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잘 차려진 밥상
* * *
"돌아온 병력은?"
"삼천이 조금 안 됩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슬란 백작이 앉아있던 자리는 공석이었다. 어깨에 맞은 화살을 뽑기 위해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들 때가 있다.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미세하게 뒷골이 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새벽녘 눈을 뜬 시점부터 그랬다.
"적들의 피해는?"
"...성벽이 반파되기는 했습니다만 큰 피해는 주지 못한 거로..."
함께 따라 나갔던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를 쳐다보던 시선이 서서히 내게 모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번 기습을 계획한 건 바로 나였으니까.
"제 잘못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진군을 했고,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기습을 펼쳤다. 그 증거로 아군의 별동대가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엑센 성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피곤했어도 끝까지 구슬로 관찰을 했어야 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들킨 것인지, 적들은 아군의 별동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한 번 실수했다고 자책하지 말게. 큰 틀은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
알케스 후작이 위로를 건넸지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첫 전쟁의 첫 작전이었다. 그 어떤 작전보다 나를 증명할 중요한 작전이었다.
신뢰에 금이 갔을 거다. 그리고 한 번 더 실패하면, 명성에 비해 보잘것없는 놈이라는 인식이 박힐 것이다.
여기엔 후작도, 2왕자도 없으니까. 결국,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인 부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적들이 낌새를 알아챈 게 언제였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몰랐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저들의 척후가 우리를 발견했다면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게 불화살이든, 아니면 나팔 소리든. 그런데 아무런 징후도 없었다고? 말이 안 됐다.
"솔직하게 말하게."
"정말입니다. 불화살이 하늘을 갈랐다면 발견 못 했을 리가 없습니다."
달조차 모습을 감춘 그믐이었다. 하늘에 떠오르는 불덩이를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란 소리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알만 왕국의 대리자. 혹은 그의 능력.'
아무런 징조도 없이 기습을 눈치챘다. 나처럼 천리안을 볼 수 있는 건가? 아니다. 분명 구슬은 하나라고 했다.
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럼 도대체 무슨 능력일까.
소리?
마법?
혹은 동물과 교감을 한다던가.
너무 많다. 기습을 알아챌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막막하구나.'
나를 상대했던 제국군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 상황이 웃겨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냥 정공법으로 돌파해야 할까? 고개를 저었다. 정공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아무런 작전도 없이 그저 힘으로 밀어내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엑센 성은 시작이다. 그 후로 계속해서 전진하며 파딘 제국과 맞닥트려야 한다. 여기서 허무하게 병력을 소모할 수 없었다.
그때, 알케스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우리 백작."
"예."
"누구나 실패는 하는 법일세. 자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운이 좋을 때도, 없을 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얼굴이 피가 쏠렸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공존하는 기분에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이 기분으로 후작을 보면 분명 노려볼 것 같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여유로운 후작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조금 기대를 했는데 실망이라는 투로.
"이번 전쟁은 배울 점이 많지 않겠나? 예를 들어 연륜 같은 거 말일세."
모르겠다. 지금 내가 충격에 빠져 그렇게 들리는지, 정말로 나를 비꼬고 있는지.
"어쨌든, 다시 작전을 짜야겠구먼. 좋은 생각들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보게."
그렇게 어제보다 조금 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분노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알만 왕국에도 분명 대리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간과한 건 내 잘못이 맞았다.
그때,
'카인.'
'응?'
'기습에 실패했다고 했나요?'
'...응.'
'후후... 내 말 잘 들어요.'
갑작스러운 헤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안 됩니다! 영지를 버린다니요!"
"이 미련한 녀석! 목숨이 먼저다! 다나크 제국으로 합류하면 언제든지 영지는 되찾을 수 있어! 지금은 저 매국노 같은 파딘 제국파 놈들을 밀어내는 게 우선이야!"
그 말에 미하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파딘 제국파는 매국노고 우리는 아닙니까. 우리 역시 알만 왕국의 귀족입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를 만난 이후로 아버지는 제국의 노예를 자청했다.
바로 오늘 새벽 에어로크 놈들의 기습을 효과적으로 물리쳤음에도 아버지의 생각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주민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 버리고 떠나면 훗날 이 영지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다나크 제국을 점령했던 에어로크 왕국이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모르느냐! 그들은 점령한 영지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건들지 않았어!"
몰랐다. 그땐 저택에 갇혀있었으니까. 헤일리라는 잔악한 여인에게 잡혀있었으니까.
"제국이 어떤 상태인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제국은 한 여자의 손에 놀아나는 중입니다!"
"또 그 소리느냐! 어디서 방탕하게 놀다 와서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면 믿을 줄 알고! 한 번 더 그런 말을 했다간 내쫓을 줄 알 거라!"
미하일의 눈빛에 절망이 물들기 시작했다. 막을 수 있다. 자신의 예지만 있으면 저들의 기습은 언제든지 막을 수 있다.
바로 오늘 새벽처럼.
망명 준비로 바쁜 성내를 바라봤다. 값비싼 재물부터, 군량으로 쓰였을 식량까지 수레에 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안 가겠습니다."
"뭐?"
"끝까지 남아 싸울 겁니다. 저는 이 영지를 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돌아온 영지인가. 지금도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 미친 여자가 자신을 잡으러 오는 악몽을.
예지를 꾸는 날보다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았다. 그 여자를 안 본 지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매일같이 꿈에 나오니까.
미하일이 엑센 후작을 똑바로 노려봤다. 자신은 절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곳 영지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정말로 미쳤구나."
"전 미친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버린 주민들을 제가 살리고자 하는 일입니다."
"병력도 모두 빠진다. 고작 너 혼자서 어떻게 영지를 지킨다는 것이냐!"
"그래도 전 안 갑니다."
아버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보다 다나크 제국에게 몸을 기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다나크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절대 안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
그 말과 함께 엑센 후작이 몸을 돌렸다. 냉혹한 아버지의 눈빛을 받은 미하일이 눈을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성공적으로 기습을 막아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자신도 안다. 알만 왕국은 이미 끝났고, 귀족들은 양 제국에 달라붙었다는 것을.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것을.
이미 대리자로서 자신은 탈락한 걸지도 모른다. 예지라는 능력을 받았으면서 다른 대리자에게 이년 넘게 조종당했으니.
"...그래도 지키리라."
간절히 바라고 바랬던 영지다. 감옥에 갇혀 꿈꾸던 영지로 돌아왔다.
자신 혼자 칼을 들더라도.
그래도.
"...백작님.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궁시렁거리는 로그멜 경을 무시하고 말에 올라탔다. 처음 말을 탈 땐 고삐를 잡는 것도 어려웠는데, 이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고개를 돌리자 이리저리 시선이 흔들리는 기병들이 보였다. 상관의 고집에 개죽음을 당하게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해는 한다. 나 역시 모든 사실을 몰랐다면 절대 말을 타지 않았을 거니까.
"고작 삼백입니다. 일만의 병사로도 실패했는데 삼천도 아니고 삼백이라니..."
"로그멜 준 남작."
"...예."
"내가 언제 자네를 사지로 보낸 적 있나?"
"있죠."
"..."
칼 같은 대답에 입이 닫혔다. 위험한 일에 여러 번 써먹긴 했지... 대신 그때와 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나도 직접 가지 않나. 아니면... 나를 못 믿는 건가?"
결국 필살기를 썼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던 로그멜 경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어쩌면 모르지. 준을 떼고 진정한 남작이 될지."
"...가시죠."
역시 그를 유혹하기엔 작위만 한 게 없었다.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환한 달이다. 그믐이 지난 세 개의 달은 다시 살을 찌우고 있었다. 고작 반달인데도 넓은 평야가 훤하다. 저 멀리 알만에서 가장 높은 성이 보였다.
성 위에 있는 횃불보다 밤하늘의 달이 밝다.
그게 무슨 소리냐.
'텅텅 비었다는 거지.'
마음을 다잡았다. 무려 오 년 만에 재회다. 환하게 웃던 금발 청년이 떠올랐다.
잘 지냈나. 미하일.
"출발한다."
어쨌든, 저쨌든 명령은 명령이다. 평소보다 늦게 반응한 대열을 느꼈지만, 무시하고 속도를 높였다.
새벽 어스름 안개를 뚫고 삼백의 기마가 성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한 작전이다.
고작 삼백의 기마로 성문을 열겠다니.
그래서 억지를 부렸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시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그 말을 들은 알케스 후작의 눈빛에 경멸이 맴도는 걸 알았지만 무시했다. 나 역시 극히 분노한 상태였으니까.
'엑센 후작은 영지를 버리고 제국으로 망명을 올 거예요.'
'텅텅 비었을 거예요. 확인해 보세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후후... 비밀이에요.'
'그리고... 성문이 열리면 제 선물이 있을 거예요.'
제국 수도에 앉아 이곳의 문을 열었다. 경악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났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본 걸까.
따라갈 수 없는 천재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일까. 철통같던 엑센 성을 말 한마디에 열어버린 그녀의 지략에 허무함까지 들었다.
그것도 무려 몇 달 전부터.
잘 차려진 밥상을 먹으러 간다. 짜내고 짜냈던 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녀는 아주 쉽게 엑센 성을 조리했다.
속도를 높였다. 새벽안개가 얼굴을 스친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성벽 위 횃불을 바라보며 억지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그녀는 내 편이다. 자괴감보단 고마움을 느끼는 게 옳다.
마음을 숨기려는 듯 입이 크게 열렸다.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 성벽을 보며 기병들이 희망을 찾기 시작할 무렵, 크게 소리쳤다.
"돌격!!"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