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실패
* * *
그건 무슨 느낌일까.
클럽에서 눈이 맞아 원나잇을 즐겼던 여자가 회사 후임으로 들어오면.
아는 체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그 느낌을. 뇌가 비었다면야 섹파가 생겼다고 좋아하겠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라면 그때부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자세한 상황이야 다르지만, 어쨌든 막사를 흐르는 느낌은 그와 비슷했다.
"차 한잔할래?"
"...네."
본대에 합류하고 난 후 어떻게든 피해 다녔는데 결국 마주쳤다. 이쯤 되면 미하일도 만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기 마련이다.
여러모로 참 불편한 관계가 많은 전쟁이다.
차라리 남쪽으로 갈걸. 후작을 따라 아르페온 산맥을 넘었으면 루시도 미하일도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이미 늦어버린 후회를 하며 차를 따랐다.
"첫 전투는 백작님께서 직접 하신다고?"
"...네."
"기습이니 별일 없을 거야."
"..."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에서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펄펄 올라와 입을 대는 것도 두려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지난 전쟁 때 루시도 참모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정기 회의가 끝나고 불쑥 막사를 찾아온 아슬란 백작은 등 뒤에 숨어있던 루시를 놓고 나갔다.
좀 친해져라. 혹은 배울 게 있으면 배워라. 이런 뜻일까.
어쨌든 반강제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우리는 숨 막히는 침묵에 질식하는 중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루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매혹적인 눈물점에 늘 시선을 뺏긴다.
"...헤라는 만났나요."
"헤일리야."
"네?"
"진짜 이름은 헤일리야."
만났다는 대답 대신이다. 역시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어떻게 최면을 깼냐고?
뭐 어떡해. 무식하게 벽에 대가리 박았지.
"어쨌든 이젠 내 여자야."
그리고 나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아차 싶어 재빨리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충격을 받은 듯 살짝 벌어진 입이 떨리고 있었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으니까.
루시를 붙잡지 않았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시작이 좋지 못해서.
그리고 그건 헤일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루시보다 몇 배는 안 좋은 시작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붙잡지 않고 헤일리는 붙잡았다. 그녀 입장에선 충격에 빠질 만 한 내용임에는 분명했다.
"완전히 최면에 풀린 건..."
"됐어요. 제게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요?"
싸늘한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끊긴 내 말이 궁금했는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완전히 최면에 풀린 게 아니라고요?"
"...그래."
여기서 더 떨어질 이미지가 있을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걸 털어놨다. 굳이 따지면 나도 그녀도 피해자일 뿐이지만, 이 세계 분위기상 그녀를 책임지지 않은 내 잘못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내 여자가 됐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곱게 모인 눈썹이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할 말이 없어 다시 찻잔을 들었다. 아까는 그렇게 뜨겁더니 다 식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봤다.
"백작님을 탓할 생각은 없어요. 저 역시 백작님을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요."
"..."
"그래도 그때 그렇게 저를 보낸 건 꽤 상처였어요. 그건 아시죠?"
"...미안."
그냥 없던 셈 치자고 했었나. 상실감이 컸을 그녀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나야 닳고 닳았지만, 그녀는 처녀였으니까.
뭣보다 최면에 빠진 상태였지 않았나. 사실 서로를 위로해주는 게 더 어울렸을 상황이었다.
"...됐어요. 아무튼 작전이나 검토해줘요."
그래도 조금은 풀렸을까. 처음 아슬란 백작 등 뒤에서 나올 때보단 훨씬 홀가분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처음으로 인상이 펴지며 잔뜩 올라갔던 눈물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언제 봐도 매혹적인 점이다. 귀여운 얼굴에 찍힌 점이 안 어울릴 만도 하건만 오히려 그녀를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조금 더 친해지면 한번 눌러볼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잘 될까요?"
모든 설명을 들은 그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미소를 지어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무조건 성공할거야."
10만. 한 나라를 쳐들어 가기엔 모자란 숫자다. 분명 엑센 후작가에서도 우리의 동태를 살피고 있을 터. 설마 이게 전 병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를 노려 기습적으로 엑센 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들킬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별동대 인원은 일만. 아슬란 백작이 지휘를 맡았다.
고작 일만으로 공성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가능했다.
알만 왕국은 전쟁을 위한 성이 없었다. 두 제국의 비호아닌 비호를 받았으니까. 혹시나 반란을 일으킬까 양 제국이 감시의 눈을 부릅 뜬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알만 왕국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자 가장 방어력이 약한 국가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전쟁 시 수성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성이 바로 에어로크와 인접한 엑센 후작가의 성이였다.
그러니 엑센 성만 밀어내면 걸림돌은 없었다. 그 외 다른 지역의 평균 3M도 안 되는 낮은 성벽으론 수성이 불가능니까.
"어쩌면 아슬란 후작가가 될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되면 훗날 나는 루시에게 말을 높여야 한다. 후작위를 불려받으면 그녀가 아슬란 후작이 될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루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가면 백작님도 후작일 것 같은데요."
"그럼 그때는 서로 반말하는 거지."
그게 낫겠다.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작위가 깡패라고 사소하게 트집이라도 잡으면 어떡해.
"...백작님은 예전부터 저한테 반말하셨는데요?"
"그땐 검을 안 든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처음엔 분명 나도 존대를 했었다. 그녀에게 속아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 반말을 했지.
이 여자의 정체가 뭔지 알고 존대를 하나. 꽃뱀한테 존대하는 바보는 아니다.
제자리를 찾았던 눈물점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운데로 모인 미간이 분노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왜 자꾸 그 얘기는 꺼내요?"
"내가?"
...어이가 없네?
"몰라요! ...갈 거예요!"
그녀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난 게 아니라 민망해서 저러네.
조금만 더 친했으면 어디서 땡깡이냐고 딱밤을 놨을 텐데.
아쉬움을 달래며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할 이야기는 끝났고 밤도 늦었으니 슬슬 갈 타이밍이긴 했다.
"...안 데려다줄 거에요?"
"...내가?"
...어이가 없...
"이익...! 빨리 나와욧!"
10만 명 한가운데 있는 막사에서 뭐가 무섭다고. 작게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전쟁 내내 봐야 하는데 토라지면 피곤해진다.
막사를 벗어나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아직 초여름이라 선선한 날씨다. 달빛 한점 없는 밤하늘을 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막사 어딘데?"
"...저기요."
"..."
고작 삼십 미터도 안 떨어진 곳이었다. 그제야 그녀의 본심을 깨달은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 역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고작 두 칸 떨어진 그녀의 막사를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도 나도 말은 없었다. 나온 김에 별구경이나 하다 갈 요량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선명했던 달이 보이지 않는다. 그믐인 탓이다.
그녀가 데려달라고 했던 이유. 막사를 찾아왔던 아슬란 백작이 갑주를 입었던 이유.
바로 오늘이었다.
어느새 숙영지 외부까지 나온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들려오는 땅을 울리는 진동 소리에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어둠을 바라봤다.
"잘 하실 거야."
내일 아침 승전보를 들고 돌아올 것이다. 구슬로도 위험요소는 없나 끝까지 확인했으니 변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바라봤다. 아슬란 백작이 걱정되나?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 저번 전쟁은 어떻게 했대.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들어 어깨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화들짝 놀라며 굳는 게 느껴졌다.
"잘 될 거야."
"...네."
이제야 내 목소리가 들리나 싶다. 그렇게 캄캄한 어둠 속을 바라보던 우리는 사위가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잘 자."
"...네."
그녀를 보내고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간이침대에 누웠다. 요 며칠 기습작전을 짠다고 쉴 틈이 없었다.
엑센 성을 점령하면 이제 시작이다.
파딘 제국이 정신을 차리고 가로막기 전까지 최대한 영토를 점령해야 했다.
몸이 피곤하니 딱딱한 간이침대도 안락하다. 사실 여기서 잔 것만 이 년은 될 텐데 적응할만하지.
내일 아침은 기분 좋은 소식으로 시작하겠지.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본능적인 불안감에 눈이 떠졌다.
막사 밖에서 전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충 내갑을 입고 막사를 나왔다.어스름이 깔리며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 눈에 익은 귀족이 보였다. 이제 막 자작 위를 물려받은 자라고 했었나. 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청년이었다.
"무슨 일인가?"
"아, 백작님!"
등을 간지럽히는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 때문에 더욱 그랬다.
"기습을... 실패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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