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84화 (184/191)

〈 184화 〉 결과는 똑같다

* * *

새하얀 신전이다. 단 한 점의 티끌도 없는 하얀 기둥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지붕은 없었다. 구름 위에 세워진 듯 하얀 세상에 세워진 하얀 신전이었다. 중앙엔 여섯 개의 의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놓여있었고, 그중 다섯 개는 주인이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다. 신전을 닮은 흰 피부를 흰 천이 감싸고 있었다.

여자가 넷, 남자가 하나였다. 언뜻 보면 남매처럼 보일만도 하건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조금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묘한 침묵,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그때 비어있는 의자 뒤편의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공간 안으로 보이는 건 어두운 밤하늘과 폐허가 된 신전이었다.

"늦었다."

그 역시 똑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그리고 흰 천으로 몸을 감싼 남자였다.

공간을 가르고 나온 남자가 느긋한 행동으로 마지막 자리를 채우자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던 여인이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잘 나간다고 뻣뻣해졌구나. 얼마 전만 해도 그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녀석이."

"일이 있었을 뿐이다."

"하."

명백한 증오였다. 여인은 노골적으로 남자를 향해 적의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넌 이미 끝났다."

"아직 아니야!"

뭐가 끝났다는 걸까. 남자의 짧은 말에 여인이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내려쳤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아직도 대리자를 괴롭히나. 무의미하다는 걸 알 텐데."

"이, 이익...!"

"네 대리자 배 속에 내 대리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게 결정타였다. 부들거리며 손을 떨던 여인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양손에 맺힌 붉은 기운은 일견 보기에도 파괴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탁자를 밟고 올라가 남자에게 달려들던 여인은 갑작스러운 서늘한 기운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네가 아르테온에게 화를 낼 입장인가?"

가만히 상황을 바라보던 남은 한 명의 남자였다. 황금 기운이 넘실거리는 손이 여인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한 걸음.

아니, 반걸음만 더 갔어도 목에 닿았을 거리였다.

"패배자는 닥쳐라!"

"너도 패배자다. 네가 인정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야!"

황금 기운을 흩뿌리는 자. 얼마 전 대리자를 잃은 알만 왕국의 신이었다. 가장 좋은 능력을 가졌으나 헤르트의 대리자 때문에 가장 먼저 주신 경쟁에서 탈락한 신이었다.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고, 남자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일촉즉발로 점점 다가가는 이때,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사랑싸움은 언제까지 할 거야?"

"폰토스! 이게 사랑싸움으로 보이...!"

"주신 경쟁이 끝나고 나면 둘이 민망해서 얼굴 보겠어? 내가 볼 땐 아르테온 아니면 페르샤가 이길 거 같은데."

"..."

"그러게 나처럼 처음부터 경쟁에 안 끼어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눈 밑에 까만 점이 있는 헤르트의 신 폰토스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신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난 상태였다. 덕분에 대리자도 없었다.

"내가 이긴다."

한 번 대화가 시작되자 너도 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에 대화에 끼어든 건 파딘 제국의 신 페르샤였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을 보면서도 여유롭던 미소를 짓던 아르테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법사의 나라를 다스리는 내가 대리자에게 역발산의 능력을 줄 줄은 아무도 몰랐지 않은가? 덕분에 이번에 크게 한 방 먹였지."

"개인의 힘으로 대륙을 정복할 수 없다."

"전략? 공성? 마음대로 해라. 내 대리자는 힘으로 모든 걸 부실 테니까."

"..."

어찌 보면 아르테온의 카운터 능력이었다. 세상을 넓게 보는 천리안을 제외하면 무능력에 가까운 대리자였다. 놀라운 지략으로 아레스의 대리자를 거꾸로 복종시켰지만, 페르샤의 대리자는 도통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저기... 저도 있는데."

"넌 빠져."

"..."

가장 어리게 생긴 여인이었다. 아니, 소녀라고 해야 할까.

험악한 주변 상황을 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지만, 여전히 탁상 위에 올라간 상태로 으르렁거리는 여인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어머. 왜 얘한테 그래? 평소엔 그렇게 귀여워 하더니?"

"..."

"기 죽지 마. 너도 아직 기회가 있어."

불과 조금 전 아르테온과 페르샤가 이길 것 같다고 하는 걸 소녀도 들었다. 그러나 위로해 주는 사람이 그녀 한 명 뿐이었기에 에르딘의 신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자신도 폰토스처럼 주신 경쟁에서 빠질 걸 그랬다. 다른 신들에게 능력을 인정받고자 시작한 일이 오히려 견제를 받을 줄 몰랐다.

혼자 다른 대륙에 동떨어져 있기에 대화에 자주 끼지 못한 탓도 있었다.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던 소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는... 저도 그냥 포기..."

"포기하지 마라."

"네?"

"끝까지 싸워라."

"..."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아르테온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는 페르샤와 더불어 주신이 될 확률이 가장 컸다.

여유가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무뚝뚝한 겉모습과 달리 다정한 속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조금만 더 해보자. 헤르트를 발판 삼아 대륙에 진출만 하면 자신도 희망이 있었다.

용기를 얻은 에르딘의 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아르테온이 손을 들어 페르샤를 가리켰다.

"파딘을 공격해."

"..."

"끝까지 포기하지 마."

...그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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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 위를 올라갔던 여인이 내려서고, 풀 죽어 있던 소녀가 다시 기운을 차린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디서 생긴 지 모를 붉은 차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라도 있을까. 깊고 진한 향이 신전에 퍼지기 시작하며 처음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흐응... 역시 에어로크에서 난 홍차가 최고야."

헤르트의 신 폰토스의 말에 아르테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아레스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흥. 깊은 산골짜기 아니랄까 봐."

"네 대리자도 매일 같이 마시고 있는 거로 아는데."

"...이익!"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대리자는 아르테온의 대리자를 그리워하며 매일 홍차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아레스가 또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흥."

제지를 받은 아레스가 생각보다 빨리 자세를 풀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다시 탁상에 발을 올렸을 게 확실했다.

그 모습을 본 알만 왕국의 신이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주신께서 연락이 왔다."

"..."

"아레스. 그리고 파르샤. 대리자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말이야."

"위해를 가한 적은 없어."

"어쨌든 손은 댔단 소리군. 대리자를 고른 건 전적으로 너희들의 선택이었다. 신이 피조물을 핍박하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유일하게 직접 선택을 하지 않은 아르테온을 잠시 바라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경고가 내려왔다. 선을 지켜라."

그 말에 아레스와 파르샤의 눈꼬리가 동시에 떨렸다.

주신의 힘은 절대적이다. 이 세계에 절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두 여인이 대리자들에게 했던 짓을 모두 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허나 자신들을 소멸할 힘은 없었다. 힘을 제한하거나,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게 전부일 터였다.

두 여인의 반응을 본 알만 왕국의 신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자존심이 강했다. 게다가 대륙을 양분한 제국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건 방금 보인 행동으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자신은 이미 탈락한 상태다. 그러니 제 역할에 맞게 중재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알만 왕국의 신이 아레스를 쳐다봤다.

"파르샤는 모르겠지만 아레스 너는 이미..."

"닥쳐! 내 대리자에게 당한 주제에! 최면만 풀리면 에어로크고 파딘이고 한 번에 정리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을 할 수록 아레스의 분노가 커지고 있었다. 알만 왕국의 신을 향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르테온을 향했다.

"아르테온! 언제까지 그 잘난 표정을 유지하는지 내가 지켜볼 거다!"

어쩌면 주신의 경고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자극을 당한 그녀를 보며 아르테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가 불쌍하군."

"...뭐?"

"적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현실과 그 아이를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대리자라... 정신이 멀쩡할지 모르겠군."

아이가 불쌍하다는 뜻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레스의 대리자를 뜻하는 아이와 그 대리자가 낳을 아이.

그리고 그 말은, 분노로 눈이 뒤집혔던 아레스가 완전히 이성을 잃게 만드는 마지막 도발이기도 했다.

콰앙!!!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가 박살 났다.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 나무 파편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잠시 의자에 시선을 빼앗겼던 신들이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돌아간 것이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그녀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뻔했다. 헤르트의 신 폰토스를 포함 남자와 소녀가 아르테온을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결과는 똑같다."

"..."

"내 대리자가 불쌍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도발을 하지 않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 수천 년간 그녀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랬다.

다만, 그 분노로 인해 스스로 대리자를 죽이지는 않았으면 했다. 주신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을 떠나 자신의 대리자인 카인이 너무나 슬퍼할 것을 알았기에.

카인은 유독 여인에게 약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을 준 사람들이라 그럴까.

그가 지칠 때마다 연인들의 품속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걸 알았기에 부디 아레스가 실수하지 않기를 바랬다.

"나도 이만 가보지."

이번은 글렀다.

잡담을 나눌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아르테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대리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유로웠던 입장과 달리 공간을 연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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