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이게 아닌데
* * *
"...유라페스 헤일리. 당신 눈앞에 있는 여인이에요."
됐어. 드디어 됐어.
희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등줄기가 짜릿해지는 쾌감에 붉은 안광이 흔들렸다.
"당신은 저를 사랑했어요."
"..."
"그렇죠?"
다시 한번 최면을 강화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당신은 저 오빠를 죽인 죄책감에 저를 책임지고 싶어 해요.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요."
"..."
"왜냐하면... 저를 사랑하니까요."
그의 흐릿한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그간의 기억 속에 자신의 최면이 침투하며 그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
그래요. 좀만 더 노력해봐요. 저를 사랑하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에게도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돌려주고 싶었다.
지나치게 똑똑한 자신의 머리는 두 달 전 이곳에 있었던 그 공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집착이 됐다.
그의 표정, 자세, 몸짓... 모든 게 여전히 기억났다. 그 집착 아닌 집착에 걸려버렸던 자신처럼 그에게도 자신만 생각나게 만들고 싶었다.
"당신은... 하루도 저를 잊을 수 없어요. 제가 없으면..."
흥분으로 숨이 가빠왔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비슷한 내용으로 최면을 강화한 적은 처음이었다. 부작용은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자신을 위해 서슴없이 모든 걸 바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고 싶었다.
자신을 집착하게 만든 그가 이번엔 자신에게 집착했으면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숨을 고른 헤일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제가 없으면 당신은 삶의 의욕이 사라질 거에요."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혼란스럽던 표정이 진정되며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됐다.
됐다고!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나친 흥분인지, 아니면 능력을 쓴 부작용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헤일리는 웃었다. 오늘처럼 기쁜 날은 웃음이 어울리니까.
"저를 사랑하나요?"
"그렇...소."
그가 흐릿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하는 인형이 됐다. 자신만의 특별한 인형.
그러니 이제 시험을 할 차례였다.
정말 최면이 제대로 통했는지 궁금했다.
이런 인형 같은 모습으로 명령을 듣는 모습이 아닌, 정말 최면에 걸린 상태.
이 남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능력을 해제하면 가장 먼저 뭐라고 할까.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슴에 두 손을 올린 그녀가 설레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알현실을 감돌던 붉은 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두 눈과 머리카락이 서서히 갈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뭐라고 할까?
최면에 걸린 그는 나를 보고 가장 먼저 뭐라고 할까.
사랑해? 보고 싶었어?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나, 헤일리는 생각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입을 침범한 무언가 때문에.
"흐읍!"
거칠었다. 그러나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는 그의 혀는 부드러웠다.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온 그는 다짜고짜 입을 맞춰왔다.
첫 키스였다.
아니, 다른 남자와의 접촉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을 지배한 이 감정이 공포인지, 아니면 두 달 동안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남자의 구애에 대한 기쁨인지 헷갈렸다.
"자, 잠시만..요."
몸이 서서히 밀리더니 어느 순간, 거진 올라탄 자세였다.
그에게 밀려 소파에 반쯤 몸을 눕힌 헤일리가 고개를 꺾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입안에서 그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랑해."
"흣..."
고개를 돌린 자신을 따라오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정말 달콤한 목소리였다.
싸늘했던 그에게도 이런 목소리가 있구나.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으르렁거리던 그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구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최면은 걸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헤일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두 달 전의 기억이 오늘 일로 갱신될 것이라는 걸.
앞으로 평생 오늘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자신은 싫어도, 자신의 머리는 기억할 것이다. 두근거렸던 심장,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말투, 태도까지... 모든 게 생생히 기억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그에 대한 집착이 더 강렬한 기억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머리가 소파에 닿았다. 드레스가 말려 올라가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결국 그에게 밀려 완전히 눕혀진 헤일리는 자신을 올라탄 남자를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에 담긴 건 노골적인 소유욕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부, 부탁이에요. 멈...추세요."
진작 멈추라고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혼이 쏙 빠져버렸었다. 첫 키스를 이렇게 뺏길 줄은 몰랐다.
다행히 최면이 먹혔다.
자신의 몸을 올라탔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내려와 자리로 돌아갔다.
압박당하던 몸이 가벼워졌다. 서둘러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헤일리가 다급히 드레스를 정리했다.
최면을 이중, 삼중으로 겹쳐서 걸은 게 문제였을까. 설마 능력을 끄자마자 그가 키스를 해올 줄은 몰랐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도록 했으니 한번 말을 해두면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가 카인을 바라봤다.
"말도 없이 그렇게 키스를 하면 어떡..."
"..."
"해요..."
거칠게 쏘아붙이려던 그녀는 카인과 눈을 마주친 순간, 가슴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몸은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아니었다.
노골적인 소유욕.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최면이 아니었다면 절대 자신의 몸 위에서 비키지 않았을 거라는 눈빛.
"..."
"..."
그에게 겁탈당할 뻔했다. 그것도 자신이 건 최면에 의해.
나를 얼마나 사랑하게 된 걸까. 아니, 최면이 얼마나 강한 거냐고 말해야 할까.
싸늘하고 냉정한 모습만 봐왔던 그녀는 그의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 허락 없이는 함부로 제 몸에 손대면 안 돼요."
"하지만 난 널 좋아해."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떨렸다. 설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말을 잘 들으라는 명령이 충돌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안 돼요. 저를 사랑한다면, 참아주세요."
"언제까지?"
"...네?
"약속을 해주면 참을게.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의 눈빛이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약속을 해주지 않는다면 말을 듣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능력을 다시 켜야 할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늘 능력을 킨 상태로 대화를 해야 할까. 이러다가 정말 어느 날 그에게 겁탈당할 것 같았다.
원래 그의 성격이 이런 건지, 아니면 자신이 최면을 너무 강력하게 걸은 건지 헷갈렸다.
"오, 오늘은 안 돼요. 여기는 알현실이기도 하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기에 나오는 말도 비루했다. 무작정 안 된다고 하면 당장 덮칠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변명이 모자랐을까.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 왜 그러죠?"
"알현실이 문제라면 다른 곳으로 가자."
그리고는 주저 없이 자신의 팔목을 잡았다. 그에게 잡혀 일어난 헤일리는 결국 다시 능력을 발현해야 했다.
붉은빛이 다시 알현실을 감싼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그에게 잡힌 손목 때문인지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 그녀의 첫 마디는,
"다, 당신은 성욕이 하나도 없어요. 그, 그렇죠?"
"..."
"저를 정말 사랑하지만, 성욕은 느끼지 않..."
거기까지 이야기했던 헤일리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차 싶었다.
이미 사랑한다는 최면을 몇 번에 걸쳐 중첩했다. 게다가 그는 최면에 풀리자마자 자신에게 덤벼들었다.
그런 그에게 성욕이 없다는 최면을 건다고?
...충돌할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녀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당황했다. 너무 당황해서 기존 명령과 충돌하는 최면을 걸어버렸다.
"아니에요. 사실 당신은 성욕이 많..."
그녀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이것도 이것대로 문제였다.
이대로 최면을 끈다면, 그대로 그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할 게 뻔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에요. 당신과 제가 오랜만에 만난 날. 그러니까 오늘은 참고 다음에... 다음에 하고 싶어요."
"..."
"그렇죠?"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임시방편이었다. 제국까지만 어떻게 데리고 가면, 그 후론 저택에서 원 없이 능력을 쓰며 정보를 뽑을 수 있었다.
이곳은 자유롭게 붉은빛을 뿜어내기엔 너무 위험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아니에요."
이성이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사과를 했다. 그에게 잡혔던 손을 쓰다듬으며 헤일리가 미소로 화답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폭풍이 지나갔다. 드디어 가라앉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미안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아까 그가 물을 많이 마셨던 것이 떠올랐다. 자신에게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헤일리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준 헤일리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소파에 등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첫 키스였다.
남자와의 접촉도 처음이었다.
아직도 입을 탐하던 그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화풀이할 곳도 없었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공존하는 그 느낌에 헤일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지?"
그녀가 차갑게 식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미약한 불안감이 들어 그를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할 때쯤,
"미안해. 늦었지?"
그가 웃으면서 들어왔다. 두 손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찬물에 씻었을까.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헤일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장이 좀 안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괜한 불안감에 호들갑을 떨 뻔했다.
그때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나. 갑작스레 접근하는 그를 보며 헤일리가 몸을 뒤로 빼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왜요?"
"응? 아니 나 차도 없고, 알현실 말고 좀 조용한 데로 갈까 해서."
그러더니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목이 탄다며 차도 마시지 않았다. 괜히 혼자 놀란 게 민망해 얼굴에 피가 몰렸다.
"푸흐. 미안하다니까. 놀랐어?"
"...몰라요."
그가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남자와 손을 맞잡은 것도 처음이었다. 어이없게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속으로 타박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 됐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알현실보단 단둘이 있을 조용한 공간이라면 정보를 얻기도 쉬울 것이다.
그렇게 그와 함께 손을 잡고 복도로 나섰다.
"...아무도 없네요?"
"내가 다 물렸었거든. ...왜 물렸었더라?"
"아, 아니에요. 저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얼른 가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의 손을 잡고 재촉했다. 괜히 쓸데없는 질문으로 위화감을 심어줄 뻔했다. 다행히도 그 역시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했다.
"여긴가요?"
"응. 여기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는 곳이야."
확실히, 저택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방이었다. 작은 탁자와 간이 차 도구, 한쪽은 둘이 눕기에도 충분한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종종 사용하거든. 사람들도 잘 알아서 내가 여기 있을 땐 아무도 안 찾아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차 도구를 향해 걸어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찻병에 물을 따르더니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며 물었다.
"에어로크가 홍차로 유명한 거 알지? 고향에서 직접 가져온 거야."
"...그렇군요."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구나. 불과 삼십 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그를 보며 헤일리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능숙하게 차를 따른 그가 자신에게 찻잔을 넘겨주더니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
"왜, 왜 여기 앉...아요?"
"싫어?"
"..."
시선을 피했다. 싫다고 하면 위화감이 들 게 뻔했고, 좋다고 하기엔 너무 당황스러웠다.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네."
어깨를 통해 그의 어깨가 느껴진다. 슬슬 정보를 캐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스킨십에 정신이 자꾸 딴 데로 샜다.
침착해. 헤일리.
침착해야 해. 어차피 이 남자는 나를 건들지 못...
"이곳은 우리 둘뿐이니까... 괜찮지 않아?"
"...네?"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설마, 자신이 마지막에 건 최면을 이렇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오면..."
"아무도 안 온다니까."
눈앞이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거부하자니 최면이 깨질 것 같았고, 허락하자니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이래서 그녀는 평소에 늘 능력을 발현하고 대화했다.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닿는 것이 너무 무서웠기에.
결국, 다시 능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
"흐읍!"
또다시 갑작스레 침범한 그의 혀를 느낀 헤일리가 숨을 들이켰다.
이젠 정말 안 된다.
차라리 잘 됐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혹여나 능력을 사용하다 걸릴 일도 없었다.
마음을 먹고 그녀가 서서히 집중하는 그때,
"흡?!"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