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경고
* * *
"유라페스 헤일리. 유라페스 공자 가문의 가주랍니다."
"다나크 제국의... 공작?"
"아마... 백작님도 잘 아실 거예요. 제 오빠를 만난 적 있으시죠?"
필사적으로, 정말 온 힘을 다해 태연함을 연기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곧 나는, 찻잔을 든 걸 후회했다. 찻잔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라페스 헤일리.
유라페스 공작 가문의 가주.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수수한 색에 가려진 천상의 미모.
그리고...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
"공작께서 직접 올 줄은 몰랐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여자는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 왔을까.
내가 대리자인 걸 알고 있을까.
지금 죽여야 할까.
"정말 중요한 사안이니까요. 다나크 제국은 정말로 에어로크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있어요."
"...공작께서 직접 말하니 믿어야겠군."
못 죽인다.
개인적으로 왔으면 모를까 사절로 왔다. 그것도 동맹을 조건으로.
내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면 왕궁과 제국 양방향에서 추궁을 받을 게 뻔했다.
"후후... 제가 유라페스 공작이라는 사실에 많이 놀랐나요?"
"조금은... 상상도 못 했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동요를 착각하고 있으니까.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하다.
내 정체를 알고 직접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정말 테레스 산맥을 넘기 전 우연히 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혹시 오빠를 죽인 원수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던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좋은 의도보다 나쁜 의도가 더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부담스러우신가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는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여행 나온 귀족 영애라 생각했소. 혹시나 내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용서를 구하오."
"후후. 괜찮아요."
"...그런데 동맹 제의가 꼭 나만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소?"
이 여자와 단둘이 있는 건 위험했다. 언제 최면에 걸릴지, 이미 걸렸는지, 아니면 최면을 걸 생각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는 그녀와 대화를 이어가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시아라와 엘라. 내가 사랑하는 여인들.
나는 집에 가야 한다.
내 이름은 카인. 이 여자는 유라페스 헤일리...
"어머... 저와 단둘이 있는 게 싫으신가요?"
"그건 아니오. 그저...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니 했던 말이오."
"...그럼 사적으로는 괜찮다는 거겠죠?"
"..."
알면서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이미 최면에 걸렸나.
자신의 오빠를 죽이고 명예를 실추시킨 원수와 사적으로 친해지고 싶다고? 의심이 확신이 됐다. 그녀는 내가 목적이었다.
그녀도 이런 사실을 모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나를 쌀쌀하게 대하는 게 옳았다.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거미줄에 묶인 벌레를 보는 거미처럼.
"...이만 사람들을 부르겠소."
더는 위험했다. 정말로 위험했다. 이미 최면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얼굴을 붉히며 숫기 없는 청년을 연기했다. 통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단둘이 있어선 안 됐다.
"흐음...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마음에 드오. 허나 지금은 공적인 자리고... 나는 그대 오빠의 원수 아니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불편하오."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등을 지고 알현실 입구를 바라봤다.
가장 좋은 건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건 내 신변이 안전할 때의 일이다.
천천히 알현실 입구로 다가갔다. 앞으로 열 걸음만 더 가면 안전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설마 최면을 걸 생각은 못 하겠지. 긴장으로 몸이 굳기 시작했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했다.
그렇게 일곱 걸음... 다시 다섯 걸음까지 남은 그 순간, 등 뒤로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제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렇게 두 걸음이 남았을 때,
"...그럼 문을 열기 전에 잠깐... 저 좀 봐주실래요?"
귓가에 직접 속삭이는 듯 그 어느 때보다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저도 모르게 몸이 돌아갈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문을 향해 다가가던 걸음 역시 멈추고 말았다.
"...왜 그러시오?"
"흐음... 저는 여기 있는걸요?"
등 뒤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안 된다.
돌아보면 안 돼.
절대 돌아보면 안 돼.
"...동맹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더는 할 이야기는 없소. 그런 중요한 안건은 국왕께서 직접 결정하시는 일이니까. 푹 쉬고 내일 떠나면 되오."
그리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을 부르려던 마음을 바꿔먹었다. 대기 중이던 스승님과 하멜 경을 포함해 모든 시종들을 물릴 생각이었다.
혹여나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렇게 알현실 입구까지 도착한 나는 손을 들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흥건하게 젖은 손바닥이 그제야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대로 나가기만 하면 안전...
"흐응... 지금 나가면 후회하실 텐데..."
"...그게 무슨 소리오?"
"시아라라고 했나요? 꽤 아름답던데...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시녀일까요?"
시아라?
그녀의 입에서 왜 시아라 이름이 나오는...
...!
내가 아니었구나.
내가 아니라 시아라였구나.
아까 화장실을 시아라를 놓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실이 떠올랐다. ...안일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대 입에서... 왜 그녀 이름이 나오는 것이오?"
문을 밀어야 할까.
아니면 몸을 돌려야 할까.
둘 중 하나를 고르더라도 나올 결과는 명백했다.
내가 최면에 걸리던가,
아니면 시아라를 포기하던가.
무슨 최면을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단순한 최면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정말 위험한 최면을 걸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결정을 빨리 내려야 했다.
"저를 바라보면 말씀드릴게요."
옅은 웃음기와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 잔인한 여자다. 거미줄에 붙잡힌 날벌레의 느낌이 이럴까.
몸을 돌려 최면에 걸리면 그대로 끝이다. 그녀가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끝. 다시는 현대로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흐응... 왜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시나요."
"...시아라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나 대답하시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갈색 머리와 갈색 눈.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까지 세세하게 보인다.
"잠깐 대화를 했을 뿐인걸요. 백작님이 잠깐 나간 사이에요. 심심했거든요."
"그게 전부요?"
"그럼요? 뭐가 더 있어야 하나요?"
여전히 싱긋거리는 얼굴에 주먹을 먹이고 싶었다. 망할 년. 날 놀린 거였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미 눈은 마주쳤다. 모르겠다. 이미 최면이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만약 이미 최면에 걸려 그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됐다면, 이성을 잃기 전에 가슴속에 쌓인 분노는 풀고 싶었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시아라를 잃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스승님에 이어 시아라까지.
주변 사람들을 잃으면서까지 구차하게 대륙을 통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대륙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떨리던 몸이 가라앉았다. 긴장이 풀린 몸은 다시 피가 돌기 시작했다. 마음을 다잡으니 편하다. 이렇게 쉬운걸.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싱긋거리면 나를 바라본다. 이 미친년.
"드디어 저와 대화할 마음이 좀 생겼..."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손가락에 눌린 볼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붕어가 된 것처럼 내게 붙잡힌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너도 사람이니 겁이 있겠지.
그녀의 얼굴을 붙잡은 손을 잡아끌었다. 등을 기대고 있던 그녀가 상체를 숙이며 내 앞으로 끌려왔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오빠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나를 건드려. 비열하게 주변 사람 건들지 말고."
"..."
"네가 사절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에서 죽었어. 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그땐 정말 죽일 거야."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두 눈이 떨리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봤기에 그 떨림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시간에 그녀의 두 눈이 살짝 붉어지더니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그래. 참아야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빠 얘기를 꺼냈으니 참아야지.
지금 능력을 쓰면 정말 죽을 거라는 거 알잖아.
수도에 들렸다가 다시 올 거잖아.
그때까지 참아야지.
천천히 손을 놓았다.
너무 강하게 잡았었는지 양 볼이 살짝 붉었다. 내게 풀려난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다시 등을 기댔다.
"외모 값을 해. 예쁜 얼굴로 왜 비열한 짓을 해. 외모 아깝게."
"...뭐라고요?"
"차라리 순수한 척 유혹을 하지 그랬어. 그럼 바로 넘어갔을 텐데."
그녀는 내가 정체를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 역시 이름을 듣기 전까지 몰랐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은 다나크 제국 어디를 가도 있는 평범한 특징이었다.
예쁜 얼굴이라는 힌트는 있었지만 설마 제국의 공작이 직접 사절로 올 줄은 몰랐다.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뭔가 덜떨어져 보이는 행동도 한몫했다.
지금 그녀의 정체를 까발리면 파국이다. 신의 대리자인 우리는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절로 왔다.
지금 당장 그녀를 죽이면 좋겠지만, 그러면 수도와 제국 양방향에서 압박이 들어올 게 뻔했다.
이제 막 영지가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그건 최악이었다. 어쩌면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모든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정말 시아라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지 확신이 없었다. 만약 정말 무슨 짓을 했을 수도 있었기에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참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분명히 수도를 들렸다 다시 올 것이다. 예상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녀에게도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일 테니까.
드디어 입을 다물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무엇보다 시아라의 상태가 궁금했다. 만약 정말로 시아라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다시 시작하리라.'
모든 걸 잃고 평민이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나크 제국은 무너뜨리리라.
힘차게 알현실 문을 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