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5화 (175/191)

〈 175화 〉 휴식 끝

* * *

떼어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듣게 된 스승님과 슈티엔 후작의 질긴 인연이나, 우연히 다시 만난 나와 샬롯의 관계가 그런 게 아닐까.

결코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하게 일어나는 삶이기에 인연이라는 단어가 생기지 않았을까.

온 세상이 햐얗다. 장장 두 달이 넘도록 떨어지는 눈은, 여름의 그 장마와 결이 비슷했다.

이 영지는 물의 신이 축복이라도 내렸을까. 여름엔 한 달 내내 끊이지 않는 장마가 오고 겨울엔 하늘이 뚫린 듯 눈이 내렸다.

가만히 눈을 보고 있자면 지그하르트 영지가 생각난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이곳에서 순수한 타의로 제2의 고향이 됐다. 이제는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눈은 정말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나와 눈은 운명이지 않을까.

산을 뛰쳐나왔더니 북쪽이라 눈이 많이 내린다. 파딘 제국과 전쟁을 했다면 눈과는 인연이 없었을까.

저 질긴 눈이 모두 내리면 백작이 된 지 일 년이 된다.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몰아치던 사건 속에서 유일하게 휴식을 가진 1년이었다.

물론, 영지를 다스리는 일이 쉬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전쟁통 한가운데에서 매일 같이 시체 썩은 내를 맡던 날보단 마음이 편했다.

저 눈이 내리면 다시 움직이겠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에어로크 때문에 난감해진 헤르트와 에르딘도 저 눈이 내리면 결단을 지어야 할 것이다.

기세를 몰아 다나크와 다시 전쟁을 치르던지, 아니면 휴전을 유지한 채 조금 더 휴식을 가질지.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노인네가 겨울에 기침하는 게 어때서 그러느냐."

두툼한 담요를 덮고 벽난로 앞에서 흐릿한 시선을 던지던 스승님이 나를 바라봤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숫자에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륙을 통일하면 시간을 돌려달라고 할까.

아니면 죽은 사람을 다시 소생시켜달라는 소원은?

주신이 된 그 남자가 불가능한 게 있겠는가. 그저 법칙에 위배된다는 헛소리나 하겠지.

"...제자야."

"예."

거친 목소리였다. 잠시 나를 보던 시선이 다시 벽난로를 향했다. 한때 제국을 두렵게 만든 헤르트의 영웅은 슈티엔이라는 운명의 상대를 잃고 난 후 급속도로 늙기 시작했다.

바람 빠진 풍선을 보는 듯했다. 하루가 다르게 주름이 늘어가며 말라갔다.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였을까. 얼마 전부터 눈이 침침한 듯 인상을 찌푸릴 때면 가슴이 아파왔다.

시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의 문제였다.

"제국을 믿느냐?"

한참 만에 나온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제국이라. 어떤 제국을 말할까. 주어가 명확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

스승님이 살던 시대와 내가 살던 시대는 다르다. 헤르트가 몰락하던 시대는 슈티엔 후작의 사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의 헤르트는 에르딘과 연합해 다나크 제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물론, 지금의 다나크는 헤일리의 손에 있고.

사람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

스승님이 겪은 제국과 내가 겪은 제국은 다르다.

그러니, 나는 믿었다. 헤일리를 믿었고, 다나크 제국을 믿었다.

"...내겐 꿈이 있었다."

타닥거리는 벽난로가 작은 소음을 만든다. 보기만 해도 나른한 그 백색소음은, 가만히 사색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과연,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인지 스승님의 시선이 아득히 먼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헤르트는 제국이라 불렸다. 그리고 제국이 왕국이 된 건, 불과 오 년이 걸리지 않았지."

다나크와 파딘이 협약을 맺었다. 괴뢰국으로 만든 알만 왕국의 대전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협약을 맺었다.

에르딘은 바다 건너 소식에 무관심했다. 극도로 폐쇄적이던 에어로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두 제국과 한 왕국은 헤르트를 치는데 동의했다.

"처음엔 죽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참모로 지원을 했지. 그나마 머리가 좋아 시험에서 통과된 게 운이 좋았다."

몰랐던 과거다.

그리고 나와 정말로 비슷한 과거였다. 난 여전히 창과 칼이 무서웠다.

"그렇게 처음 투입된 전쟁터가 북부였다. 거기서 무려 삼십 년을 보냈지."

겁이 많던 젊은 참모가 헤르트의 방패가 됐다. 무려 30년이 넘게 깨지지 않고.

하지만, 모든 것은 유한하다. 아무리 단단한 강철이라 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풍화되고 녹이 스는 건 자연의 법칙이다.

하물며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의 몸이란.

"제자야."

"예."

모닥불을 바라보던 스승님이 나를 쳐다봤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두 눈이 보인다. 그 속에 든 작은 열망이 보였다. 시간이 흘러도 방패는 방패일까. 여전히 눈 속에 빛이 있었다.

"제국을 조심해라."

"..."

쉽사리 알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다. 그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면 이대로 이 대화는 끝이라는 걸. 하지만,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헤일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파딘 제국이라면 몰라도, 다나크 제국은 믿을 수 있었다. 이번 겨울도, 그리고 내년 봄에도 주민들은 헤일리가 지원해준 식량으로 보릿고개를 넘길 것이다.

"스승님."

"그래."

"제가 다나크 제국을 공격한 건, 그리고 사국 동맹을 만들어 낸 건, 다나크 제국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에어로크와 알만, 그리고 헤르트까지 합쳐도 다나크 제국보다 영토가 적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먼저 다나크 제국을 공격한 이유는, 그저 왕국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쉬웠기 때문이다.

다나크 제국만을 위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다나크에 이어 파딘, 알만, 에르딘... 그리고 언젠가는 스승님의 왕국인 헤르트까지.

모두 다 내 발아래 무릎 꿇게 만들 생각이었다.

"통일 제국을 만들 겁니다."

눈가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놀람? 뿌듯함? 어쩌면 배신감을 느끼고 계시지 않을까.

"저는 다나크 제국이 목표가 아닙니다."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 그러니 그 발걸음이 잘못 됐다면, 혹은 원하는 걸 얻었다면 언제든지 방향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승님.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국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고, 옆나라 알만 왕국을 쳐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 저는 스승님의 바람대로 다나크 제국만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기준에 따르면, 다나크 제국은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인 헤일리가 내 손 안에 들어왔으니까.

"...어쩌면 내 집착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는 시대가 달랐다. 그리고, 겪은 경험이 달랐다. 스승님이 품고 있는 제국에 대한 증오는 내 상상 이상으로 클 것이 분명했다.

죄송하게도, 스승님은 제자의 반발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조금씩 사그라드는 옛 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적어도, 파딘 제국은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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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속이 불편했다. 꽃이 피는 따듯한 봄 햇살을 맞으며 시아라가 가만히 배를 내려다봤다.

기분도 묘했다. 갑자기 슬프다가, 어쩔 땐 흥이 돋아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속이 불편한 상태로 카인의 시중을 들었다.

혹시 큰 병에 든 건 아닐까. 시아라의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차라리 몸을 배배 꼴 정도로 고통이 찾아왔다면, 카인에게 말이라도 꺼내 볼 텐데, 호들갑을 떨기엔 시아라의 담이 그리 크지 못했다.

별일 아니겠지. 애써 마음을 다잡은 시아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카인이 운동을 하고 돌아올 시간이다.

늦잠을 자는 헤일리 언니를 깨우고 요리를 가지러 간 엘라 언니 대신 상을 차릴 시간이다.

카인이 돌아오고, 엘라 언니가 아침을 가지고 돌아왔다. 타이밍 맞게 헤일리 언니 역시 예민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유독 아침이 약한 둘째 언니였다. 아침을 거르다 카인에게 몇 번 혼이 난 헤일리 언니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아침 식사 전엔 꼭 일어났다.

그렇게 넷이 모여 아침을 먹기 시작할 때, 시아라가 다급히 입을 가렸다. 갑자기 치고 올라온 역한 느낌에 헛구역질이 치민 것이다.

"...시아라?"

"무슨 일이야?"

"미안해. 별 일 아니... 우욱!"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창피함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헛구역질할 줄은 몰랐다. 며칠 내내 속이 불편하더니 기어코 말썽이었다.

화장실로 뛰어가 참았던 헛구역질을 연신 내뱉었다. 나오는 것도 없이 속이 뒤집어지니 압박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다섯 번을 연달아 했을까. 간신히 구역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아라는 쉽게 화장실을 떠나지 못했다. 입맛이 없는 건 차지하고라도 음식 앞에 서면 또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카인?"

한참이 지나고 뒤를 돌았던 시아라는 문 앞에 서있는 카인을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쩌다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는데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기쁜 목소리라고 할까.

아무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인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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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입니다."

아침부터 내성으로 끌려온 신관에게 나온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을 먹은 것에 비해 너무나 느린 결과물이었다.

재작년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뒤 시아라와 엘라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건 내게서 증명을 얻기 위한 헤일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소식조차 없었기에 이 몸뚱아리는 씨 없는 수박이 아니냐는 고찰까지 했었다.

훌륭한 도구에 비해 속이 빈 수박이라니. 이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인가.

시아라나 엘라, 혹은 헤일리 셋 중 한 명과 이루어졌다면, 상대방의 상태도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세 명의 여인이 있었고, 세 명 모두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마음을 놨었다.

언젠가는 생기겠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세 여인 모두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세 여인이 낳은 아이가 보고 싶긴 했지만, 책임감은 두려웠다. 훗날 현대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때 족쇄가 될 것 같았다.

매일 매일 두려움을 안고 질내사정을 했다.

이 얼마나 모순이란 말인가.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현대와는 한층 더 멀어졌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까.

말없이 시아라를 껴안았다. 덜덜 떨리던 몸이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림은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기쁨이었을까.

"첫 번째 아니랄까 봐 가장 먼저 임신한 거야?"

헤일리가 가장 먼저 임신을 했다면 머리가 아플 뻔했다. 그로 인해 느꼈을 시아라와 엘라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겠지.

"...흑."

참 오래 걸렸다. 시아라와 처음 만난 게 18살 때였으니 무려 5년 만에 임신이었다.

현대였다면 수박에 씨앗이 얼마나 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했겠는데...

엘라 역시 기쁜 표정으로 시아라를 껴안았다. 하지만 내 눈엔 그 속에 들은 슬픔이 보였다. 깊은 슬픔이.

"전 정말로 카인에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어요."

다행이라는 듯 헤일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 여인과 함께 지내는 걸 알기에 보통은 직접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없었다.

괜스레 불안감이 든다. 심심하다 못해 나태에 빠져 살던 지난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마치 누군가가 휴식 끝. 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시아라의 임신 소식에 이어 방문을 두들긴 소식이 뭘까. 지난 일 년간 쌓인 메일이 한 번에 몰아치며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주님. 수도에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마틴 경의 목소리였다. 서둘러 문을 열자 다급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의아한 표정을 보내는 그때,

"붉은 깃발이 왔습니다."

"...뭐라고요?"

"파딘 제국이 움직였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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