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8화 (178/191)

〈 178화 〉 귀족 아니랄까 봐

* * *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에어로크에서 가장 먼 영지에서 출발한 탓에 자연히 합류도 제일 늦은 나는 지휘 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쏠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가우리 백작께서 오셨구려!"

"늦어서 죄송합니다."

"뭘 그런 말을! 테레스 산맥을 넘어왔을 텐데 얼마나 힘이 드셨겠소? 기일 안에 오셨으니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격세지감이다.

불과 이 년 전 스승님과 제국 전쟁을 치를 때에는 일개 참모로 참전했었는데...

뭐 빠지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중간쯤 되는 좌석이었다. 가장 상석엔 처음 보는 늙은 귀족이 앉아있었고 그 오른편에 여전히 덩치가 산만 한 아슬란 백작이 앉아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던지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 백작이 저기 앉아있다는 건 지휘관 밑으로 모두 백작이라는 뜻, 내가 가장 늦게 왔고 나이도 젊으니 백작 석의 말단이라고 치면 대략 20여 명쯤 되는 귀족들 사이에서 중간 서열이라는 뜻이었다.

"자네가 가우리 백작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식견이 짧아 알아보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괜찮네. 나도 얼굴만 보고는 누군지 몰랐을 테니까.'

중후한 목소리였다. 60 가까이 되어 보이는 늙은 귀족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걸 보니 후작으로 예상됐다.

"그나저나... 보급선을 두 갈래로 요청했다는데."

"맞습니다."

회의 중간에 난입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나야 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늘 떨린다. 그리고 그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첫 무대라면 더욱더.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낯익은 얼굴도 보이고 처음 보는 얼굴도 보인다. 재작년 다나크 제국 전쟁에서 얼굴을 맞댄 사이겠지.

이름은 몰랐다. 사람들을 폭넓게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더욱 그랬다. 마치 학생 시절 옆 반 애들처럼.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 제국 전쟁 당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신뢰의 눈빛을 보낸다는 점 아닐까.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지도 앞에 섰다.

"다나크 제국을 도와 파딘 제국을 밀어낼 생각입니다."

여기까진 모두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의 눈빛이 몇몇 보였지만 무시했다. 내 설명을 듣다 보면 사라질 테니까.

"저희의 최우선 목표는 파딘 제국파의 영토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단 두 문장 만에 알케스 후작의 입이 열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게 퍽 놀란 눈빛이었다.

벌써 놀라면 안 되는데.

"저는 알만 영토를 흡수하고자 합니다."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오자마자 폭탄을 던진 꼴이다. 대부분의 시선에서 불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동맹이었던 알만 왕국을 공격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니.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게."

"알만 왕국은 끝났습니다."

다시 한번 싸늘한 침묵이 맴도는 막사 분위기를 즐기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더이상 희망은 없다. 모든 귀족이 반으로 갈라졌다. 알만을 위한 귀족은 없고 제국을 위한 귀족만이 남았다.

그걸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매국노만 남은 나라는 더이상 나라가 아니다. 맛 좋은 먹잇감일 뿐.

나는 다나크와 파딘의 밥그릇 싸움에 끼어들어 콩고물을 얻을 생각이었다.

"따라서 저희의 최종 목표는 아슬란 영지와 붙은 엑센 후작가입니다."

"거긴 다나크 제국파로 알고 있는데."

"상관없습니다. 다나크 입장에서도 영지 하나 던져주고 저희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이미 헤일리와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사실, 미하일이 생각나 주저하던 나를 재촉한 건 그녀였다. 엑센 미하일. 첫 상행때 만났던 그 친구의 가문이 엑센 후작가였으니까.

부디 그는 만나지 않기를.

헛된 소망을 꿈꾸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막사가 조용한 탓에 주절주절 떠들긴 참 좋았다.

"엑센 후작가를 일시에 밀어내고 남쪽으로 향합니다.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게 설명을 이어가던 도중 한 귀족이 말을 끊었다. 아까부터 내내 불만이 가득해 보이던 표정이었다.

"나는 반대요."

"이유가 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닐 테니 분명 화를 참지 못한 거겠지.

"어떻게 백작까지 올랐나 했더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나 보군. 우리의 동맹이었던 알만 왕국의 영토를 빼앗는다? 나는 그 작전에 동의하지 않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알만을 도와 다나크와 파딘 둘 다 물리쳐야지.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게 정의고 동맹이오. 친구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도와주지는 못 할 망정 오히려 친구 집을 빼앗는다니, 자네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군."

할 말이 없었다.

명명백백 맞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내년부터 식량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뭐?"

반대를 했으면 해결책도 꺼내놔야지.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저희의 힘만으로 다나크와 파딘을 알만 왕국에서 물리칠 힘은 없고... 결국, 알만 왕국을 두 제국이 양분할 겁니다. 과거처럼."

"..."

"그러면 내년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칼을 들이밀었던 양 제국에게 식량을 달라 손을 벌릴 겁니까? 무슨 염치로?"

명분?

중요하다.

대의를 위해?

그 역시 중요하다.

동맹의 의리를 지켜 양 제국을 모두 공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 후는?

현실은 못 보고 이상만 쫓는 사람에게 해줄 말은 없다.

"두 제국을 모두 물리칠 힘이 있으면 따르겠습니다. 혹은! 알만 평야 없이 에어로크가 식량난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따르겠습니다.'

자연히 말이 빨라졌다.

고귀한 귀족?

정의로운 귀족?

누군들 못하나. 누군들 안 하고 싶은가.

작전을 내야 하는 참모가 저딴 말이나 하고 있으면 그 부대는 망한 것과 다름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것이다. 그게 참모로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그쯤하면 알겠지. 난 동의하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남자를 보며 알케스 후작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까와는 다른 감정으로 얼굴이 벌게진 건 확실했다.

여기까지 했으면 될까.

잠시 입을 닫고 주변을 바라봤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 역시 불만의 시선을 거둔 상태였다.

편하게 앉아서 대의명분 따지는 건 누가 못하나.

귀족 아니랄까 봐.

"...그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시선이 나를 따라 지도로 향한다. 내가 가리킨 곳은 지그하르트 영지 남쪽, 아르페온 산맥이었다.

"파딘 제국은 지금 전선이 두 군데입니다. 알만과 헤르트 남부."

병사가 반으로 나뉘었다는 소리다.

그게 자신감인지 자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힘을 모은 파딘 제국이라면 자신감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난, 그걸 자만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지그하르트 후작님을 필두로 한 부대는 산맥을 넘습니다."

이 자리에 후작이 없는 이유다. 아슬란 영지에 모인 10만의 부대, 그리고 지그하르트 영지에 모인 10만의 부대.

이미 수도에서 허락이 떨어진 명령이었기에 이건 확인 절차일 뿐이다.

"보급은 여름 호수를 통해서 합니다. 아르페온 산맥을 넘은 병력은 곧장 호숫가에 있는 칼리를 점령합니다."

여름 호수에 인접한 도시다. 거기를 보급 기지 삼고 호수를 통해 보급을 받으면 굳이 산맥을 넘을 필요도 없었다.

손으로 가리켰던 아르페온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향하는 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선은 다시 동북쪽으로 움직여 알만 왕국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 후로 호수를 따라 곧장 이동합니다. 사막이 많은 파딘 제국 특성상 내륙으로 향하는 건 위험합니다."

이번 전쟁의 최우선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알만 평야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

둘째는 전선을 늘려 파딘 제국의 손발을 어지럽게 하는 것.

첫 번째 잔적을 위해 두 번째 작전을 짰다. 파딘 제국의 뒤통수를 치는 후작 쪽이 재미는 더 있겠지만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였다.

알만 평야를 최대한 확보해야 미래가 밝았다.

하다못해 다나크 제국이라도 알만 평야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게 돕는 게 내 목표였다.

헤일리껀 내꺼니까.

빌려달라고 하면 또 빌려주겠지 뭐. 아직 갚지도 않은 식량의 기한이 일 년밖에 안 남았다는 게 새삼 생각났지만 무시했다.

올해 알만 평야를 정복하고 내년에 여기서 난 식량으로 갚으면 되겠지.

그렇게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데 알케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중요한 게 빠졌다는 듯 살짝 어두운 얼굴이었다.

"...헤르트를 도울 방법은 없는가?"

"..."

다나크와 대치 중이던 주병력이 남부로 이동하는 데만 족히 석 달은 걸리지 않을까. 소식은 전해오지 않았지만 이미 헤르트 남부는 파딘 제국군에게 유린당하는 중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알케스 후작 역시 어두운 얼굴로 물어봤겠지.

그나마 가까이 있던 에르딘이 희망 아닐까.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에르딘 원군이 배를 타고 남부로 상륙하면 시간을 벌 수 있겠다.

물론 대륙 반대편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원군을 보낼 길조차 없는지라... 죄송합니다."

알만 북부는 다나크가 남부는 파딘이 점령한 상태다. 헤르트로 가는 배가 있는 포르투 항구까지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육로로 가려면 어떻게든 갈 수는 있지만...

'반년은 걸리겠지.'

결국, 4국동 맹은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

알만은 갈라졌고, 에어로크는 갈라진 알만을 노리며, 헤르트와 에르딘만이 힘을 합치고 있었다. 허나 그 역시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에르딘 역시 대륙으로의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헤르트를 도울 뿐 순수한 의도로 헤르트를 돕는 게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개인전이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온 대륙이 전쟁에 휘말렸다.

명분보단 실리를, 정의보단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번 전쟁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미하일을 마주치지 않는 거였다.

단 한 번의 만남뿐이었고 깊은 사이도 아니었지만, 나름 뻔뻔하게 친해진 첫 친구였으니까.

그를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작은 고민거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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