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1화 (171/191)

〈 171화 〉 나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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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어?"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뜨자 원망 가득한 눈빛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에 헤일리를 끌어안았다.

"화났어?"

"...히익!"

오늘도 허리가 뻐근했다. 힘없이 끌려온 그녀를 꽉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그녀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 지, 진짜 죽어요."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주인과 함께 일어난 분신이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정말 안 된다는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당신과 함께 지내는 여인들이 안쓰러워요."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내 말에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매일같이 잠도 못 잘 텐데 그럴 리 없어요."

"아무런 관심도 못 받는 것보단 낫지 않아?"

"..."

그 한 마디에 그녀가 침몰했다. 조용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 말 안 믿을 거예요."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이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하겠다는 처음 말과 달리 오늘도 동이 틀 때까지 괴롭혔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당연하게도, 할 말이 없었기에 말을 돌렸다.

"네 잘못이야."

"...뭐라고요?"

"예쁜 네 잘못이라고."

"..."

"그리고 마지막엔 너도 좋..."

"조용히 해요!"

티 한 점 없는 예쁜 손이 다가와 입을 막았다. 결국, 웃음이 터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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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도 저는 몰라요."

"우선 해봐."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은 우리는 간단하게 방을 정리하고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정말로 스스로 최면이 걸리는지 실험해 볼 차례였다.

"지켜보고 있을 건가요?"

작은 손거울을 든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불안, 슬픔, 그리고 약간의 고뇌가 담긴 눈빛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보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눈을 감고 있어야 할까.

안 보고 있으면 그녀가 능력을 발현 중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고 있기엔,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내가 최면에 걸렸다.

"나가 있을 거야."

"...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왜. 나 없으면 최면 안 걸게?"

"...그건 아니에요. 그냥..."

"난 널 믿어."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말 나가있을 생각이었다.

역시나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자신을 믿을 줄 몰랐겠지.

"...알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따라옴을 느꼈지만, 못 본 척 방을 나섰다.

"사랑해."

방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갈색 눈동자가 다시 흔들린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그녀가 스스로 최면을 걸까 안 걸까.

만약 최면에 걸린 척 연기를 해도 나는 알 방법이 없었다.

방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저택 끝자락에 있는 외딴 방인지라 복도는 한산했다. 잠시 복도에 걸린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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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

슬픈 눈빛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입을 연 건 한참 후였다.

"미안해요."

"..."

"제가... 얼마나 잔인한 일을 했는지... 알았어요."

그걸 이제야 알았어?

웃음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랑해."

"...저를 믿으시나요?"

"그럼."

품 안에 안긴 그녀의 몸이 서서히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품 안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안기만 하면 운다.

웃음을 참으며 계속해서 등을 두드렸다.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겠어?"

"..."

"괜찮아."

간신히 달래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정말 미안한 듯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진정을 한 건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계속해서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달래주고 있었기에 허리가 아파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

"왜?"

팔을 붙잡은 그녀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움찔거렸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갔기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믿냐고?"

"...네."

"그냥 느낌이 그래."

"..."

설명이 부족했을까. 그녀가 입을 삐죽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거론 성에 안 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표정으로 대답한 거 아닐까.

나에게서 확신을 얻으려는 행동 자체가 증거였다.

"이게 연기면 그냥 속을래."

"..."

그녀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또 울겠다 싶어 서둘러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요..."

눈물이 방울방울 달린 그녀가 슬픈 표정을 나를 올려다 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이제 이 방을 나설 때가 됐다. 그 전에 할 것 좀 하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잔뜩 운 탓에 짠맛이 느껴진다.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겠다는 듯 적극적으로 그녀가 호응해왔다.

"사랑해요..."

귀엽다. 귀여워.

"방으로 가자."

큰 산을 넘었다. 이제 더 큰 산이 기다린다.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았다.

여전히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헤일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내가 보는 앞에서 최면을 걸걸 그랬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또 웃음이 터졌다.

"믿는다니까."

"그래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방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직 할 일이 있나?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잔뜩 붉어진 헤일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

무슨 일이지?

혹시 시아라랑 엘라를 만나는 게 너무 긴장되나?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그러나,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고... 갈... 래요?"

"...뭐?"

"그러면 믿어줄... 것 같..."

거기까지 이야기한 헤일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빨개진 그녀가 도망가고 싶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말을 꺼낸 걸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다시 방문을 닫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조금 이따 가도 되겠지.

"흐읍..."

다시 입을 맞췄다. 그녀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 안는다.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고 침대로 걸어갔다.

"날... 믿어줘요."

"믿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 최면에 걸린 게 연기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오로지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없을 그녀가 먼저 유혹한 건 진심이라는 뜻이다.

'조금 미안하네.'

그래도 다 잘 됐으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녀를 믿고, 그녀 역시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

사실 문밖에 서서 구슬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당분간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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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네 개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어색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엘라였다.

"...카인 너를 어떻게 믿어야 해?"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안 좋은 생각을 하는 듯 괴로운 표정이었다. 헤일리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일리는 이제 최면 못 써."

"...뭐?"

"사도 자격에서 박탈됐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헤일리의 최면 능력이 있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최면에 걸렸는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한테 소개를 해주는 이유는..."

이번엔 시아라였다. 경험자의 촉일까. 아직 눈치를 못 챈 엘라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미안한 마음뿐이었기에 잠시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헤일리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카인에게 능력을 뺏기고 죽을 운명이었어요."

엘라와 시아라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놀란 표정으로 헤일리를 바라봤다.

"그때 카인이 제게 뺏은 능력을 신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저를 살려줬어요."

"..."

"그 이유를 아시나요?"

"다나크 제국 때문에..."

헤일리의 질문에 엘라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헤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목숨값을 대가로 카인에게 종속됐고요."

"...그 말은?"

그제야 엘라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창백해졌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엘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세 번째 연인이야."

"..."

"..."

다시 방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아라의 표정이 엘라보다는 침착하다는 것이었다.

"...더 늘어날 거라곤 예상했는데..."

"..."

"샬롯이 아니라 저 여자일 줄은 몰랐어."

엘라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었기에 시선을 피했다.

"...카인과 연관된 여자가 더... 있나요?"

나 대신 대답한 건 헤일리였다. 두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시아라를 쳐다봤다.

"아냐. 없..."

"그 말 샬롯한테 이를 거야."

"나랑 샬롯은 아무 사이도..."

"에어로크, 헤르트에 이어 다나크 제국까지... 전 대륙 여자들 다 모을 거야?"

"..."

세 여자의 협공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헤일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을 들어오기 전 그 애틋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헤일리?"

"당신... 바람둥이였어요? 저는 당신만 보고 전부 다 줬는데...! 어떻게...!"

"...전부?"

"카인. 그게 무슨 뜻이야? ...그래서 방에 찾아오지 말라고 한 거였어?"

"..."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다가올 폭풍에서 무사히 살아남길 바라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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