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83화 (183/191)

〈 183화 〉 동생을 찾아

* * *

공성은 수월했다. 사실 공성이라고 하기도 뭐했다. 헤르트에서 겪었던 전쟁이나, 쌍둥이 성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그때와는 비교 자체가 민망한 일이었다.

다나크 제국에서 사용했던 사다리보다 반 이상 짧은 사다리가 동원됐다. 그리고 고작 열 걸음만 옮기면 성벽 위에 도달했다.

접근을 막는 해자나, 철로 강화된 성문 따위는 없었다.

이틀을 진군한 에어로크 왕국군은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성을 공격했고, 불과 점심도 먹기 전에 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시시해.'

'알만 왕국은 원래 그래요.'

'치열한 건 쌍둥이 성 전투가 정말 치열했다고.'

'...저 놀리시나요?'

뾰로퉁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에겐 아픈 패배였을 것이다. 무려 50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전쟁이었으니까.

'다나크 쪽은 어때?'

'파딘 제국이 제대로 마음을 먹은 거 같아요. 마법병단의 수가 어마어마해요.'

수성만으로 버겁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다나크 제국의 국력이 약해진 것엔 내가 한몫했으니까.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파딘 제국 서쪽으로 십만의 병력이 넘어갔어. 이곳도 금방 힘이 빠질 거야.'

'흐음... 그러면 다행이네요.'

다나크는 기병이 강력했다. 파딘 제국은 마법병단을 운용했다. 알만은 국가 특성상 보병이 강했고, 헤르트는 해군과 용병의 나라였다.

에어로크는?

에어로크는 레인저가 강했다.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자체가 산 위에 있으니까.

덕분에 아르페온 산맥을 넘은 건 수월했지만 그 외 모든 부분은 에어로크가 불리했다.

차라리 산에서 싸우면 모를까.

'맞다. 이야기해 줄 거 있었는데.'

'뭔데요?'

'엘라도 임신했어.'

고민을 많이 했던 문제였다. 지금까지 말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말하지 않은 건 혹시나 헤일리가 느낄 박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 더 늦기 전에 말을 꺼냈다.

한참이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서운해 하고 있을까. 어쩌면 속상해서 대화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도 나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헤일리만 아이가 안 생겼으니까.

'...그래요?'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은 애매했다. 기분이 나쁜 건지, 괜찮은 건지 묘한 대답.

그나마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 끝나고 제국으로 놀러 가면 그때 만들자.'

'...일 년 동안 안 생긴걸요.'

'생길 때까지 하면 되지.'

'...저 그럼 정말 쓰러질지도 몰라요.'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으나 그 속에 담긴 기쁨이 느껴졌다.나를 안 보내려고 피임약을 먹을 기세다. 그리고 헤일리는 충분히 실행할 여자였다.

'그리고 결혼하자.'

'...네?'

'그럼 안 할 생각이었어?'

'...아뇨. 그게 아니고... 이렇게 멋없는 프러포즈는 상상도 못 해서요.'

'...'

이건 실수였다. 품속에 들은 반지 함을 만지작거리다가 나온 무의식적인 말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열심히 변명하는 수밖에.

'지금 이건 약속이야.'

'약속이요?'

'나 없는 동안 다른 남자랑 바람피면 죽는다는 약속.'

'...'

무마하려다 상황이 더 이상해졌다. 그녀도 나도 최면에 걸려 그럴 일은 전혀 없건만 이상하게 그녀와 대화만 하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후후. 그만큼 저를 사랑한다는 거죠?'

'어? 어... 그렇지.'

머리가 좋으면 센스도 좋을까. 내가 민망해한다는 것을 안 그녀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허나, 그건 함정이었다. 프러포즈보다 더 무서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그럼 제가 정실이죠?'

'응?'

'아닌가요? 작위로 보나 가진 능력으로 보나 제가 정실에 가장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

'제게 빌린 식량 내년까지 갚아야 한다는 건 안 잊으셨죠?'

비겁하게 식량으로 협박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년에 식량도 갚아야 했다. 올해는 전쟁으로 농사는 물 건너 갔고, 내년이나 돼야 농사를 제대로 지을 텐데 큰일이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제가 구차하게 식량을 인질 삼아 정실 자리를 부탁해야만 하는 건가요?'

'...'

아까 프러포즈 이야기할 때가 좋았다. 완전히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결국 맞받아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헤일리에게만 통할 수법이었다.

'적어도 세 번째는 시켜줄게.'

'그게 무슨 말이죠? 세 명뿐인데 세 번... 설마.'

쉴 새 없이 나를 압박하던 헤일리의 입이 드디어 멈췄다. 목소리만 들려옴에도 경악하는 그녀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만나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여자야 얼마든지 더 늘릴 수 있었다.

루시, 샬롯, 디아나까지. 그 외에도 마음만 먹으면야...

'미쳤어요?'

'농담이야.'

'...농담 아닌 것 같아요.'

'엘라나 시아라는 모르겠는데 너는 너 뒤로 들어온 여자 가만히 안 둘 거 같아.'

'잘 아시네요.'

성격만 놓고 보면 악덕 영애에 가까운 여자다. 분명 무슨 수를 써서도 자신 다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들을 괴롭힐 게 뻔했다.

어쩌겠는가. 지아비인 내가 잘해야지. 여러 명의 부인을 뒀으면 그게 맞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거다.

'그리고 사실 셋으로 부족하잖아.'

'뭐가 부족한데요? 밤마다 당신 옆에서 자려고 순번까지 정했던 걸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어이가 없었는지 그녀가 다시 쪼아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팔은 두 개고 여인은 셋이었으니까 벌어졌던 일이다.

'옆에서 자면 뭐 해. 늘 중간에 도망갔잖아.'

'그, 그거야...'

'셋이 다시는 안 도망가겠다고 약속하면 그만 들이고.'

장점인지 단점인지. 세 여인을 상대해도 모자랐다. 향긋한 향수 냄새를 흘리며 팔에 안긴 그녀들은 아침이 오기 전 신음을 흘리며 도망갔었다. 그것도 꽤나 자주.

'...'

드디어 조용해진 헤일리를 느끼며 차를 들었다. 그녀를 놀리고자 던졌던 농담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처맞는 말.

'농담이야. 그때도 그렇게 피곤했는데 늘어나 봐. ...어휴.'

매일같이 신경전을 벌이던 세 여인을 떠올리자 치가 떨렸다. 세심한 여인들을 상대로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평등하게 대한다는 건, 하루종일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최면 풀 거에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풀 방법도 없으면서. 제대로 삐진 게 느껴졌다. 늘 톡톡 쏘면서 가끔 보면 귀여운 맛도 있다.

'사랑해.'

'...'

'빨리 대답해줘.'

'...저도요.'

처음 붉은 구슬을 받았을 때는 어따 써먹나 고민했었다. 결국 쓸 데를 못 찾은 나는 일 년 가까이 서랍장에 박아놨었다.

없으면 큰일 날 뻔했어.

'또 연락할게. 회의 시간이야.'

'...알겠어요.'

이왕이면 두 개 더 주면 좋겠다. 엘라와 시아라한테도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제국 전쟁 이후 일 년 반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남자를 떠올리며 구슬에서 손을 뗐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또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이제 지그하르트 후작 쪽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무한 대기에 들어가기에 당분간 할 일이 없었다.

전쟁 속에 찾아온 휴식이라.

전투답지 않은 전투를 끝낸 왕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한 후 두 제국간의 신경전을 관망했다.

가끔 헤일리가 부탁을 보내올 때면, 대규모로 훈련을 나서기는 했으나 직접적인 전투는 피했다.

어차피 여기 있는 파딘 제국군의 절반은 곧 사라질 테니까.

그러나, 한 달 후 날아온 보고서엔 뜻밖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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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다 만 모래성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네 개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다섯 번째는 짓다 만 모양새였다. 자신이 데리러 올 때면 늘 다섯 개에서 여섯 개를 만들었었기에 그는 동생이 멀리 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시야가 핑 돌았다. 오늘은 위험하다고 집 밖을 나오지 말라고 했었다. 분명 신신당부를 했는데...

다급히 집으로 뛰었다. 여기도 깃발, 저기도 깃발. 온통 녹색 깃발투성이다.

갑작스러운 왕국군의 기습에 칼리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산맥을 넘었다는 소식은 전해졌지만, 이렇게 빨리 접근할 줄은 몰랐다.

제국군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던 주민들은 무력하게 왕국군 손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일까. 왕국군은 주민들을 건들지 않았다. 그들은 검 대신 깃발을 들고 다녔다. 물론, 허리엔 기다란 검집이 달려있었다.

평소와 다른 건 저들뿐이다.

레나가 사라진 것도 분명 저들이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

제발. 부디 집으로 돌아갔기를. 제발 집에서 자신을 반겨주기를. 집으로 향하는 사내의 발걸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쾅!

"레나!"

작은 집이다. 그의 시선 안으로 집의 모든 부분이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나, 자신을 반겨주던 작은 소녀는 없었다.

"어이. 거기 뭐 하는 건가?"

녹색 깃발을 든 병사 둘이 다가왔다.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분명 말투는 위협적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레논 역시 이해했다.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안을 둘러본다면 혼란한 틈을 타 강도질을 하는 게 아닐까 오해할 테니까.

허나,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들에게 젊잖게 대화를 하려면 모래사장에서 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집 안을 확인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문틀을 붙잡던 손이 순식간에 병사의 멱살을 잡았다. 그 바람에 녹색 군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동생은 어디 있지?"

"뭐, 뭐야! 뭐 하는 거야!"

"내 동생 어디 있냐고!!!"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얇은 천 옷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천옷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인간이 이렇게 커다란 근육을 가질 수 있을까.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만큼 단단한 근육은 쇳덩어리처럼 단단했다.

멱살을 잡힌 병사가 레논의 팔목을 붙잡았다가 그 단단함에 놀라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내 동생 어디...!"

삐익!­­­

갈라지는 그의 고함과 피리 소리가 난 건 동시였다. 옆에 서 있던 병사가 낸 긴급 신호였다. 골목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작은 골목 입구로 녹색 깃발이 다가오고 있었다.

좋아.

너희들을 다 패 죽이면 동생을 내놓겠지.

땅바닥에 떨어진 군기를 들었다. 두껍던 창대였음에도, 2M에 달하는 키와 근육이 부풀어 오른 그가 잡으니 작은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녹색 군기가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도 치즈 좋아해요!"

"많이 먹거라."

지그하르트 후작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찰을 돌 겸 호숫가로 나갔던 그는 어린 소녀 혼자 덩그러니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었다.

왕국군의 병력을 본 칼리의 성문은 저절로 열렸지만, 왕국군이 칼리를 점령한 것 자체만으로 치안이 나빠진다.

별을 닮은 눈동자가 겁을 먹는 게 보였다. 결국, 막내딸이 생각난 지그하르트 후작은 그 아이를 데리고 임시 막사가 있는 광장으로 돌아왔다.

오빠라 했나.

저 빵을 다 먹으면 집으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당분간 집에서 지내라고 해야지. 오빠를 주겠다며 빵을 챙긴 소녀가 기특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은 그때였다.

"후작님!"

"무슨 일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뚝 멈췄다. 십 년 넘게 함께한 부관이다. 늘 침착하던 그가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괴물이...!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뭐?"

콰앙!!!

"막아!"

"후작님이 계신 곳이다! 막아라!"

지그하르트 후작의 고개가 자연히 돌아갔다. 저 멀리 광장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땅이 울리고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 멀리 동쪽은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 괴물이 나타났는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괴물이 나타나 병사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는가.

"레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피칠갑을 한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의 키가 2M가 훌쩍 넘고 온몸이 근육으로 꽉 들어찬 게 문제였지만.

사람보단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다. 괴물이라고 보고를 한 부관의 말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그때, 열심히 빵을 먹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

번뜩

분명 번뜩였다. 후작도 간신히 들은 작은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괴물의 시선이 정확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능적인 공포라 해야 하는가.

천에 가까운 병사들이 그와 자신 사이에 있다. 도시 곳곳으로 흩어진 병사들이 속속히 모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작은 공포를 느껴야 했다.

허수아비처럼 무너질 병사들이 그려졌다.

그러나, 후작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줄곧 이곳을 바라보던 괴물이 천천히 무릎을 꿇더니,

"하늘을..."

콰앙!!

피어오르는 먼지 속으로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거대했다. 이 정도라면 정말로 괴물이 맞지 않을까. 작은 소녀의 오빠라고는 도저히...

퍼억!

그러나, 후작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먼지 속에서 휘둘러진 무언가에 가격당한 후작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작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껴안는 괴물의 모습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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