를 점령한 파딘 제국을 밀어내기 위한 7만의 에어로크 왕국군이 남하를 시작했다.
'...헤르트가?'
'네. 부대를 돌려야 해요.'
'...'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인생이라 했는가. 순조롭게 알만 왕국 남부를 정리하던 에어로크 왕국군은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부대가 움직인 지 정확히 이 주만이었다.
'남부를 뺏긴 헤르트가 다급했나 봐요. 아니면 에르딘이 헤르트를 선동했을 수도 있고요. 두 연합군이 제국 동부를 급습했어요.'
재작년 헤르트에르딘 연합군의 다나크 제국 재침공이었다. 그때는 같은 동맹 왕국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알만으로 내려간 제국군을 불러야 할 거 같아요. 생각보다 병력이 많아요.'
파딘 제국과 상황이 똑같아졌다. 에어로크에게 등을 맞은 파딘 제국과 연합군에게 등을 맞은 다나크 제국.
상황이 역전됐다.
헤르트 남부를 공격했던 병력이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전선이 고착화되는 중이었다. 서로가 눈치만 보는 이때, 다나크 제국의 병력이 나뉘면 더는 전진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생각보다 점령한 영토가 많다는 것 아닐까.
'다나크는 지금 얻은 평야로 충분히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에어로크는 어떤가요?'
헤일리의 말은 즉, 더이상의 전진은 어렵다는 말과 동일했다. 나 역시 바로 동의했다. 어차피 다나크 없이는 한 걸음도 전진이 불가능했으니까.
'위험하면 말해. 도우러 갈게.'
'어머 정말요?'
'대신 나 혼자.'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다나크를 도와 동맹국이었던 헤르트와 에르딘을 공격하자는 말을 하면?
나는 도울 마음이 충분했지만,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보일 수도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후후... 그게 더 좋은걸요?'
'...'
오랜만에 듣는 나긋나긋한 말투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제국 땅을 밟자마자 납치돼 깊은 산 속 저택에 감금될 분위기다. 참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여자야.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연합군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지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그녀는 금방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해."
대화가 끝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이번 전쟁은 유독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위험하지 않아서 좋다고 해야 할지. 지루해서 싫어해야 할지.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 저 멀리 작은 성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크기에 비해 낮은 성벽이 모래성 같기도 하다.
거기서 왼쪽으로 조금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도 작은 성이 하나 있었다. 그곳 역시 건물이 훤히 보이는 낮은 성벽이었다.
처음 본 게 파딘 제국의 주둔지, 두 번째가 다나크 제국의 주둔지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헤일리와 곧장 대화가 가능한 나와 달리 이곳에 있는 다나크 제국군에게 헤일리의 명령이 도달하기까지는 한 달의 시간이 걸리니까.
그 전까지 최대한 파딘 제국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허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저기 보이는 저 성부터 본격적인 파딘 제국의 영역이었다. 지금까지는 수월하게 영지를 점령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밀어낸 영지는 파딘 제국파 소속 알만 귀족들의 영지였으니까.
앞잡이들의 최후다.
자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빌붙은 자들의 합리적인 최후였다.
파딘 제국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입을 닦고 반대편에 붙을 놈들이다. 그런 머저리들을 파딘 제국이 챙길 이유가 없다.
'마법.'
그리고 마법병단.
대규모로 떨어질 마법에 대비해 철저하게 산개 방식으로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에어로크 왕국군은 마법병단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제는 오겠지.'
공격마법은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단 한 방에 쌍둥이 성문을 반파했던 거대한 불덩어리.
그때 당시 그 마법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였을지. 아니면 그저 그런 평범한 마법사였을지.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딘 제국엔 그때의 마법사보다 강한 마법사가 존재할 거라는 것이다. 그것도 부대 규모로.
그때처럼 거대한 불덩어리가 부대 한가운데 떨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영화 속에서나 봤던 끔찍한 참상이 재현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며 내가 서 있는 성벽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겠지.
유일한 희망은 쿨타임이었다.
그때도 분명 성문을 때린 불덩어리는 한 번뿐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피해를 감수하고 빠르게 접근해서 성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작전이었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즐겨 보던 삼국지나 자주 했던 전략 게임에선 마법사가 나온 적이 없는데.
도저히 참고할만한 전략이 없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전쟁을 치르고 치를수록 처절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차라리 파딘 제국의 대리자처럼 무력이 강했으면 무식하게 돌진해서 목을 죄 잘라버릴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성을 바라볼 때였다.
싸늘한 위화감이 온몸을 맴돌며 몸이 바짝 굳기 시작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헤르트 전쟁 때도, 제국 전쟁 때도 느꼈던 감각이었다.
"...?"
하늘이 밝았다. 초여름이 지난 하늘이라지만, 서서히 해가 질 때였다. 분명 이렇게 밝을 리가...
"두 개?"
산 끝에 걸린 해가 석양을 뿌렸다. 그 덕에 볼 수 있었다.
태양을 닮은 작은 불덩어리를.
"마법이다!!!"
태양과 겹쳐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일부러 노린 것이리라. 다급히 성벽을 뛰어 내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성벽을 내려가라!! 마법이 온다!!!"
이렇게 멀리서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저게 노리는 게 성벽이든, 아니면 성문이든 그 근처에 있는 생물은 흔적도 없이 소멸할 게 분명했다.
댕 댕 데앵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났나 싶어 성벽을 오르던 지휘관들이 마법이라는 단어에 아뜨거 하는 표정으로 다시 뛰어 내려갔다.
"오, 온다!!!"
이런 미친놈들.
환영 인사 한번 거하게 한다.
정말 태양을 던졌을까.
온통 주황빛이던 세상이 점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등 뒤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골목을 한참 달리던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담벼락을 뛰어넘어 몸을 바짝 낮췄다. 군대에서 배운 걸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이내, 어마어마한 크기의 충격이 몸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거대한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온 세상이 하얗다. 충격을 막아주던 담벼락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몸 위로 쏟아지는 담벼락 파편.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