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70화 (170/191)

〈 170화 〉 한 가지 조건

* * *

"하아... 하아..."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카인은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참고 참았던 절정의 파도가 꽤 컸는지 그녀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때, 가쁜 숨을 터트리던 헤일리가 돌연 몸을 돌려 카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감정과 별개로 습관에서 나온 움직임이었다.

아니, 감정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녀를 매도하고 또 매도했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최면의 편린을 느끼며 카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그녀가 품에 안길 때 기쁨까지 느꼈다.

"생각을 고쳐먹었나?"

카인이 몸을 긴장시키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자신을 방심시키려는 작전일 수도 있었기에.

혹시나 그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 치려고 하면 바로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다르게 헤일리는 고개를 들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저 카인의 품을 더 파고들며 물기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 예쁘게 하세요."

"..."

뜻밖의 말이었기에 카인의 입이 다물어졌다.

잠시 헤일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하던 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부드러운 톤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조금 더."

그녀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카인은 순순히 요구에 응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만큼 남자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건 없다.

게다가 그 목소리가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라면 더욱더.

"...많이 힘들었어?"

"...흑."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의미로 붉어진 얼굴을 보며 카인이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아직도 몰랐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한참을 그녀를 달랬다.

혹시 시간을 벌려는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산 끝에 걸려있던 달들이 완전히 하늘로 비상했을 때였다.

"...당신을 증오해요."

"나도."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요."

"..."

이번엔 카인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헤일리의 입도 다물어졌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방안을 휩쓸고 간 후, 헤일리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제 최면이 그렇게 강했나요? ...증오하는 절 이렇게 껴안아 줄 만큼?"

"맘 같아선 능력 바꾸고 싶어."

"뭐...라고요?"

최면 능력이라니. 상상만 해도 쓰임새가 다양했다.

전쟁터만 전전하는 이런 삶 말고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여자들이나 만나면서...

"진심이에요?"

"나처럼 구슬로 쓰는 능력이었으면 넌 진작 뺏겼어."

"..."

눈이라 아쉬웠다. 뽑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정말로 아쉬워한다는 듯한 카인의 말에 헤일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순간 움찔하며 눈을 감은 카인이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물든 눈가가 보인다. 발갛게 충혈된 두 눈이 카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운 거야."

"...네?"

"퉁퉁 부어서 능력 쓰고 있는 줄 알았어."

"..."

황당하다는 시선이 날아왔다. 카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시 품 안에 끌어넣었다.

"그래서, 왜 그런 거야."

그토록 질색을 하더니 갑작스레 허리를 휘감은 바람에 안에 사정했다. 그리고, 이어져 나온 헤일리의 대답에 카인의 입이 벌어졌다.

"...애가 생겨야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을 거 아니에요."

"...뭐?"

품에 안긴 그녀를 떼고 얼굴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눈가가 보인다.

"배신이라니?"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이미 결심을 한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뭔데."

"다나크 제국을 공격하지 마세요."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제대로 최면만 건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한 가지 더 있어요."

"한 가지라며."

"아무튼요."

"...뭔데."

당돌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헤일리의 입이 처음으로 닫혔다. 말을 할까 말까 묘한 표정이었다.

인형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니 말을 거르는 게 힘들만 했다.

"말 안 할 거면 그것만 해."

"아니에요! 말 할 거에요..."

뭔데 그렇게 애를 태울까. 늘 여유롭던 모습만 보여주던 헤일리의 낯선 모습에 카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올라오기 시작한 그때, 헤일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나크 제국 수도로 가끔 찾아오세요."

"그건 안 돼."

카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너무 위험했다.

"...저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저 역시 이제 당신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럼 이번이 마지막 만남인가요?"

"..."

그제야 헤일리의 뜻을 이해한 카인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마음속에 남은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나온 방어기제였다.

살짝 미안함을 느끼며 카인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갈게."

"이미 마음 상했어요."

"..."

"당신은 연인이 둘이나 있다 이건가요? 전 당신 혼자인데?"

새로운 화두가 올라왔다. 헤일리를 설득하는 것을 지나면, 두 여인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인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 설득해야 하나.

섹스로 설득했다고?

절정에 도달하는 거로 애태웠다고?

아니면 임신시킨다고 협박했다고?

"..."

"당신은 머리 좀 아플 필요가 있어요. 다음에 당신 연인들 만나면 억지로 강간 당했다고 다 이야기할 거에요."

쌓인 게 많았는지 도끼눈을 한 헤일리가 카인을 노려봤다.

그 말을 들은 카인이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 이야기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건 안..."

"그리고 혹시라도 나만 차별하면, 그냥 죽어버릴 거에요."

"..."

"어차피 당신을 이길 방법은 없고... 다른 여인들보다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면 바로 죽을 거에요."

전혀 새로운 협박에 카인이 황당한 얼굴로 헤일리를 바라봤다. 설마 죽어버린다고 협박을 할 줄은 몰랐다.

"절 망가뜨릴 생각이라면 책임을 지세요."

"너도 날 망가뜨렸어."

"그럼 책임을 안 진다는 소리인가요?"

팔베개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눈앞에서 도끼눈을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헤일리의 모습에 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죠?"

"사랑해."

카인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아직 최면을 걸지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것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나신을 느끼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 품에 안긴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전 안 사랑해요."

"난 사랑해."

"최면이 안 걸릴지도 몰라요."

"이젠 그거 상관없는 거 알잖아."

헤일리가 조용해졌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굴복했다는 것을.

품에 안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은 듯 조금 작은 목소리였다.

"...정말 최면에 안 걸리면... 그래도 저를 믿을 수 있나요?"

"몰라."

"진지하게 답변해 주세..."

"진짜 몰라. 그래도 믿는다고 하면 네가 날 배신할 것 같아서 두렵고, 안 믿는다고 하면 상처를 줄 거 같아."

일말의 불안감은 남아있었다. 99의 능력치를 가진 그녀가 작정하고 연기를 하면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방을 벗어나고 싶어서 굴복한 척 연기를 하는 거라면... 그래서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몰라.'

이미 글렀다.

정말 헤일리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안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 몸을 섞은 이상, 그녀를 속 편히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속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난 지금부터 진심이야."

"..."

"너 역시 진심으로 나를 도울 생각이라면, 제대로 능력을 발현해. 그럼 네 걱정대로 차별을 받을 일은 없으니까."

"...정말 저를 믿는 건가요?"

"그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진지하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내 신뢰를 못 받을까 봐."

"..."

그 말에 헤일리가 놀랐는지 꼼지락거리던 손을 멈췄다. 맨날 인형이랑 대화하다 보니 나도 인형인 줄 알았나?

"...최면은 일단 자고 내일 해요. 피곤해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는지 나긋한 목소리였다. 오늘 아침도 그렇고 방금까지 쾌락을 느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건 안 돼."

"...네?"

품에 안긴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맞춘 카인이 입을 맞췄다.

"으웁..."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긴장으로 헤일리의 몸이 굳는 걸 느끼며 카인이 조금 더 천천히 몸을 쓰다듬었다.

"싫, 싫어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인이 쓰게 웃었다. 그녀에게 섹스는 그리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괴로우면 안 할게."

"..."

"한 번만 더 하자."

"아, 아까도 한 번이었잖아요..."

"..."

할 말이 없었다. 시선을 피한 카인이 그녀 위로 올라타며 가슴을 입으로 물었다.

부드러웠다.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고 하얗다. 당황으로 물든 헤일리가 카인의 머리를 붙잡았지만, 이내 힘이 빠졌는지 스르륵 풀렸다.

좋은 기억을 심어주자.

나쁜 기억을 덮을 정도로 좋은 기억을.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였다. 겁에 질린 그녀가 안정될 때까지 애무했다.

헤일리의 그곳도 단맛이 났다.

엘라와 시아라를 통한 교차검증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늘 신기했다.

부끄러운지 헤일리의 얼굴이 붉었다. 수치심에 물들었던 이전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열락의 신음이 터졌을 때, 카인이 자세를 잡고 그녀 위로 올라갔다.

"괴로워?"

"..."

그녀가 처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순서와 분위기에 긴장한 듯싶었다.

카인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모든 기억을 지우긴 어렵겠지만, 조금은 덮었으니 다행 아닐까.

"사랑해."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카인은 만족했다. 적어도 아까처럼 증오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잘 됐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반강제로 범한 적도 처음이었고, 또 누군가를 강제로 사랑하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천천히 입을 맞췄다.

체념한 걸까. 아니면 완전히 굴복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하고 있을까.

순순히 받아들이는 헤일리를 보며 카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일 생각하자.

일단은 눈앞의 아름다운 육체를 맛보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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