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67화 (167/191)

〈 167화 〉 부작용

* * *

평소보다 조금 빨리 눈이 떠진 아침이었다. 낯선 이불 촉감에 금방 눈을 뜬 것도 한몫했다.

허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원 없이 하긴 했지. 하품과 함께 눈을 비볐다.

"...일어났었어?"

"오, 오지 마세요!"

아침부터 낯선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을 듣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아니, 이젠 낯익은 여자인가?

한숨도 안 잔 건가? 붉게 충혈된 눈이 겁에 질려있었다.

아니다. 분명 어제 그녀가 기절하듯이 쓰러지는 걸 보고 잠에 들었다.

"더 자지."

"..."

가볍게 팔을 돌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탓에 아침이라고 같이 기상한 물건이 훤히 드러났다.

"차 한잔할래?"

아침엔 역시 홍차다. 현대였다면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눈을 떴겠지만, 그 시절도 이미 5년이 지났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녀를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자 앞에서 나체로 돌아다니려니 살짝 민망하다.

새벽까지 몸을 섞은 여자지만 그거와 이건 다른 경우지 않나. 그녀 역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기도 하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물을 데웠다.

그녀 것까지 두 잔 분량을 준비했다. 목이 많이 마를 거다.

그때 등 뒤에서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어, 어떻게... 어떻게 최면을 푸, 풀었죠?"

그 말에 손을 내려봤다. 어제까지 발갛게 부어있던 손이 멀끔히 아물어 있었다. 처음 벽을 때릴 때만 해도 어디 금 간 줄 알았는데.

"차부터 들어. 천천히 이야기하게."

그녀가 보는 앞에서 각설탕을 넣고 찻잔을 들어 탁자로 걸어갔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정사의 흔적이 남지 않은 깨끗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이불을 더 꽉 쥐고 있었다.

"빨리."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떨어진 톤 때문이었을까. 흠칫 놀란 그녀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여전히 한없이 굼뜬 동작이었다.

아, 옷이 없어서 저러나?

"저기 옷장 열어 봐."

그러고 보니 나도 옷을 입어야 하는데.

말을 꺼낸 김에 옷장으로 걸어가 가벼운 바지를 하나 꺼내입으며 그녀에게도 옷가지를 던졌다.

엘라? 시아라? 누구 건지 모르겠다. 뭐 사이즈는 비슷하겠지.

그제야 그녀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불 속에 웅크린 채 팔을 뻗어 옷을 잡고는 그대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불이 들썩거리는데, 마치 슬라임이 먹이를 먹은 듯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다 입었으면... 여기 앉아."

"..."

시아라 옷이구나. 유난히 압박 받는 가슴 부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저 이불도 더러울 텐데. 그녀도 나도, 위치를 가려가며 파정 하진 않았다.

역시나, 새 옷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있었다.

"차부터 마셔."

"..."

"마셔."

그제야 그녀가 찻잔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떨리는 게 보인다. 영락없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새끼 고양이다.

헤일리는 밤새 나에게 최면을 시도했었다. 물론, 그때마다 난 눈을 감고 허리를 더 강하게 흔들었고.

몇 번이나 시도했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조금의 여유만 주면 시도했었으니까.

"최면을 어떻게 풀었는지 궁금해?"

"...네."

"너한테 알려줘서 내가 뭐가 좋은데?"

물론 이야기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쉽게 이야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설마 무언가를 요구할 줄은 몰랐는지 그녀의 눈빛이 다시 떨리고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그것만 들어주면 전부 알려줄게."

"...부탁이 뭔가요."

"함께 온 일행들을 불러서 몸이 안 좋아 며칠 쉰다고 전해. 내가 보는 앞에서."

"...그건 안..."

"돼."

"..."

그녀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설마 하룻밤만 버티자고 다짐했었나? 이런 간단한 것도 생각 못 하는 걸 보니 어제 일이 꽤 충격이긴 했나 보다.

"어제 내 말 기억 안 나?"

찻잔을 들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평생... 나와 함께 하자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손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완전히 절망으로 물든 그녀를 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각설탕을 넣었더니 차가 달다.

"거, 거짓말하지 마... 마세요. 저는 제국의 사, 사절이에요."

"그게 왜?"

"...네?"

"제국으로 돌아가다 마적에게 당했다고 보고가 올라갈 거야. 다른 사절들은 다행히 다친 데 없이 돌아갔지만, 안타깝게도 유라페스 공작은 목숨을 잃은 거지."

"..."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한 공작... 네 이름은 두고두고 제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게 될 거야."

즉흥으로 지어낸 뻥이고 소설이었다. 그런 헛소리에 속을 제국도 아닐뿐더러 그런 짓을 벌였다간 당장에 내가 의심을 받는다.

그래도 뭐 어때. 눈앞의 여자는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최면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보내면 가능하긴 했다. 그녀가 안 할 테지만.

"제, 제발... 살려주세요..."

결국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덜덜 떨리는 몸이 완전히 공포에 잠식당한 듯 싶었다.

"내가 널 왜 죽여."

평생 함께할 거라니까. 말을 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 모습을 본 그녀가 더 크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효과 괜찮네.

처음부터 그녀를 감금시키고 협박했다면?

절대 굴복 안 했을 것이다. 오히려 머리가 똑똑한 그녀는 내 모든 말에 허점을 찾아내며 반박했겠지.

'99'

..무려 99의 능력치를 가졌으니까.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이마를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능했다. 이미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다.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다. 최면이 없는 헤일리는 그저 방에 감금된 여인일 뿐이다.

'그 능력이 워낙 사기여서 그렇지.'

"어떻게 최면을 풀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사절을 불러 복귀 일을 지연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간단해. 난 네가 최면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뿐이야."

"아..."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간다. 겨우 내 말 하나로 모든 상황을 깨달은 헤일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사실도 그녀가 어젯밤 조금만 이성을 차렸다면 알 수 있었을 사실이다. 그녀의 눈이 붉어질 때마다 내가 눈을 감았으니까.

그 말은 즉 내가 최면을 건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니까.

"어제 내가 운동을 하고 왔던 거 기억나?"

"...설마."

그녀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 여기까지 말 한 이상 굳이 더이상 설명은 필요 없었지만 말을 이었다.

원래 둔재가 천재를 속이면 자랑하고 싶은 법이다.

"최면을 걸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그럼 그걸 어떻게 깨느냐인데..."

깰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전쟁 당시 루시의 최면이 깨지는 걸 직접 봤으니까.

결국 내가 한 일은 물을 마시는 일이었다. 그것도 잔뜩.

"네가 독대를 청한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바로 운동을 시작했지. 물을 계속해서 마시는 걸 네가 의심하지 않게."

알현실을 들어가기 전에도 한계까지 물을 마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해서 물을 마셨다.

"...그래야 화장실을 가니까."

"그렇지."

물배로 가득 차 토할 뻔했었다. 그 정도까지 마셨다. 최면에 걸려도 화장실에 가고 싶게끔.

화장실로 곧장 들어간 나는 곧장 소변기로 향했다. 이 부분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땐 온통 머릿속에 헤일리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소변기로 향한 나는 소변기 위에 붙은 양피지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했었다.

「고지현 필독」

한글로 썼다.

아무리 깊은 최면에 빠져도 볼 수밖에 없게끔. 아무리 깊은 잠재의식에 빠져도 이 세계로 넘어온 내가 확인할 수 있게끔.

그리고 그걸 펼쳐 읽었다.

첫 부분은 간략했다.

내 이름, 내 한국 이름, 나이, 진짜 나이, 부모님 성함까지.

나에 대한 모든 걸 써놨다.

그리고 그 밑부분은 시아라와 엘라 이야기를 적어 놨다.

두 명의 연인, 함께했던 추억, 어떻게 만났는지, 둘의 나이, 왜 사랑하게 됐는지.

헤일리가 어떤 부분에서 최면을 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에어로크를 떠나라는 명령을 할 수도, 엘라와 시아라를 죽이라는 명령을 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빼곡히 적었다.

그리고 최면에 걸렸던 나는 그걸 천천히 읽었다.

별생각은 없었다. 그저 한글로 적인 그 글이 너무 그리워서 읽었을 뿐.

그리고 양피지의 끝 부분엔 헤일리에 대한 내용을 적어놨었다.

그녀의 능력, 루시에 관한 이야기, 최면에 걸렸을 거라는 예상, 그녀와 나는 대리자라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에게 최면을 걸었을 거라는 내용까지.

그때 처음으로 혼란에 빠졌다.

헤일리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이게 최면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분노에 젖어 양피지를 찢으려 했다. 한글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니 신이 장난쳤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크게 화를 내리라.

그렇게 까지 생각했다. 그때는 헤일리라는 존재는 엘라나 시아라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분노에 젖어 양피지를 찢으려던 그때, 내 눈에 마지막 문장이 들어왔다.

「헤일리와의 추억?」

'...'

머릿속을 뒤집었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추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온 과거를 뒤졌다.

...그러나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었다.

단 하나도.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뇌를 손으로 쥐어뜯는 고통에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한참을 뒹굴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최면의 끈이 다시금 강해질 때마다 손바닥으로 뺨을 치고 두 손을 들어 몸을 때렸다. 벽을 때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분명 루시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최면이 약했던 탓이라.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몇 번에 걸쳐 나에게 최면을 걸던 헤일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서서히 통증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만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은 최면을 걸었던 부작용일까.

최면이 완전히 풀린 걸 깨달은 후에도 헤일리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나는 여전히 헤일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한참 만에 나온 목소리가 자연스레 으르렁거렸다. 다시금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네 최면이 완전히 안 풀린 건 알고 있나?"

"...네?"

겁에 질려 바닥을 바라보던 그녀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가 내게 겁에 질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게 화가 났다.

"내가 왜 너를 떠나보내기 싫은지... 왜 붙잡아 두려고 하는지... 이제는 알겠나?"

사랑하는 사람을 노려봤다. 나도 안다. 이건 최면의 파편이라는 걸. 그저 단순한 부작용이라는 걸.

"...설마."

다른 의미로 하얗게 질려가는 그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만든 결과물이니, 네가 책임져라."

그녀를 다시 침대로 던졌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른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커튼을 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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