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그저 순서가 온 것이다
* * *
"여기만 오면 고향 생각이 납니다."
구름이 산 중턱에 걸렸다. 완연한 봄이건만 테레스 산맥 정상은 여전히 눈이 쌓여있었다. 자연스레 떨어진 기온에 병사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숙영지를 펴고 있었다.
"예전엔 반대로 넘어갔었지."
"맞습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그것도 벌써 이 년 전이다. 예전 생각에 빠진 듯 옅은 미소를 짓던 로그멜 경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분명히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 것이라.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고 말을 이었다.
"그것도 기억나는가? 준 남작과 내가 처음으로..."
"흠흠."
그가 헛기침으로 말을 끊었다. 결국 웃음이 터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박았으니 좋은 추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가 좋았는데."
"..."
"지금처럼 준남작됐다고 거드름도 안 피우고 말이야."
"제가 언제 거드름을..."
"오랜만에..."
"아이고 도련님."
일 년 만에 들은 도련님 소리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괜히 옆에 서 있었다는 듯 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그 역시 따로 갈 곳은 없었다.
후작도 없고 스승님도 없다. 마틴 경은 물론이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사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있으니 나 말곤 대화상대도 없는 것이다.
"율레인과는 좀 괜찮나?"
"이번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려 합니다."
"바로 할 줄 알았더니."
"..."
그런데, 마틴 경의 시선이 이상했다. 연신 발밑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던 그가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뭐 나쁜 말이라도 했나? 의아한 눈빛으로 마주 봤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진짜 머리를 박..."
"다 영주님 때문 아닙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래. 결혼을 장려했으면 했지 영지 내 결혼 금지법 이런 걸 만든 적도 없다.
세상에 무슨 초야권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왜 나 때문이야?
어이없는 시선을 던지니 그제야 그게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율레인이 엘라의 시녀였던 건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왜."
"엘라가 결혼하기 전엔 자기도 못 한다고...! 그래서...!"
그랬구나.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사실은 전혀 몰랐다. 괜스레 미안해져 시선을 돌렸다.
"...웃음 참는 거 다 보입니다."
"크흠..."
"...작년 한가할 때 결혼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애가 안 생겨서. 이번에 생겼으니 돌아가면 결혼할 거네."
내 말에 그가 지었던 표정 중 가장 불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머리를 박게 만들고 싶은, 그런 표정 있지 않나.
"...원래는 그 반대 아닙니까?"
"..."
"누구는 아직도..."
"크흠."
그건 내 잘못 아니다. 연애는 자유롭게 했으면서 섹스는 왜 안 했대.
아니 그것보다, 고작해야 150이 간신히 넘는 율레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게다가 누가 봐도 어린애라 착각할 만큼 동안이었다.
190이 넘는 덩치에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로그멜 경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순박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뒷골목에서 힘깨나 쓸 것처럼 보일 덩치다.
혹시 이 새끼 이거?
자연스레 내 시선에 혐오감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선 소아성애에 대한 처벌이 있을까? 아니 내가 영주인데 만들면 그만이지.
"...자네 혹시 그런 취향인가?"
"...예?"
합체는 되나?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래서 소아성애가 안 된다. 법적으로 로그멜 경의 결혼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 영주님? 제가 그런 놈으로 보이십니까?"
"..."
"저,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먼저 유혹한 것도 율레인이...!"
"고민 좀 해봐야겠네."
사실, 외적으로나 그렇지 율레인도 로그멜도 성인이다. 그저 그 외형이 너무 안 어울려서 그렇지.
반쯤은 장난으로 시작한 건데 그의 반응이 너무 격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영주님? 어디 가십니까. 영주님?"
훠이. 취향 묻을라.
여정은 순조로웠다. 다르게 말하면, 지루했다.
게임처럼 스킵 기능이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두 달 가까이 말을 타고 종일 이동하려니 지루함에 좀이 쑤셨다.
'뭐해?'
'잠시만요.'
역설적으로 헤일리와의 대화는 오히려 늘었다. 함께 영지에서 살 때도 이렇게 자주 대화하진 않았다.
말을 걸었을 때 이렇게 나오는 건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혹은 최면을 걸고 있을 때.
지금은 담담한 목소리였던 걸 보니 최면을 걸고 있나 싶었다. 처음 화장실에서 말을 걸었을 때,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대느라 혼이 났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결국 다시 길을 바라봤다.
내리막길이 시작된 지 나흘째였다. 슬슬 알만 왕국 국경까지 도착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사흘만 더 가면 완전한 평지에 접어들 것이다. 거기서부터 아슬란 영지였다.
루시는 잘 지내나.
검은 머리에 매혹적인 눈빛을 한 그녀가 떠올랐다. 아슬란 백작의 딸이라 했었나. 헤일리의 최면에 걸려 나를 유혹했던 여자다.
사람의 감정이란 신기해서 그녀에 대한 조금의 감정도 없건만 마음이 씁쓸하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여자였으니까. 얼굴을 보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는 체 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까. 두 가지 마음이 양립했다.
그리고 그때,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듯 헤일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왜 불렀어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듣잖아요.'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니, 화가 났다고 해야 할까. 들뜬 목소리 같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요.'
무슨 일 있네.
구슬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천역덕스럽게 연기하는 헤일리에겐 쥐약 같은 단점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없어요.'
아무래도 말 안 해줄 요량인 듯했다.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입을 열게 만들었을 텐데, 말로만 대화한 다는 건 이게 아쉬웠다.
'밥은 먹었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연인과 통화를 하듯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나야 현대에서 단련된 습관이니 자연스러웠지만, 헤일리는 내 모습을 보고 꽤 놀랐었다.
박기만 잘 하는 게 아니었네요. 라고 했던가. 어쨌든 잘한다는 칭찬이었으니 넘어갔었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이곳으로 온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에어로크에서 단신으로 말을 타고 부대에 접근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게다가 여긴 좁은 산길이었다.
그렇게 방향을 틀어 부대에 접근한 말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 왼쪽 눈 밑에 찍힌 눈물점.
말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은,
"루시?"
"...오랜만이네요."
뜻밖의 만남에 구슬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혹여나 헤일리가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싶었다.
"여기까지 왜?"
"소식을 전달하러 왔어요. 방향을 틀어 오른쪽 길로 가야 해요."
"그걸 네가 직접 왔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추궁이었을까. 할 말이 궁해 보여 적당히 넘어가려는데 루시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 충격이었다.
"알만 왕국이 반 토막 났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파딘 제국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알만 왕국 남부 국경지대가 바로 열렸어요. 남하하던 다나크 제국도 다시 뒤로 물러났어요."
"...다나크 제국파는?"
전쟁 시작과 동시에 나라 하나가 결딴날 수도 있구나. 이미 대답을 알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역시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나크 제국파 역시 다나크 제국에 붙었어요. 알만 왕국은 지금 남과 북으로 갈라진... 상태에요."
수도에 남은 알만의 국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텅텅 비어버린 대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태생부터 잘못됐다. 양 제국에 의해 생긴 괴뢰국은 그 기반부터 약할 수밖에 없다. 왕에 대한 충성심이나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있을 리가 없다.
"바로 알만 왕국을 도우러 가야 해요. 오른쪽 길로 꺾어서 아슬란 영지를 돌아 알만 국경을 바로 넘으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아니야. 도울 필요 없어."
"...네?"
누굴 도울 건데. 귀족들도 모두 도망친 껍데기만 남은 알만?
도울 사람이 있어야 돕지. 귀족들마저 몸을 돌린 왕국을 지켜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나 다름없다.
그저 순서가 온 것이다.
괴뢰국이었던 알만이 다시 양 제국으로 흡수될 때가.
그리고 우리는 이때를 노려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어야 한다.
"다나크 제국을 도와 파딘을 공격해야 한다고 전해."
"...어떻게 믿고요?"
"그딴소리 하는 사람들 있으면 내년부터 식량난은 어떻게 해결할 건지 그거나 말하라 해."
다나크 제국이 밀리고 혹여나 파딘 제국이 알만 왕국을 모조리 꿀꺽한다면?
에어로크와 다나크는 끝이다. 먹어야 창을 들고 화살을 쏜다.
모두 다 기형적인 지리 때문이다. 알만이라는 한 나라에 세 나라가 식량을 의존하는 형태. 처음부터 분란이 안 생길 수 없는 지리였다.
산을 내려가는 부대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한 명의 여인만 추가됐을 뿐.
나는 구슬을 다시 손에 쥐었다.
헤일리와 협상을 할 때다.
"허억...! 허억..."
빼빼 마른 손이 거칠게 나무를 붙잡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죽을 힘을 다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달간 감옥에 갇혀 있던 탓에 굳은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헤일리...! 헤일리!!"
그녀를 증오했다. 그러나 복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차마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 도망쳤다.
붉은 눈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갔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녀가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였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어떻게 최면이 깨졌는지는 모르겠다. 허나, 도망칠 유일한 기회였다. 야음을 틈타 저택의 담벼락을 넘었다.
달마저 모습을 감춘 삭월의 깊은 숲 속을 걸었다. 헤진 옷은 거친 나뭇가지를 막아주지 못했다. 여기저기 긁힌 탓에 핏물이 밴 모습은 미치광이 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만 더 가면 알만 왕국의 국경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추격이 끊기겠지. 설마 국경을 넘어 자신을 추격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이었지만, 그 희망 하나도 다시 발을 들었다.
정말로 국경을 넘어 쫓아오면, 드넓은 평야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알만 왕국의 서쪽.
에어로크 왕국과 인접한 곳에 자신의 영지가 있다. 거기까지만 가면, 영지에 도착만 하면 안전하다.
"허억... 허억..."
작년 초 저택을 떠났던 그녀가 무려 일 년 만에 돌아왔다. 카인을 만나러 간다 했었나. 저릿한 죄책감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든 정보를 건네준 건 자신이었으니까.
아니다. 어쩔 수 없었다. 최면에 걸려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자신처럼 최면에 걸려 정보를 토해냈을 것이다. 무려 일 년 동안.
왜 저택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는 의아했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최면을 피할 방법은 없으니까.
이제는 장발이 되어버린 헝클어진 금발이 눈 앞을 가렸다. 언제 머리를 다듬었었나. 모르겠다. 저택에 들어간 이후 그런 건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다나크 제국과 알만 왕국 사이의 작은 숲에서 어둠을 몸을 숨긴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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