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2화 (172/191)

〈 172화 〉 두 가지 소식

* * *

6월에 들어서며 본격적인 농번기에 들어섰지만, 영지는 조용했다.

사람이 밥을 먹듯 곡식은 물을 마신다.

뷔른 영지에서 수월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은 동남쪽 겨울 호수와 인접한 부분이 유일했다.

"...배고파 죽겠구먼."

초록빛을 틔운 넓은 논밭을 보며 한 농부가 작게 읊조렸다. 농경지마다 빽빽하게 들어찬 곡식을 보며 절로 배가 부를 만도 하건만, 농부의 얼굴을 펴질 줄을 몰랐다.

작년 전쟁의 여파로 뷔른 영지부터 쌍둥이 성 사이의 모든 농경지가 말발굽에 짓밟혔다.

농사는 풍년이었지만, 지금 당장 먹을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논밭을 바라보는 모든 농부의 공통점이었다.

밭둑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죽이는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길을 따라 걸어왔다. 낚시를 하러 갔던 이웃 농부였다.

"수확 좀 있던가?"

"있기는... 오늘은 공쳤네."

돌아온 대답은 어두웠다. 손에 들린 바가지가 가볍게 춤을 출 때부터 예상했던 대답에 농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일은 낚시나 가봐야겠네."

이미 두 아들은 매일같이 호수로 출석했다. 두 사람보단 셋이 낫겠지. 낚싯대나 하나 더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농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낚시를 공치면, 그날은 굶는다.

한 마리를 잡으면 곱게 다져 스프에 넣어 먹고, 두 마리를 잡으면 스튜로 끓여 먹었다.

세 마리를 잡은 날은 내일을 위해 남겨놨다.

소금이라도 많으면 보관이라도 용이할 텐데, 바다를 보려면 한 달은 족히 걸어야 하는 이곳에서 소금으로 자반을 만드는 건 지나친 사치였다.

그러니 하루 잡아 하루 먹는 삶이었다.

그래도 일손이 많은 자신의 사정은 양호한 편이었다.

남자가 없거나, 노인만 있는 집들은 이리저리 동냥을 다녔다. 소일거리를 대신해주거나, 그것도 없으면 몸을 팔았다.

적당한 나뭇가지를 들어 잔가지를 쳤다. 낚싯대를 만들 땐 버드나무가 가장 좋았다. 칭칭 늘어져 여간해선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대신 손질이 몇 배는 어려웠다. 그늘에 앉아 이리저리 손을 놀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벌써 왔어?"

두 아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은 지나야 한다. 이렇게 빨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벌써 한가득 잡아 왔거나, 아니면 아까 그 이웃처럼 공쳤거나.

그러나 공쳤다기엔 표정이 너무 밝았다.

"입질 좀 있었나 본데?"

"그게 아니에요 아버지!"

큰놈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놈도 이제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올해 수확량의 얼마를 팔아야 말을 한 마리 살 수 있을지 머리를 두드렸다.

장가를 갈 때 신부 측에 예물로 말 한 마리를 주는 건 다나크 제국의 풍습이었다. 어디 도시는 그런 게 다 사라졌다는데, 서쪽 끝 뷔른 영지는 여전히 남아있는 문화였다.

"상행이 돌아왔어요!"

"응?"

손이 뚝 멈췄다. 눈이 휘둥그레진 농부가 벌떡 일어섰다.

"그게 참말이냐?"

"아이 그렇다니까요!"

몇 시간 동안 정성 들여 만들던 낚싯대를 내팽겨쳤다. 지금은 저딴 걸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세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향했다. 왔다. 드디어 왔다. 눈이 녹자마자 떠났던 상행이 드디어 돌아왔다.

벌써 한 달 넘게 물고기만 퍼먹어 입에서 비린내가 날 지경이었다. 자연스레 농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과연, 마을 입구부터 주민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보!"

"뭐래? 얼마나 준대?"

마음이 급한 농부가 아내를 보자마자 재촉했다. 아내는 대답 대신 광장을 가리켰다. 저 멀리 단상 위에 견장을 단 가신이 서 있다.

"사람들이 다 모이면 이야기를 시작할 건가 봐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농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요리를 내놓느라 참 고생 많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사람들이 서서히 가신을 향해 재촉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단상 위에 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고문을 맡은 하멜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들께 두 가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주민들에게도 존대하세요. 젊은 영주의 당부였다. 낯선 명령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90에 가까운 삶을 사는 동안 그 어떤 영주보다 영주민들을 아끼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눈앞의 주민들은 자신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직 입은 열리지도 않았건만, 하멜 경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주민들을 설득해 성문을 연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인구 조사를 다시 할 겁니다.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가족의 구성원을 제대로 보고하시길 바랍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도 포함입니다."

충격적인 말이었을까. 잔뜩 들떴던 광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대했던 내용과는 정반대의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인구 조사를 제대로 한다는 건 탈세를 막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갓난아이를 키우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 누군가가 단상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이유입니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반응이었기에 하멜 경은 덤덤히 대답했다.

"식량을 머릿수대로 분배할 예정입니다. 머릿수가 많은 집일수록, 많은 식량을 분배 받을 겁니다."

다시 광장이 조용해졌다.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 당장 식량을 많이 받고 가을 추수철 세금을 많이 내느냐, 아니면 반대로 하느냐.

물론, 자신들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사실에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멜 경이 미소를 지었다.

"전해드릴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조용한 광장이었기에 목소리 역시 멀리 퍼졌다. 잠시 시선이 모이길 기다린 하멜 경이 말을 이었다.

"새로운 영주님이 부임하고 난 뒤 세금이 삼 할로 줄어든 걸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원래는 오 할이었다. 10포대의 밀을 수확하면 5포대가 세금이었다.

설마. 식량을 분배하니 세금을 다시 올리겠다는 뜻일까.

하멜 경을 바라보던 주민들의 눈빛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아까처럼 불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식량을 분배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영주님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하멜 경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생각보다 식량 상황이 좋지 않으신 걸 깨달은 영주님께서 올해만 특별히 세금을 이 할로 줄이겠다 하셨습니다."

"!!!"

"정말입니까?"

광장이 들썩였다.

그럼 8포대다. 10포대를 수확하면 무려 8포대가 자신들 차지였다.

조용했던 광장이 순식간 떠들썩해졌다.그리곤, 자연스레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와아아아!!! 영주님 만세!!!"

하멜 경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성문을 열기 참 잘했다.

"그러니 논밭을 열심히 가꾸시길 바랍니다."

"와아아아아!!!"

이 현상은 비단 겨울 호수 근접 마을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뷔른 성 안에서도, 테레스 산맥 근처 마을에서도, 쌍둥이 성과 가까운 동쪽 마을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영주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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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매우 좋아했습니다. 연신 영주님을 환호하는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보고를 하는 로그멜 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웃고 있던 건 아니었다. 소식을 전달하고 온 모든 가신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단 한 명, 마틴 경 빼고.

"그들에게 식량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주민들에게 충성과 소속감을 바라리란 요원하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새로 바뀐 땅 주인일 테니까.

만약 그들이 제국민으로서 소속감이 컸다면, 작년 전쟁 때 뷔른 성이 열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언제든지 또 열릴 수 있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맞습니다. 이번 일로 영주님을 향한 충성심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세율을 낮췄다. 그것만으로 주민들에게 이 영지를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바로 옆 영지만 가더라도 세율이 5할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 화기애애한 회의 분위기를 깬 건, 걱정이 다분한 마틴 경의 목소리였다.

"식량을 나눠준 건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만..."

"..."

"영주님께서 분명 좋은 생각이 있으셔서 세율을 낮추신 거라 믿겠습니다. ...전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처음 세율을 삼 할로 낮츨 때도 마틴 경의 결사반대를 뚫고 실행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 이 할까지 낮췄으니 재정 담당관으로서 머리가 지끈거릴 터였다.

좋은 생각이 있냐고?

그거야 뭐...

"올해만 그런 거니... 괜찮지 않을까요?"

"...예?"

모든 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특히 마틴 경은 못들을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재정담당관은 마틴 경이니 어떻게든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유능하니까요."

"..."

마틴 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 먼 타지까지 왔다는 걸 절절히 후회하는 듯한 표정에 웃음이 터졌다.

저러다 진짜 고향으로 도망가는 거 아닐까 몰라.

내가 웃자 그의 표정이 한층 격해졌다. 노골적인 실망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마틴 경이 입을 열었다.

"웃...기십니까?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이제 내다 팔 철광석도 없습니다!"

"농담이었어요. 제가 해결할게요."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다시...... 예?"

"제가 해결한다고요."

그 말을 끝낸 나는 대전을 한번 둘러봤다.

이번 가을이 오기 전 몇 명은 견장을 떼야 할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가신들이 떼야 할 지도 모르지.

"올해는 전쟁이 터지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병사 육성에 투자하던 부분을 줄이고 영지 재건에 힘을 쓸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올해는 전쟁이 터지지 않는다. 어쩌면 향후 몇 년간은.

힘을 모을 차례다. 매 년 전쟁을 치렀다가는 그 전에 굶어 죽던가, 병사들이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터지지 않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헤일리라는 근거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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