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63화 (163/191)

〈 163화 〉 설득

* * *

"전우조라고 알아?"

"전우조?"

가우리 성을 찾아왔던 사절은 아침이 밝자마자 조용히 떠났다. 끝은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

아침을 먹고 두 여인을 부른 나는 둘을 나란히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한 몸이야."

"..."

"..."

"화장실을 갈 때도, 물을 마시러 갈 때도 한 몸이야."

"...화장실도?"

"그건 좀..."

"쓰읍."

설마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표정을 짓던 둘은 내가 표정을 굳히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불만인지 시아라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사실, 전우조라면 치를 떠는 건 이 셋 중에서 내가 제일이지 않을까. 쓸모도 없고 귀찮기만 한 전우조를 다시 해야 한다니, 이 말을 꺼내는 것도 꽤 용기가 필요했었다.

다만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혼자 화장실로 들어가 자살하고 싶다.'

이런 명령이라면? 만약 이런 최면이라면 전우조 말고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다시 표정을 풀며 그녀들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안심을 하기 전까진, 전우조를 유지하고 싶었다.

"불편할 거 알아. 그래도 좀만 참아줘."

"언제까지?"

"두 달?"

가우리 성에서 수도까지 한 달이 조금 안 걸렸다. 사절이 왕복하는 시간을 얼추 합치면 그 정도는 걸릴 듯싶었다.

"안 돼!!!"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듯 시아라가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살짝 휘었던 눈썹이 완전히 역팔자를 그렸다.

"나랑 언니 둘도 민망한데...! 카인까지 셋이서 화장실을...! 절대 안 돼!"

"쓰읍..."

"...그래두 안 돼..."

"그건 나도 반대야."

내가 다시 엄한 표정을 짓자 기가 죽었던 시아라는 엘라가 고개를 저으며 힘을 보태자 다시 기세등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쉬운데...

혹여나 무슨 짓을 저지를까 감시하는 건 전우조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인가. 신병에게 전우조를 붙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럼 화장실 갈 땐 귀 막을게."

"꺄악!!! 너무 싫어!"

"..."

정말 질색을 하며 시아라가 비명을 질렀다. 엘라 역시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름 배려하겠다고 꺼낸 말인데...

"그럼 코도 막을게. 대신 빨리 싸야..."

"..."

"..."

"이건 농담이었어."

싸늘했다. 방 안이 좀 추운데. 아무리 짓궂은 농담이어도 그렇지 저렇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 상처받는데...

그때 엘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화장실은 입구까지만 따라 와. 무슨 일 있으면 내가 카인을 부를게."

"같이 들어가면..."

"싫어!!!"

내 말을 자른 건 단호한 표정의 시아라였다. 우리 시아라 목청도 좋네.

결국 화장실은 입구까지만 가는 거로 합의를 봤다. 아쉽지만 이게 어딘가. 어쨌든 그녀들을 설득했다는 사실에 만족을...

"...카인 다시 봤어."

"맞아."

만족을...

­­­­­­­­­­

"파종은 시작했습니까?"

"예. 병사들을 시켜 일손을 돕게 하고 있습니다. 로그멜 경이 솔선수범하니 병사들도 잘 따릅니다."

마틴 경의 보고에 시선이 맞은 편의 마틴 경으로 향했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멋쩍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외성 출신이지 않습니까. 농사일은 자신 있습니다."

작년에 치렀던 전쟁의 여파로 가우리 영지를 비롯한 주변 영지는 식량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다행히 올해는 별일 없이 파종을 시작했지만, 수확 시기인 가을까지 버티는 게 문제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다시 마틴 경에게 돌아갔다.

"상행은 준비 중입니까?"

후작에게 받은 철광석을 내다 팔고 식량을 사올 생각이었다. 봄에 완연히 들어서며 날씨가 따듯해지고 있었기에 겨울 호수가 녹는 대로 알만 왕국으로 상행을 보낼 생각이었다.

"겨울 호수의 얼음이 대부분 녹았습니다. 며칠 안으로 뱃길이 열릴 듯합니다. 다만, 전쟁의 여파로 식량값이 여전히 비쌀 겁니다. 최대한 많이 확보해 오겠습니다."

"마틴 경만 믿겠습니다."

상행으로 떠날 철광석은 적은 양이 아니다.

내정 전반을 관리하는 마틴 경이 직접 상행을 나서는 건 아쉬웠지만, 그라면 믿을 수 있었다.

"쌍둥이 성에선 별다른 연락이 없습니까?"

"예. 평소보다 더 멀리 정찰을 나섰는데, 특이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헤일리 그녀가 동맹을 입밖으로 꺼냈지만 순순히 믿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동맹을 꺼내고 뒤로는 군대를 움직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럴만한 여자였다.

"정식으로 동맹을 맺을 때까진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부탁하세요. 그곳이 뚫리면 바로 이곳입니다."

"예."

거기까지 이야기한 나는 잠시 한숨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렵다.

주민들 간의 분쟁부터 치안, 식량, 다른 영지들 간의 문제까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마틴 경까지 빠진다면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잘 게 뻔했다.

"마틴 경. 혹시 분신술 같은 거 쓸 줄 압니까?"

"...아쉽게도 그런 건 못 배웠습니다."

실없는 농담이었는데도 그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따라 그의 다크써클이 짙었다.

"차라리 상행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니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

느긋하게 다녀오면서 쉴 생각인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아직 여러 방면으로 미숙한 나를 대신해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차마 양심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럼 빨리 오셔야 합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괜히 나를 따라왔다고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이럴 땐 참한 여자라도 만나서 연애를 하면 좀 심신이 안정될 텐데 말이다.

"마틴 경. 혹시 애인은 있습니까?"

있다고 하면 같이 보낼 생각이었다. 휴가 겸 데이트 형식으로.

그러나 내 말을 들은 그는 아까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무 바빠서 애인을 만들 시간이 없습니다."

"..."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마틴 경이 없는 동안 꼼짝없이 야근하게 생겼다.

"...좀 천천히 다녀오세요."

"...예."

­­­­­­­­­­­­

"...저를요?"

"그래."

"...잔인한 질문이라는 건아시나요."

"...그래."

야속한 시선이 흘러왔다. 담담히 찻잔을 들었다. 샬롯에겐 미안했지만, 그냥 묵혀두기엔 그녀가 아까웠다.

"...잘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한 줄기 남아있던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했을까. 뜻밖의 질문을 받는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풀어주마. 대신, 다른 영지로 가진 못해."

"..."

"감시 안에 살아야겠지."

샬롯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 간신히 묻어뒀던 아픈 과거를 끄집어냈으니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잘 생각해봐라."

찬란하게 빛나는 숫자가 보인다.

49.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고작 하녀 일을 하게 두기엔 그녀가 가진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통치력, 혹은 리더십.

내가 생각하는 능력치의 의미였다. 숫자가 높다고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대부분 숫자와 다른 능력치는 비례해 보였다.

게임에서도 a급이나 s급 장수는 가진 능력치는 전반적으로 모두 높지 않은가.

여포처럼 무력 몰빵 같은 경우만 아니라면.

"가끔은 가족들을 만나는 것도 허락해 주지. 물론 만나는 건 네 선택에 달렸겠지만."

"..."

그녀를 가신으로 채용할 생각이었다. 일에 적응만 한다면 적어도 마틴 경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리라 생각됐다.

처음엔 뷔른 영주를 직접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가우리 성을 다스리던 사람을 가신으로 등용한다는 말을 꺼내면,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설 게 뻔했다.

게다가 나 역시 최면에 걸렸던 그가 탐탁지 않았다. 결국 그 생각은 무산됐다. 때문에 그를 대신할 사람이 지금 쌍둥이 성에서 열심히 오는 중이었다.

"저를 믿으시나요?"

"...조금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은 그녀가 던진 첫 질문이었다.

"어떤 이유로요?"

"날 죽이려면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을 테니까."

"..."

독을 풀어도 되고, 밤에 찾아와도 된다. 아니면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 칼을 꺼내도 되고.

내 대답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내 진의를 파악하겠다는 듯 끊임없이 내 눈을 마주쳤다.

"진심이다. 너를 믿지 못했다면, 애초에 이곳에 부임한 날 너를 내보냈겠지."

"..."

그게 중요한 건가?

내가 그녀를 믿는 게 그녀에겐 중요한 사실일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사실대로 말했으니 됐다.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또 그 질문인가?"

나만큼 만약을 좋아하는 여자다. 모든 상상의 원천은 만약에서 나오니까.

그런데 시큰둥한 내 표정을 본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곧장 입을 열었다.

"...대답해봐요. 마음에 들면 가신 할게요."

"...뭐?"

"어서요."

뭐 이런 질문으로 결정을 해? 어이가 없었지만 표정부터 고쳤다. 이런 질문 하나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절호의 기회였다.

"대신 솔직하게 말해줘요."

의도가 묘했다.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는 조건을 붙여 어쩔 수 없는 척 가신이 되려고 하는지, 아니면 정말 망상을 좋아하는지. 어쨌든 신중히 고민을 하려는 그때,

"솔직하게 지금 나온 생각 그대로."

"뭐?"

"삼 초 안에 대답해요."

그리곤 곧바로 숫자가 흘러나왔다. 아직 제대로 생각도 못 했다.

혹시 그냥 장난을 치려는 건가? 자신에게 이런 제의를 건넸다고? 그러는 사이 그녀의 입에서 두 번째 숫자가 흘러나왔다.

"둘."

"뭐... 네가 날 좋아해서 졸졸 쫓아다녔겠지."

"...뭐라구요?"

"몰라. 그런 생각밖에 안 나."

이미 마음은 그녀가 빈정이 상해 장난친다는 생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때문에 나도 그저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그런데 반응이 영 이상했다.

화를 낼 줄 알았던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러지?"

"..."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날 바라보던 그녀가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거 혹시...

일 년 전에도 그녀가 내게 했던 질문이다.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건 샬롯 역시 이 질문에 대해 상상했었다는 말이 된다.

"날 좋아하나?"

"...미쳤나요? 당신은 제 원수에요."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화를 낼 일인가?

얼굴이 잔뜩 붉어진 그녀가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가신이 될 게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그..."

오늘따라 상태가 이상하다. 방금까지 미간에 구멍을 뚫을 것마냥 노려보더니 이번엔 또 말끝을 흐린다.

"말을 해라. 오늘따라 이상하군."

"그거!"

"뭐?"

"그 말투 좀 고치세요! 왜 저한테만 쌀쌀하게 ...읏."

내 재촉에 벌컥 화를 냈던 그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붉었던 얼굴이 더욱 빨개지기 시작했다. 귀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말투만 고쳐주면 가신이 되겠다는 건가?"

"..."

그 정도야 뭐. 앞으로 잘 지낼 사이니 하대는 안 어울리긴 하다.

"알겠어. 잘 부탁해 샬롯."

"...읏."

일부러 더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역시나,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원수라고 노려보지나 말지.

내가 예민한 건지, 얘가 둔한 건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