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아무래도
* * *
"파딘 제국이 움직였습니다."
사실 조금 기뻤다고 하면 이기적일까. 다나크도, 알만도, 파딘도 공격할 수 없는 이 소요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몰랐기에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레 시작된 파딘 제국의 움직임은 내심 반가웠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전쟁이 반갑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허나 어떡하겠는가. 그러라고 이 세계에 불려온 것을.
"대전으로 가죠."
모든 가신을 호출했다. 다급히 돌아가는 마틴 경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방안을 바라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인테리어와 그 안에 있는 여인들. 시아라, 엘라 그리고 헤일리까지.
침대에 누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아라를 꽉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이 파고든다. 이제는 엄마가 된 여인의 품이다.
"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아직 급하지 않다. 아니, 급하다고 해야 할까.
알만 왕국에서 에어로크 왕국, 그리고 내가 사는 이곳까지 전령이 도착한 시간을 생각하면 최소 한 달 전 소식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안에 떠는 시아라를 달랠 시간은 충분한 것이다.
"헤일리. 가자."
파딘 제국이 어디로 군사를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 방향이 알만 왕국이라면 다나크도, 식량을 원조받는 에어로크도 남의 일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이 된 그녀와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부디, 이미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알만 왕국과 헤르트 왕국을 향해 동시에 움직이는 중입니다."
축 처진 붉은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완전히 색이 바래지 않은 것만으로 전령이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짐작이 갔다. 사람의 발로는 두 달이 걸리는 기간이니 한 달 가까이 전령의 등에 매달려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예. 헤르트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헤르트의 주병력은 모두 북부에 있으니까.
"에어로크는?"
"국경까지 부대가 접근하긴 했습니다만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아는 정보는 삼 주 전을 기준으로 합니다."
그 말은 수도에서 삼 주 만에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소리다. 경이로운 주파 속도였다.
"수도에서는 뭐라 하던가."
에어로크가 취할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방관이다. 다나크로서는 평야를 지키기 위해 당연히 알만을 도와야 한다. 그러니 다나크에게 맡기고 에어로크는 가만히 힘을 기른다. 이건 명백한 하책이었다.
두 번째는 참전이다. 알만을 도와 파딘 제국을 막아선다. 파딘 제국에게 알만이 흡수되면 또다시 식량난에 빠질 건 자명했다. 이건 중책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동맹인 알만 왕국으로 원군을 보낼 생각입니다. 소집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전령이 품에서 작은 편지를 하나 꺼냈다. 녹색 바탕에 금색 수실로 꾸며진 편지. 에어로크 왕가에서 직접 보낸 편지다.
과연 그렇구나.
내심 아쉬움에 속으로 혀를 찼다.
나도 안다. 쓰레기 같은 생각인걸. 허나 알만은 저번 제국 전쟁 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식량만 원조했을 뿐.
양 제국파로 갈려 눈치나 보기 때문이라.
이번 전쟁 역시 알만은 분열될 게 눈에 뻔했다.
혹시 어쩌면...
"오월 마지막 날까지 아슬란 영지로 집합하시면 됩니다. 특히 가우리 백작님은 꼭 참전을 부탁한다고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재촉 안 해도 간다. 그 누구보다 전쟁을 기다렸으니까.
5월 말이면 앞으로 두 달 조금 넘게 남았다. 알만 왕국의 국경 지대인 아슬란 영지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잠시 편지 봉투를 바라보다가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헤르트는?"
"따로 제게 내려온 말은 없었습니다."
헤르트로 향하는 원군은 없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에르딘이 있으니 둘이 잘 막겠지. 게다가 에르딘은 어떻게든 대륙으로 힘을 넓히기 위해 노력 중이지 않은가. 다나크 제국을 공격했을 때와 똑같다.
에어로크는 서쪽을 막고, 헤르트와 에르딘은 동쪽을 막고.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을 뿐이다.
뭐, 전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냐마는.
불리하면 성에 박히고 유리하면 한 걸음 더 가보고 그런 거 아니겠는가.
실제로 다나크와의 전쟁 때 쌍둥이 성을 두고 공성과 수성을 다 겪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간단하다.
"수도로 돌아가 병참선을 두 갈래 길로 준비하라 전하게."
"예?"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전선을 넓히면 넓힐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서쪽에서 에어로크, 중앙에서 알만과 다나크, 동쪽에서 헤르트와 에르딘.
차라리 파딘은 헤르트 남부 지역만 공격했어야 했다. 그러면 최소 다나크 제국은 참전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언제 등을 때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왕국들 역시 파딘에 집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감, 혹은 자만.
뭐가 됐든 좋은 기회였다. 지겨웠던 1년간의 휴가가 끝났다.
'사실 가장 상책은...'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라 입안에서 맴돈다. 효율을 떠나 비난받기 충분한 작전이었으니까.
모든 소식을 전한 전령이 다시 성을 박차고 나갔다. 조용했던 성이 전령 하나로 시끄러워졌다. 눈이 녹으며 차츰 대지가 녹색으로 물들어 가는 이 날, 거리마다 벽보가 붙었다.
"구슬로 언제든지 연락해."
"알겠어요."
갑작스러운 만남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마차에 탄 헤일리를 꽉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선 보내고 싶지 않았다.
황제까지 최면에 걸렸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사실상 다나크 제국의 실세.
비록 내 손에 잡혀 머리보다 하체를 더 많이 사용했었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나를 뛰어넘는다.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알만으로 부대를 보낼 거에요."
"너는?"
"저는 안 가요."
"그래. 위험하니까 수도에 남아있어."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없어도 황제가 알아서 알만을 도우러 갈 것이다. 그러나 나도 없는 이 영지에서 가만히 있기엔, 그녀가 가진 두뇌가 아까웠다.
그러니 보냈다.
시아라나 엘라처럼 안전한 영지에 가만히 두고 싶었지만, 보냈다.
마지막 포옹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파딘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야만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올해 겨울일 수도 있고, 내년일 수도, 혹은 내가 죽는다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
'들려?'
'...들려요.'
담담한 척하더니 헤어지고 나서 울음을 터트렸을까. 육성이 아닌데도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서서히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내부에서 그녀가 고개를 숙인 게 보였다.
'전쟁이 끝나면 놀러 갈게.'
'...정말이죠?'
'정말.'
시아라나 엘라와도 못 본다는 게 그녀에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될까. 잘 모르겠다.
한 명이 불행 하느니 세 명 모두 불행한 게 나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작은 구릉을 넘어간 마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성벽 위로 도열한 병사들. 활짝 열린 성문. 그 안으로 보이는 분주한 움직임.
창고가 열렸다. 지난 일 년 동안 모으고 모았던 식량, 화살, 조잡한 창, 가벼운 가죽 갑옷.
전 대륙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침내 모든 국가가 참전한 대전쟁의 서막이다.
벌써 세 번째 전쟁이다. 헤르트, 다나크에 이어 파딘까지.
만약 현대로 돌아가도 앞으로 전략 게임은 못 즐기겠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시시해서 재미가 있겠는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지면 안 되는 일 아닐까. 벌써 세 번째 인사인데도 여전히 시아라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안 죽을 거 알잖아."
흰소리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별 효과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내 말이 불안했는지 엘라 마저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는 두 여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끌어안았다.
두 여인의 얇은 허리가 팔에 들어온다.
"아빠 다녀올게."
어쩌다 보니 미혼모를 둘이나 만들었다. 맘 같아선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전쟁터로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니까 대신 이거라도.
허리를 끌어안던 손을 풀고 품속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혹시나 못 주고 가나 했는데, 정말 다행히 가기 전에 주고 갈 수 있게 됐다.
보통의 반지 상자보다 조금 더 기다란 상자다.
고급스러운 붉은 천으로 장식된 상자를 열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반지 세 개가 들어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 시아라의 왼손을 잡았다.
삼 년 전 내가 끼워줬던 은반지가 보인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해줘도 변색은 어쩔 수 없음이라.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그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반지에 눌린 자국이 붉게 남아있다.
"내가 돌아오면... 그때 결혼하자."
그렇게 시아라에게, 그리고 엘라에게도 반지를 끼워줬다. 남은 반지 하나는 주인이 따로 있다. 저 멀리 다나크에.
"헤일리만 아이가 안 생겼네."
"..."
"헤일리가 질투하겠다. 그치?"
아까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두 여인 모두 반지를 끼워주기 무섭게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으니까.
붉게 물든 두 여자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은 이미 그른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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