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사랑하는 연인이
* * *
"...부끄러워."
"나도 부끄러워."
어이없다는 시선이 내게 날아왔다. 그것도 두 쌍이나.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목욕 시중 안 했었어?"
"안 했는데..."
소꿉친구로 지내서 그랬나? 태연하리라 예상했던 시아라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였다. 혹시나 놀리면 도망갈까 그녀의 손을 붙잡고 탕으로 끌고 들어왔다.
"나, 나, 나는..."
"...큭."
평소의 그 도도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엘라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흔치 않은데.
"얼른 들어와. 그래야 덜 부끄럽지."
일부러 태연을 연기하며 엘라의 손 역시 잡아끌었다. 얇은 천으로 몸을 가린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녀가 스르륵 끌려왔다.
"좋다."
"..."
"..."
왼쪽에 시아라, 오른쪽에 엘라를 끼고 어깨를 감쌌다. 따듯한 탕 속에서 두 미녀와 함께하는 목욕이라니, 신선이 따로 있을까.
그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등 뒤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됐다. 두 달 만에 설득에 성공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전우조."
"..."
그녀들의 살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자연스레 그녀들을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간다.
뿌연 김 때문에 물속이 흐릿했다.
두 여자의 몸매를 감상하고 싶었는데 조금 아쉽다. 그래도 괜찮다. 물이 식는 건 필연적인 결과에 속하니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다.
"내일은 절대 방 밖을 나서지 마. 둘이 떨어지지도 말고."
"...응."
며칠 전 테레스 산맥에서 전령이 왔다. 제국의 사절단이 돌아오는 중이라고.
드디어 내일이다.
내일, 나와 헤일리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렇기에... 이제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두 달 동안 내가 준비했던 것과는 별개로 꼭 해야 하는 말이다.
내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헤일리에게 직접적으로 경고를 했던 만큼, 그녀 역시 무언가 수를 썼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해야 한다.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절대 문을 열지 마. 설령 내가 불러도."
시아라와 엘라의 팔을 쓰다듬었다. 닭살 하나 없는 부드러운 살결이 손가락을 자극한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두 여자가 걱정하지 않을까.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그리고 만약... 모레 아침에 내가 없으면, 스승님께 찾아가. 알아서 하실 거야."
스승님께는 미리 언질을 드렸다. 신의 사도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그 말과 함께 봉인된 봉투를 드렸다.
진실이 담긴, 내 모든 것이 담긴 글이 담겨있는 봉투를.
만약 내가 내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지 않는다면, 분명 제국으로 끌려갈 것이다. 내 두 발로.
"...그냥 바로 죽이면 안 돼?"
손끝으로 시아라의 떨림이 느껴졌다. 낮게 잠긴 그녀의 목소리에 더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쓰다듬었다.
"제국의 사절이니까 그건 안 돼."
죽이면 안 된다. 이 영지가, 작위가, 모든 게 사라진다.
늘 품에 넣고 다니던 녹색 구슬과 붉은 구슬이 떠올랐다. 나는 그걸 통해 능력을 사용한다. 그러니 그녀 역시 품 안에 무언가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걸 뺏을 생각이었다.
"우리가 해줄 일은 없어?"
무력한 목소리였다. 일국의 공주에서 시녀가 된 엘라가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없긴,
일단 지금 당장 그녀들이 해줬으면 싶은 건 있었다.
팔뚝을 쓰다듬던 손을 밑으로 내려 두 여인의 손을 붙잡았다. 가녀린 손가락이 자연스레 깍지를 껴왔다. 그렇게 나는 그녀들의 손을 목적지로 인도했다.
"흣?!"
"...카인?"
그녀들을 달래겠다고 연신 팔을 쓰다듬은 게 문제였다. 이놈이 눈치 없는 게 하루 이틀인가. 어쩌다 보니 내 손 대신 기둥을 잡게 된 두 여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얼른."
"..."
"..."
흔들리는 물결 사이로 보이는 두 여자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로 한 적은 있어도 같이 한 적은 없기에 박자가 안 맞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흥분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게 커져...?"
"이런 상황에서도 너희 둘이 예쁜 탓이야."
자연스러운 남 탓으로 말을 돌렸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두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게 원래 목적이었지?"
"아니."
거짓말이다.
분신을 쓰다듬는 기분 좋은 쾌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를 부른 그 남자가 떠올랐다.
하얀 얼굴, 몸을 덮은 하얀 천, 검은 머리, 검은 눈...
전지전능한 신이시여.
내일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꿈에 나오지 마십쇼. 괜히 꿈자리 사나워지니까.
하지만, 내가 내일 그녀를 이길 운명이라면 얼굴 좀 비쳐주십쇼. 당신 얼굴 보면서 힘이라도 얻게.
물론, 꿈에 신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두 달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때문일까.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알현실이 낯익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내내 그때를 떠올렸으니까.
그가 앉아있던 의자, 그가 지었던 표정, 자세, 그가 붙잡았던 문고리까지...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호록.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홍차를 들었다.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오르던 그 날의 공포를 지울 때가 다가왔다.
그건 병이었다. 정신병. 헤일리는 스스로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일종의 집착이 생겼다는 걸.
모든 장면이 생생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됐다.
그때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다. 그도 똑같은 의자에 앉았으면 했다. 단 한 시간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 장면을 똑같이 재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를 것이다. 그에겐 아주 치명적인 최면을 걸 생각이었다.
최면만 있으면 자신은 무적이다.
그 누구도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라도 최면에 걸리면 빠져나올 수 없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 눈을 마주치면 헤일리는 이 정신병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서히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래... 자신에겐 최면이 있다. 그러니 그가 와도......
"오래 기다리셨소."
두근두근두근두근.
헤일리는 습관처럼 가슴을 부여잡을 뻔했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간신히 침을 한 번 삼켰다.
대답.
대답을 해야 한다.
"...아니예요. 금방 오셨네요."
"미안하오. 수련을 하다 와서."
문을 열고 나타난 그가 그때 앉았던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았다. 머리카락이 조금 자라있었다. 손톱도 조금 자라있었다. 그때와 달리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난 물로 주게."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들어왔던 하녀가 찻병을 들고 다시 사라지더니, 이내 큰 물병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목이 탔는지 그는 곧바로 큰 잔에 물을 가득 따르더니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다 오시지 그랬나요."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소."
무심한 얼굴이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자신의 작위가 높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오. 그때 일로 다신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랬구나.
역시 몰랐어.
그는 내가 대리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다신 볼 일 없을 거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두 달 동안 웅크리고 있던 감각이 다시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때 일로 사과를 드리려고 찾아뵀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 괜찮소. 나 역시 공작께 함부로 대했으니 잘 한 것도 없고."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가 다시 물잔을 들었다. 벌써 석 잔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의 잘못을 사과하는 의미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
그래요. 선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인지 모른다. 자신에게 공포를 안겨줬던 이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 때가 왔다.
조금 더 가지고 놀다가 최면을 걸까 생각했지만,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만약 그때처럼 또 돌발 상황이 생긴다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온몸을 가로지르는 희열을 느끼며 그녀가 더 활짝 웃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와 눈을 마주친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게... 제 선물이랍니다."
수수했던 갈색 머리가 어느새 타오를 듯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평범했던 갈색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
"후후."
어떡해. 너무 행복해.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그를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두근거림이었다.
이제... 최면을 걸 차례였다. 수많은 인형을 만들었던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최면을 걸었을 때도 이 정도로 떨리진 않았었다.
"당신은 제 오빠를 죽였어요. 그렇죠?"
"...그렇소."
"그래서 저한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
행복했다. 자신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알려줬던 남자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깨웠던 사람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제 질문에 늘 솔직하게 답해야 해요. 미안하니까... 그렇죠?"
"...그렇소."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집중이 깨질 것 같았다.
너무나 강렬했던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집착을 남겨놓았다.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앉았던 자세, 자신에게 했던 말, 단어, 표정, 눈빛까지 모두 기억났다.
"자 그럼...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고... 지현."
"...네?"
"...고지현."
최면은 단계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은 듣지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허나, 차근차근 가벼운 최면부터 시작하면 가능했다. 결국은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주저 없이 손목을 가르고 목을 찔렀다.
그렇게 그녀 손에서 죽은 실험체는 오십여 구가 넘었다.
"고지현?"
발음도 어렵다. 이름인지, 어딘가의 지명인지 모를 단어였다. 에어로크라 할지라도 이런 특이한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요?"
"...부모님."
지그하르트 후작?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속이려 최면에 걸린 척 하려면 카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게 합리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에어로크 특유의 아명일까 생각하며 넘어갔다. 워낙 폐쇄성이 짙은 왕국인지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으니까.
물어볼 질문이 많았다.
걸어야 할 최면도 많이 남았다.
지난 두 달 동안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당신은 시아라라는 시녀를 사랑하나요?"
"...그렇소."
역시나.
헤일리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맞았다. 그는 인형이 아닌 연인을 위해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소중해요. 그렇죠?"
"...그렇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해줘야 해요. 그렇죠?"
"...그렇소."
그의 가치관을 계속해서 강화시켰다.
이미 박혀있는 가치관이라면 비슷한 내용을 주입하기 더 쉬웠다. 이 역시 여러 시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타국의 공작에게 화를 내는 사람.
눈앞의 남자는 앞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해줄 것이다. ...그게 만약 대륙의 통일이라도.
이제 드디어 다음 최면을 걸 차례였다.처음 걸어보는 최면이었다. 살면서 이런 최면을 걸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사실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한 명 더 있어요."
잠시 말을 멈췄다.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를 드디어 소유할 수 있게 됐다.흥분으로 벌어진 입이 살짝 떨렸다.
"...유라페스 헤일리. 당신 눈앞에 있는 여인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