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82화 (182/191)

〈 182화 〉 운명은 피할 수 없다

* * *

엑센 성을 점령하고 전열을 갖추던 에어로크 왕국군에게 들어온 첫 소식은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동맹국의 소식이었다.

알만 왕국의 남북을 양 제국이 갈라먹은 상태에서 고작 서쪽 영지 하나만 손에 넣은 우리에겐 일종의 통지서와도 같았다.

바로 헤르트 남부가 함락당했으니 원군을 요청한다는...

원군을 보낼 방법도, 능력도 없는 에어로크로서는 헤르트 남부가 함락당했다는 내용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두 개로 줄어들었군."

세 방향에서 파딘 제국을 압박한다는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헤르트 남부 끝까지 진격한 파딘 제국군이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헤르트가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지도를 바라보던 알케스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돼야 한다.

"지그하르트 후작의 이동 경로는?"

"아르페온 산맥을 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령이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산맥을 완전히 넘어 파딘 제국 영역까지 들어갔으리라 예상됩니다."

그제야 알케스 후작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설마 반격을 할 줄은 몰랐을 거다. 두 제국이 신경전을 벌이는 알만 왕국에 한발 걸친 것도 놀랄 일인데 본토를 직접 침공하다니. 등을 찔린 기분에 등골이 서늘할 것이다.

"배는 준비 됐나?"

"예. 여객선까지 동원령을 내려 물자를 싣는 중입니다. 칼리를 점령하는 대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젊은 자작의 보고에 알케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된 대로 잘 진행되는 중이다. 비록 시작은 비틀거렸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전선 안쪽이었다.

이젠 내 차례다. 알케스 후작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영지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잠시 쉴 때입니다."

"잠시 쉴 때라?"

의아한 시선이 날아온다. 후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파딘 제국 역시 알만 왕국은 포기할 수 없는 곡창지대입니다. 저들의 방심을 틈타 첫 영지를 빼앗을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엔 마법병단을 상대해야 합니다."

"음... 마법병단은 상대하는 건 필연적인 일 아닌가?"

"맞습니다. 허나, 수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서부가 텅텅 비었을 것이다. 고작해야 국경 수비를 맡은 변경백이 전부겠지. 어쩌면 그 영지도 병사를 모아 전쟁터로 나왔을지 모른다.

"지그하르트 후작을 막기 위해 병력을 나눠야 할 겁니다. 저희는 알만 왕국을 지키는 파딘 제국의 장벽이 얇아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이면 됩니다."

"호오..."

성동격서. 기발한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병법이 식상한 건 마찬가지다. 단지 얼마나 병법을 잘 활용하느냐가 전투의 승패를 가를 뿐.

미리 이야기했던 작전은 아니었다. 우리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지그하르트 후작은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먼 거리는 애초에 연락을 통해 움직임을 조절할 수도 없다. 전령이 이동하는 데만 왕복 두 달 가까이 걸릴 테니까.

독자적인 부대다. 양쪽에서 다나크 제국을 공격했던 에어로크와 헤르트처럼.

그러나 활용할 방법은 있었다. 지그하르트 후작이 설치면 설칠수록 파딘 제국의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다나크 제국을 휘몰아친 게 우연은 아니군."

"..."

별것도 아닌 작전이다. 조금만 전장을 넓게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작전이다. 알케스 후작의 진심이어도 할 말이 없었고, 주변 제장들을 멕이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할 말이 없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지휘관들을 바라보던 알케스 후작이 말을 이었다.

"부대를 정비하는 동시에 동쪽으로 움직인다. 목표는 페루와 영지. 나흘 안으로 성을 점령하고 방어막을 세운다."

"알겠습니다."

에센 성을 제외하면 알만 왕국의 모든 성은 성벽의 높이가 3M가 넘지 않았다. 수성을 위한 성이 아니기에 공성은 수월할 것이다.

"사만의 병사는 엑센 성을 지킨다. 이곳을 보급기지 삼아 파딘 귀족파들의 영토를 흡수한다."

좋은 작전이었다. 다나크 제국 당시 뷔른 성이 보급기지였던 것처럼, 어느 전쟁이나 안전한 후방이 우선시 돼야 했다.

그렇게, 해가 뜸과 동시에 엑센 성을 들어왔던 에어로크 왕국군은 그 해가 지기 전 성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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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소녀의 취미는 호숫가에 앉아 모래성을 쌓는 것이었다. 소녀에게 호수란, 그녀가 셀 수 있는 모든 숫자를 더해도 계산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였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일을 나간 오빠를 기다리는 것. 소녀에겐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저 멀리 어딘가에는 이 호수보다 큰 바다라는 게 있다는데. 그 물은 마시면 소금을 씹은 것처럼 짜다고 들었다.

그때부터 소녀의 꿈은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낙타에 짊을 싣고 이리저리 마을을 돌아다니는 상인들을 따라 언젠가는 보러 가고 싶었다.

여섯 번째 모래성을 쌓을 때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고작해야 열 살이나 됐을까. 포동포동하게 젖살이 오른 어린 소녀를 보며 건장한 청년이 소리쳤다.

"레나!!"

"오빠!!"

내일 올게. 파도에 쓸려 사라질 운명임을 알면서도 소녀는 모래성을 보고 인사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일 모랫바닥을 뒹군 탓에 온몸이 흙먼지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청년은 소녀를 탓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어 팔을 벌리자 소녀가 품에 뛰어들었다.

"배고프지? 얼른 집에 가자."

"응!"

소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오빠의 목에 팔을 두른 소녀가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 주위를 살펴봤다.

세상이 넓어졌다. 오빠에게 안길 때마다 자신도 키가 커진 기분에 소녀는 늘 오빠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가는 걸 좋아했다.

"오늘은 돈 많이 벌었어?"

"그럼. 우리 레나 맛있는 거 사주려고 많이 벌었지."

소녀의 눈은 밤하늘의 별을 닮았다. 한낮에도 밝게 빛나는 동생의 눈을 보며 청년이 걸음을 옮겼다. 2M에 달하는 거대한 신장에 낡은 천옷 안으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은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을 연상케 했다.

짧은 밤색 머리를 한 남자는 그렇게 작은 동생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자... 레나. 이것 봐."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동생을 씻긴 후 식탁에 앉은 청년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치즈였다. 낙타의 젖으로 만든 치즈.

"와아아!"

아까보다 더 밝게 빛나는 눈을 보며 청년이 빠르게 빵에 치즈를 발라 소녀에게 건네줬다. 그리곤 자신도 빵 한 조각을 들어 치즈를 위에 올렸다.

즐겁게 조잘거리는 동생과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오빠가 그렇게 식사를 시작했다.

단 둘만의 식사 시간이었다.

"오빠 내일도 일하러 가?"

"으, 응? ...응."

낡아빠져 몸을 뒤척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침대에서 남매가 마주 보고 누워있었다. 팔을 베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은 청년이 자신을 닮은 밤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내일은 빨리 올게."

"괜찮아!"

밤마다 물어오는 관례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오빠의 표정은 도통 펴질 줄 몰랐다. 마을을 돌은 토속 병으로 부모가 죽은 후,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었다.

오빠이자 아빠, 엄마로서 동생을 보살폈다.

내재된 힘이, 그리고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운명에 오늘도 밤을 설칠 것임을 알았지만, 청년은 후회하지 않았다.

대륙의 통일보다, 그리고 개인의 안위보다 동생이 중요했다. 품에 안긴 이 작은 소녀가 더 중요했다.

통일이니 소원이니 그게 무슨 소용인가.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인 순간 전쟁터를 전전할 것을 알았다.

그 위험한 곳에 동생을 데려갈 수는 없다.

서서히 눈을 감는 동생을 보며 청년이 이를 악물었다. 이제 슬슬 올 것이라는 걸,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이 찾아온다는 걸 숱한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크흑...!"

동생의 등을 두드리던 손을 뗐다. 혹시나 떨리는 손에 동생이 깰까 걱정됐다.

고통이 찾아오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신호였다.

격동하는 대륙의 정세는 알고 있었다. 온 대륙이 전쟁에 휩싸였다는 것도. 이 모든 전쟁의 주동자는 하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신들이라는 것도.

왕국마다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 역시 자신과 같은 운명임을 알았다.

그래도 안 된다.

자신만큼은 안 됐다.

혹시나 잘못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면, 이 작은 아이를 지킬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자신을 선택했던 신이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다시 고르기를 바랬다.

물론, 지난 4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바람이었다.

"큭...!"

심해지는 고통에 청년이 비명을 터트렸을 때, 작은 방 너머 공간이 찢어지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흰옷, 하얀 피부.

자신을 보며 기뻐하던 신은 어느샌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향해라."

"안... 됩니다."

"운명이 다가온다."

"...그래도 안 됩니... 큭...!"

정신이 흐릿해졌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며 침대가 흠뻑 젖었다. 혹시나 동생이 깰까 그 와중에도 청년은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피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다."

"안... 됩..."

흐릿한 와중에도 고개를 젓는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사내를 보며 남자가 인상을 썼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대리자로 결정됐을 시점부터 그건 정해졌다.

그도 곧 그걸 알게 되겠지.

공간이 갈라지며 빛이 뿜어져 나온다. 잠시 서쪽을 바라보던 신이 그대로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여름 호수 남쪽에 위치한 마을. 칼리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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