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하이에나
* * *
네 명이나 모여앉아 있건만 방은 조용했다. 홍차 향으로 가득한 방에서 네 사람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그때, 찻잔을 내려놓은 누군가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헤일리. 할 말이 있어."
세 쌍의 시선이 몰려왔다. 사랑하는 연인들이건만 눈빛이 싸늘했다. 가슴이 아프지만 어떡하겠는가. 내 업보인걸.
"식량 좀 빌려줘."
"...뭐라고요?"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헤일리가 반문했다. 왜 그래 우리 사이에.
"동맹의 증거로 지원 좀 보내줘."
"에어로크 왕국에서 보류한 거 아시잖아요."
"이미 동맹이나 마찬가지인 것도 알잖아."
"..."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실세인 헤일리와 제국과 제국 전쟁으로 명예가 높아진 나.
적어도 둘 중 한 명이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알겠어요."
"고마워. 수도엔 내가 얘기할게."
타국, 그것도 작년까지 전쟁을 벌였던 적국에게 식량 원조를 받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만한 소식이다.
그래서 수도로 공문을 보낼 생각이었다. 동맹의 증거로 식량 원조가 왔는데 받아도 되냐고.물론 이곳으로 식량 원조를 보낼 상황이 못 되는 수도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터였다.
"어떻게 갚으실 생각인가요?"
"내 사랑으로?"
찻잔을 들던 헤일리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던진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썰렁할 줄은 몰랐다.
스크래치가 난 상처를 쓰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생각 안 해봤어."
"그건 좀 무책임한데요."
"이 년 안으로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무조건 치를게."
아무리 연인이라지만 거래는 똑바로 해야 한다. 그녀도 나도 약속을 깰 만큼 낮은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뭐... 정 안 되면 제국 가서 네 일 좀 돕지 뭐."
"...정말이죠?"
돈으로 못 갚으면 몸으로 때운다는 뜻으로 대충 던진 말인데 헤일리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뭔가 말 실수 한 거 같은데.
"그냥 해본..."
"남자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기에요?"
"..."
이 년 안으로 갚기만 하면 된다. 설마 그때까지 못 갚겠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후후."
벌써 그때가 기대된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헤일리의 시선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무조건 갚자.
무조건.
"그리고 줄 게 있어."
"줄 거요?"
대답 대신 보여주는 게 빠를 것 같아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렇게 잠시 속을 뒤지던 내 손에서 나온 건 작은 구슬이었다.
그녀를 닮은 붉은 구슬.
"이게 뭐에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헤일리가 받아들었다. 아기 주먹만 할까. 작은 구슬이 그녀의 손바닥 위를 도르르 굴러다닌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전화기? 무전기?
둘 다 한 번 더 설명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이내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못 갚을 정도로 많이 보내야지. 후후...'
"뭐라고?"
"뭐가요?"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 나갔다. 깜짝 놀란 표정을 본 헤일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야."
"그래서 이 구슬이 뭔가요?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이 년 후에 제국으로 오면... 절대 안 보낼 거야. 그땐 날 믿고 최면에 걸리겠지.'
"..."
겉과 속이 다른 이 여자를 봐라.
능력치 99의 위엄일까. 겉으론 전혀 다른 말을 하면서 속으론 그렇게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구슬은 말이야..."
잠시 능력을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말을 돌렸다. 어쩌면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었으니까.
"아, 그전에 헤일리 언제 돌아간다고 했지?"
"갑자기요? 음... 사흘 남았네요."
헤일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잔뜩 서운한 마음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보내고 싶은 걸까?'
'서운한 태도 좀 보여주지...'
'식량도 보내준다고 했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그러고 보니까... 다음에 만날 때까지... 섹스 못 해?'
아이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듣다간 그녀에게 칼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금 늦었을 수도 있고.
"이건 대화하는 능력이 있어."
"대화요?"
'...이렇게.'
"꺄악!"
깜짝 놀란 그녀가 구슬을 놓치는 바람에 연결이 끊겼다. 그러나, 그녀도 나도 구슬을 줍기 위해 몸을 굽히지 못했다.
엘라와 시아라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사색이 된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있던 헤일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들렸나요?"
"...응."
쉬붙이 소리가 사라진 대륙은 평화로웠다.
짓밟혔던 농경지엔 다양한 곡물들이 토실토실 살을 찌웠고 사람들은 칼 대신 낫을 들고 농사를 지었다.
다나크와 에어로크, 다나크와 헤르트아르딘.
사람들은 언제고 다시 전쟁이 터질 것이라 예상했다. 자존심이 뭉개진 제국과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왕국. 이건 서로에게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 여겼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서막은 전혀 다른 곳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사막을 타고 흐르는 모래 폭풍이 북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장장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을 자던 남쪽의 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준비는."
나른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린다.
반쯤 누워 아름다운 여인들이 건네주는 과일을 먹는, 어찌 보면 이곳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태도였다.
"순조롭게 진행 중 입니다. 전 영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늙은 신하의 대답에 과일을 먹던 사내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땅만큼 귀족들을 움직이기 쉬운 게 없어. 안 그렇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귀족임에도 사내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표정이 굳든 말든, 크게 신경 쓸 바 아니다. 어차피 저들은 입으로만 떠들 줄 아니까.
"전쟁에 참여하는 건 자유다. 지금 영지에 만족하는 놈들은 영지에 박혀있어도 괜찮다."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였다.
반쯤 누운 황제는 시녀가 넣어주는 과일을 씹으며 대전을 바라봤다.
십 년 만에 열린 전체회의다. 파딘 제국 말단에 사는 남작까지 모두 모인 대전은 수백에 달하는 귀족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허나 전쟁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그 어떤 과실도 탐하지 마라."
여우 같은 놈들이다.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다 승기가 보이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참전할 게 뻔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얌체 같은 놈들은 애초에 차단할 생각이었다.
"내년 다나크와 왕국 연합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
때를 기다렸다.
다나크 제국이 약해질 때까지. 그리고 호랑이를 물어뜯은 하이에나가 지칠 때까지.
"그때 일거에 대륙을 정복한다."
알만과 헤르트를 넘어 다나크까지.
바다 건너 에르딘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온 대륙을 먹고 나면 알아서 복속할 놈들이다.
"공작에겐 한 나라를, 후작에겐 한 지역을, 백작에겐 큰 도시를 주겠다."
대전의 공기가 변하는 걸 느끼며 황제가 씨익 웃었다. 역시, 이들을 움직이는 건 돈, 그리고 땅 밖에 없다.
"삼십 이상의 마법병단. 이번 전쟁의 참가 조건이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대전이 이어진 황제의 말에 순식간에 식었다. 흥분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귀족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황제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노예들에게 창이나 대충 쥐여주고 끌고 올 생각이었겠지.
머릿수만 채운 부대는 의미 없다. 파딘 제국의 진정한 힘은 마법병단에서 나오니까.
"데리고 온 마법병단 수에 따라 좋은 전장에 배속된다."
영지마다 꼭꼭 숨겨놓은 마법병단. 그게 필요했다.
만약 모든 귀족들이 자신들의 마법병단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선다면, 황제는 반년 안으로 전 대륙을 통일할 자신이 있었다.
"큰 기회엔 큰 희생이 따르지."
어리저리 돌아가는 시선이 보인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귀족을 움직이는 건 돈과 땅이다.
무릎을 베고 누워 시녀의 다리를 희롱하던 황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할 말은 끝났다. 이제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든, 지지고 볶든 황제는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테니.
"너. 따라와라."
"...예."
방금까지 무릎을 베고 있던 시녀를 지목한 황제는 다시 몸을 돌려 대전을 나섰다.
문밖을 나서자마자 후끈한 열이 확 들이친다. 바위도 녹일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운 날씨였다.
뒤에 서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그늘을 만들었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사막의 나라. 고원의 나라. 겨울이 없는 나라.
대전과 그 밖의 건물은 냉기 마법이 상시 유지됐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는 불가능했다.
"알만이라..."
그리고 다나크라.
새로운 수도는 알만에 지를 생각이었다.
여름에 포근하고 겨울엔 서늘하다 했다. 사계절이 있다 했다.
저주받은 이 지역을 벗어나 통일 제국을 세우리라.
등줄기를 훑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황제가 발걸음을 옮겼다.
"...카인이라 했나?"
걸음을 옮기던 황제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까먹고 전달하지 않는 명령이 하나 생각났다.
뒤에서 따라오던 관리 중 하나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에어로크 왕국의 전쟁 영웅이라 합니다."
"그놈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도록."
"알겠습니다."
과거 최초로 대륙을 통일했던 에어로크 제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왕국으로 몰락해 서쪽 끝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연인, 가족, 개인사 뭐든지 좋으니 다 조사해라. 약점을 잡을 수 있는 부분은 모조리."
"알겠습니다."
이곳 파딘 제국까지 소문이 날아온다는 건 평범한 하이에나가 아니라는 소리다.
새로운 호랑이가 되기 전에 잡아 죽이는 게 현명했다.
"에어로크라..."
몰락한 왕국이다.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적고 살기 척박한 곳이다.
자신의 손으로 과거 통일 제국의 끝을 내리라.
그리고... 새로운 통일 제국을 세우리라.
자신에게 지목당했던 시녀를 잡아 끌어 허리를 감쌌다. 은은한 열망이 보이는 시녀의 눈을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운이 좋으면 통일 제국의 황태후가 되리라.
없으면 자식과 함께 죽겠고.
잠시 후, 방 안에서 여인의 열락어린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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