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아가야
* * *
익숙한 성벽이 보인다. 새벽 어스름이 깔린 안개가 짙다.
하얀 창이 그려진 깃발이 성벽마다 꽂혀있고, 기다란 성벽엔 병사들이 다가올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굳이 따지면, 병사는 아니었다.
모두가 떠난 영지를 지키는 몇 안 되는 청년들과 노인들이었으니까.
그 순간,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리 경계를 했음에도 병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강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부서졌다.
왔구나.
꿈에서 봤던 장면이 그대로 재현된다. 수없이 꿈을 꿨던 그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무력하게 열린 성문으로 적들의 기마가 쏟아져 들어온다. 검을 든 미하일은 그저 바라만 봐야 했다. 꿈에서 봤던 그 장면, 그 기병들이다.
그때, 성문을 뚫고 들어온 적군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카인이구나.
많이 변했다. 예전 앳된 얼굴은 사라지고 건장한 사내가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물론, 꿈에서는 숱하게 많이 본 얼굴이었다.
그의 등 뒤로 무력하게 쓰러지는 병사들이 보인다.
창 대신 곡괭이를 들고, 낫을 든 노인들이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꿈과 다른 장면이었다.
"미안해. 친구."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온 카인이 검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꿈과는 달리 손에 검이 들려있건만, 미하일은 움직이지 못했다.
늘 그렇듯, 그의 검이 자신의 복부를 뚫고 들어왔다. 수없이 많이 본 장면이건만, 처음으로 느껴진 통증에 미하일이 신음을 터트렸다. 현실이라는 증거였다.
칼이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검날을 붙잡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이 울컥거리며 피가 올라온다. 꿈과 달리 말을 하기 어려웠다.
몇 번이고 불렀던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며 그를 바라봤다.
"...카인...!"
너는 어떻게 최면에 풀렸니.
나처럼 우연히 풀렸을까. 아니면 아직도 최면에 걸려 그 여자의 손에서 놀아나는 중이니.
지금쯤 깨어나야 할 타이밍이건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이곳이 현실임을 깨닫는다.
검날을 붙잡은 손의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끝없이 목을 타고 넘어오는 핏물에 앞섶이 젖었다.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피하지 못한 미래를 맞닥뜨린 미하일이 힘없이 웃었다.
촤학!
복부를 뚫었던 검이 빠져나갔다. 지지대가 사라진 미하일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만약 아버지를 따라 영지를 떠났으면 이렇게 죽지 않았을까. 예지를 비켜갈 수 있었을까.
혹시...
자신이 영지로 돌아오게 된 것도.
영지를 떠나려는 아버지의 행동도,
그런 아버지에게 고개를 저었던 자신도,
모두...
그러나 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고개가 털썩 꺾이며 옆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그 친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말발굽 소리.
그는 이 장면도 예지했을까. 잘 모르겠다. 정말 미래를 봤다면 엑센 후작을 따라 영지를 떠나지 않았을까.
입맛이 썼다.
처음으로 다른 왕국의 대리자를 죽였건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게 자신의 운명이자 그의 운명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던 카인이 천천히 성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어스름이 깔리며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저 멀리 안개 사이로 아군의 주둔지가 보인다.
바닥에 떨어진 활과 화살을 들어 횃불에 갖다 댔다.
그래. 결국 성공했다. 첫 작전의 실패는 완전히 무마했다.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변명을 짜내야 하겠지만, 어쨌든 입지는 다시 공고해졌다.
알만 왕국의 마지막 전투를 기념하듯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제 알만 왕국엔 더이상 왕국을 위한 귀족은 없다.
단 한 명도.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불화살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흙바닥을 적신 시체가 보인다. 화려한 금발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무덤은 만들어 줘야지.
대리자의 관계는 끝났으니 이제는 친구로서.
"후후."
어쩌다 보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게 못내 가슴에 걸렸지만, 어쨌든 목표한 바는 이뤘으니 괜찮았다.
"모두 다 그를 위해서야."
그가 갑자기 최면에서 깨어난 것도, 깨어나자마자 저택을 탈출해 영지로 돌아간 것도 모두 자신의 작품이었다.
아마 알만 왕국의 대리자는 죽기 전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들었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지난 일 년 동안 매일 같이 먹었던 홍차였다. 이걸 먹을 때마다 카인 생각이 났다.
"카인이 보고 싶네."
엑센 후작이 영지를 버린 건 부가효과였다. 몇 년 전 알만 왕국의 대리자를 처리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걸어뒀던 최면이니까.
허나 미하일 그가 끝까지 영지에 남은 건 자신의 작품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직접 죽이려 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혹시나 이걸로 그와 관계가 틀어질까 봐.
그래서 그에게 직접 대리자를 처치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것이 훗날 혹시 모를 분쟁의 불씨마저 없앨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계획대로 최면에서 깨어났고, 영지로 돌아갔다. 또 다른 최면이 내재된 지도 모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헤일리가 배를 쓰다듬었다. 조금의 군살도 없이 매끈한 배가 만져졌지만,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아빠가 보고 싶지. 아가야?"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다 주저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나중에 제국에 놀러 오면 깜짝 놀래켜 줘야지. 두 눈이 동그래진 그의 표정을 상상할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시아라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두 번째니까 괜찮아."
처음은 욕심이다. 그래도 마지막은 싫었는데, 정말 다행히 그의 영지를 떠나기 전날 했던 그때가 들어맞은 듯했다.
이번 겨울이 오면 아이가 태어나겠지. 부드러운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짓던 그녀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안돼.
안돼!!!
"아아악!"
뇌가 쪼개지는 고통에 배를 쓰다듬던 손이 머리를 붙잡았다.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던 헤일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돼!!"
누구인지 모를 허공을 향해 그녀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젊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안돼요...! 제발! 아아악!!!"
헤일리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고통에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라. 그 와중에도 헤일리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하얀 피부와 흰 천으로 감싼 여인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최면이 풀리면 다 끝날 일이다."
"안 돼요... 제발..."
헤일리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흐트러졌던 갈색 머리카락 역시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네 임무를 망각하지 마라."
"아니에요. 아레스님 제발..."
헤일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최면을 쓴 직감이었다. 신의 손에 따라 억지로 최면이 풀리게 되면 머리가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카인은 물론이고 뱃속의 아이까지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됐다.
"포기... 포기할게요... 그러니까 아레스님...! 아, 아아악!!!"
무표정하던 여인의 얼굴이 깨진 건 그때였다. 헤일리의 날카로운 비명이 방안에 퍼졌다.
"허튼소리 말아라. 너는 대리자다."
"아아아악!!!"
헤일리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뇌를 직접 손으로 으깨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헤일리는 능력을 풀지 않았다.
초월적인 집중력으로 계속해서 능력을 발현했다.
이러다가 정말 한계에 도달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신이 포기했다. 조금이라도 더 고통이 강해지면 죽었을 그 선 끄트머리에서.
"저도... 저도 행복한... 삶을..."
"너는 대리자다."
최면으로 만들어진 행복이라 해도 좋았다. 어차피 카인도 자신을 좋아하니까.
공작의 차녀로 태어나 지나치게 똑똑한 머리로 모든 사람들의 질투를 받았다.
여자로 태어난 게 아깝다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던 것 같다. 공작은 자신의 능력을 칭찬하고는 늘 안타까운 눈빛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이 세상을 자각한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좋아도 결국 누군가와 정략결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을.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멍청한 남자는 싫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남자는 자신보다 멍청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사람 중 자신이 가장 똑똑하지 않을까.
그때부터 그녀의 이상형은 자신에게 한 방 먹이는 남자였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생각을 해내는 사람.
그리고 그 이상형은 최면이라는 능력을 갖게 된 다음부턴 더더욱 어려운 난이도가 돼버렸다.
그걸 처음으로 깨부순 게 카인이었다.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찼던 자만과 자신감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자신을 삼킨 남자.
몸을 넘어 마음마저 복종하게 만든 남자.
적으로 시작한 관계였지만, 그녀는 괜찮았다. 그렇게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지난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여자가 둘이나 더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빼곤.
"제발... 저도 행복한..."
"너는 대리자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짜낸 집중력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안광이 점멸하며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계에 도달한 것이라. 헤일리를 바라보던 여인이 혀를 차더니 손을 내렸다.
"너는 대리자다."
"하아... 하아..."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이 몸을 돌렸다. 공간이 갈라지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헤일리를 돌아본 그녀가 공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장했을 때처럼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방은 바닥에 쓰러진 헤일리만이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헤일리가 몸을 일으켰다.
혀를 씹은 탓에 입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녀는 익숙한 듯 손수건을 들어 입을 가렸다.
차게 식은 홍자가 보인다.
카인을 떠오르게 만들던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의자에 앉은 헤일리는 한참을 찻잔을 바라봤다. 마치 인형처럼. 미동 없이.
그 인형을 깨운 건, 그리운 목소리였다.
'헤일리.'
'...네?'
'뭐 하고 있었어.'
'...차 마시고 있었어요.'
정말 다행이다. 입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 뭉개진 발음을 들키지 않아서.
'...나는 매일 먼지 마시는데.'
'후후... 부럽나요?'
화가 풀렸을까. 아까보다 훨씬 다정한 말투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전쟁 끝나면 놀러 갈게. 잘 지내고 있어.'
'그럼요. 여기만큼 안전한 데가 없는걸요.'
그녀가 다시 배를 쓰다듬었다. 잘록한 허리와 부드러운 배만이 만져진다. 거기 어딘가 있을 생명을 상상하며 헤일리가 눈을 감았다.
아가야.
조금만... 조금만 버텨주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