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공포
* * *
알현실은 떠난 내 발걸음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내가 알현실에 있었으니 별다른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엘라도 함께 있을 테니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는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몸이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
"집사장 사절들에게 방을 내주고 그 누구도 접근을 불허하네. 그들도 데려온 시종이 있을 터, 영주의 명령이라 내리고 어길시 큰 벌을 주겠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집사장에게 빠른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엘라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까 봐. 그 사이 시아라가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 봐.
주저할 틈이 없었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방문으로 다가간 나는 문을 강하게 열며 들어갔다.
"시아라!"
"...응?"
화악 하고 깊은 홍차 냄새가 흘러온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지 등받이에 편히 기댄 채 찻잔을 들고 있던 시아라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내가 누구야."
"...어?"
"내가 누구냐고!"
별 소용 없는 거 안다. 잠재의식 속에 묻어놨다면, 이런 어이없는 질문으로 최면을 깰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뭐라도 해야지.
뭐라도 해봐야지.
"카... 카인?"
"시아라 네 이름은."
"...지금 카인이 부르고 있는데."
"..."
마음이 다급했다. 평소 같았으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네가 살던 고향이 어디야. 우리 나이는."
"...왜 그래."
"대답부터 해."
미소를 짓고 있던 시아라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내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주저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그하르트 영지, 스물두 살..."
"옆에 있는 사람 이름은?"
최면을 걸었다면, 허무맹랑한 최면은 걸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 자살을 명령하거나, 남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감정을 건드릴 거라 생각했다.
"왜, 왜그래... 무서워..."
"..."
"...엘라 언니."
두 여인의 시선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흡사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
아.
혹시...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곤 떠오르는 대로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고지현, 지금은 가우리 카인. 백작, 뷔른 성, 헤르트 전쟁, 엘라는 공주, 유라페스 헤일리...
시아라가 아니라 나였을까.
혹시 내게 최면을 걸었을까.
정신이 혼란스럽다.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건지, 최면이 걸린 건지 안 걸린 건지.
"...무슨 일 있었어?"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시아라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엘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일까. 다짜고짜 이름을 묻더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미친 놈처럼 보이지 않을까.
"나에 대해서 아무거나 질문해 봐."
"..."
"어서."
그래. 나도 아니고 시아라도 아니면, 엘라에게 질문을 하자. 여기에서 유일하게 헤일리를 만나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딘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걱정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설명을 해줘."
"..."
"카인이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설명을 해줘. 내가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아니,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사절로 온 저 사람이 유라페스 공작이고 최면 능력을 쓸 줄 안다고?
그리고 그다음은?
마법적인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 그런 강력한 최면을 걸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사실은 그녀가 신의 대리자라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나도 신의 대리자니까.
난 카인이 아니라 현대에서 넘어온 고지현이라고.
내 시선이 자연스레 시아라에게 향했다. 내 모든 걸 부정해야 한다. 시아라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카인을 좋아했다.
이제 와서 그 사람은 없고 새로운 사람이 몸 안에 들어와 있다고 설명을 해야 할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했었던 그녀의 의심이 맞았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시아라가 느낄 배신감은? 충격은?
"...오늘 왔던 사절들 중에 신의 사도가 있어."
"...뭐?"
결국 또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쌓는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나 그녀들에게 대한 미안함은 나중에 느껴도 된다. 지금은... 지금은 나와 시아라에게 최면이 걸렸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 중 한 명이 강력한 최면 능력이 있어. 그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
"나와 시아라가 그녀와 대화를 나눴어. 어떤 최면을 걸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엘라 질문을 해줘."
"..."
"그리고 엘라가 아는 대답과 다르면, 그걸 계속해서 질문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시아라의 눈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최면을 걸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응."
혹시나 정말로 시아라에게 최면을 걸었다면, 주저 없이 칼을 들고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위험 요소를 다시 풀어줄 수는 없다. 차라리 모든 작위를 박탈 당하더라도, 지금 죽이는 게 편하다.
"나를 처음 만난 곳은?"
"헤르트 왕궁."
"시아라와 나의 나이 차이는?"
"두 살."
그렇게 한 여인이 질문이 던지고 두 남녀가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장장 세 시간 동안.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한 채 끝났다.
"흐윽..."
여인의 손이 다급히 물잔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도통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결국, 절반은 옆으로 흘러 붉은 드레스를 적셨다.
"어떻게... 어떻게..."
정말 즐거운 유희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이번에도 순조롭게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알만 왕국의 대리자에게 최면을 걸었을 때처럼.
"차라리 지금..."
아니야. 불가능해. 정말 죽을지 몰라.
간신히 진정돼가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최면이 걸리지 않은 사람과의 대화였다. 게다가 그 상대가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라니.
흥분으로 온몸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그 사람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 스릴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마치 맛있는 스테이크를 두고 잠시 감상하는 것처럼.
에어로크 왕국을 잡아먹는 그 순간을 싱겁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에어로크의 수도를 다녀와서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최면을 걸 생각이었다.
즐기고 즐기다가 최후에 최면을 걸 생각이었다.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됐다. 단둘이 남자마자 최면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너무 안일했다. 너무...
상대방의 대답을 알 수 없는 대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까지는 늘 똑같았다. 자신이 질문하면, 상대방은 대답했다. 대답하는 것 외엔 절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마치 인형들과 대화를 하듯. 몇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난 후 시종일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나 의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뭐라고 대답할까. 안다고 할까 아니면 모른다고 할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궁금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물론, 안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그에게 최면을 걸고 제국을 돌아갈 생각이었다. 손안에 든 보석이 도망갈 기미를 보이면 꽉 붙잡는 게 정상이니까.
'마음에 드오. 허나 지금은 공적인 자리고... 나는 그대 오빠의 원수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편하오.'
오빠 때문이라니.
그녀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었다.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이유가 나와버렸으니 말이다.
그랬구나.
오빠 때문에 나를 불편해했구나.
자신이 곧 최면에 걸릴 줄도 모르고 다른 이유로 불안에 떠는 한 마리 먹잇감을 보며 얼마나 흥분을 했었는가.
그의 신경을 더 건드리고 싶었다. 개미를 발견한 어린아이의 마음이었다.
그저 괴롭히고 싶었다. 아무 이유 없이.
어차피 최면에 걸려 인형이 될 신세다. 그 전에 어떻게 갖고 놀든 상관없지 않을까.
게다가 상대는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였다. 개미들 사이에서 여왕 개미를 발견한 기쁨이었다.
'시아라라고 했나요? 꽤 아름답던데...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시녀일까요?'
그의 소중한 인형으로 보였다. 자신이 살던 영지에서 직접 데려올 정도면 애지중지하는 인형일 것이라 생각했다.
별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다.
이번엔 뭐라고 대답할까.
인형을 망가뜨리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을 두고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흐윽!"
심장이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왜 뛰는지, 왜 말을 듣지 않는지.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그가 돌연 표정을 굳히고 다가온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두 눈이 똑똑히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그의 눈빛에서 나오는 노골적인 살기를 본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었다.
예상외였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인형이다.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흔한 인형. 자신의 주변에 널린 인형처럼 말이다.고작 인형 하나 때문에... 타국의 공작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네 오빠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나를 건드려. 비열하게 주변 사람 건들지 말고.'
그녀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껴야 했다. 죽음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어 버린 이 상황에,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그 무력감에 헤일리는 공포에 빠져버렸다.
'네가 사절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에서 죽었어.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그땐 정말 죽일 거야.'
자신도 모르게 쓸뻔한 능력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그의 손 역시 힘이 들어갔던 걸 느꼈었다.
죽을 뻔했다.
정말 죽을 뻔했어.
허무하게 목이 꺾여 죽을 뻔했다.
그 후로 이 상태였다. 처음으로 맛본 공포에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두근거리고 있었다.죽음의 문턱을 넘은 강렬한 공포에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가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기회는 한 번 더 남았다.
수도를 들려 동맹을 체결하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 그때는 그를 만나자마자 최면을 걸 생각이었다.
'외모 값을 해. 예쁜 얼굴로 왜 비열한 짓을 해.'
'뭐라고요?'
'차라리 순수한 척 유혹을 하지 그랬어. 그럼 바로 넘어갔을 텐데.'
그래요.
그렇게 유혹을 해줄게요.
자신에게 공포를 안겨준 원인이었던 그의 시녀가 떠오른다. 대리자는 그녀를 사랑한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타국의 공작을 협박할 수 있는 사람.
그게 그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 죽고 못 산다면, 원 없이 사랑하게 해줄게요.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내리며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