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60화 (160/191)

〈 160화 〉 초면

* * *

"누구라 하던가?"

"다나크 제국의 사절이라 했습니다."

"...사절?"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사장의 목소리를 들은 엘라와 시아라 역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로 왔을까.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는 선전포고?

영토를 반환하라는 억지?

뭐가 됐든, 이 시기에 사절이 왔다는 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알현실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천천히 서류를 가지런히 모았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리자. 뭐가 됐든, 만전을 기해야 한다.

"엘라. 가서 스승님과 하멜 경 좀 불러줄래? 알현실로."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아직 많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 사람이 사절로 온 상대 귀족이라면 더더욱. 스승님과 하멜 경의 조언이 필요했다.

"응."

용건이 있는 건 사절이다. 굳이 내가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 이럴 때 후작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제 내가 헤쳐나가야 한다. 내 영지고, 내 성이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만약 선전포고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내 일이 아니다. 그런 내용은 수도로 향하는 것이 옳고 뷔른 성문을 두드린 사절단은 단지 쉬어가기 위해 들렸을 것이다.

영지를 돌려받기 위해 억지를 부리러 왔다면?

...그건 좀 애매했다. 수도로 가야 하는 내용인가? 아니면 개인 영지전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걸까. ...스승님은 아시겠지.

"안에 있나?"

"예. 모두 모여있습니다."

알현실을 지키는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바짝 굳은 얼굴이다. 원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는 작은 생물이 가장 먼저 눈치를 채는 법이다.

제국의 사절이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온 영지가 떠들썩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알현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젊은 여인이 한 명, 중년의 기사가 한 명, 그리고 스승님과 하멜 경. 네 명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여인?

여인이 사절로 왔다고?

고풍스러운 붉은 드레스다. 사절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운 복장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상석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왔소?"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을 물었다. 눈앞에 놓인 차는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용건만 말하라는 듯 등을 떼고 여인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남자다우시군요."

본론부터 꺼내니 당황할 만도 한데 여인은 미소를 지을 뿐 불쾌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말에는 뼈가 있었다.

성격이 급하다는 소리였다. 예상했다. 의도했으니까.

"웃으면서 볼 사이는 아닌 것 같소만."

"...어머. 피해는 저희가 봤는걸요."

"어쨌든."

그제야 손을 들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일부러 크게 한입 마셨다. 조금만 더 뜨거웠으면 다시 뱉을 뻔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다나크 제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조합이었다. 하나 특징인 건, 눈이 돌아갈 만큼 예뻤다.

어디 귀족 가문의 영애인가 본데. 어쩌다 사절단에 지원하게 됐지?

"흐음..."

두 번의 재촉에도 여인은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은은하게 짓고 있던 미소가 더 짙어졌을 뿐.

연기를 잘못하고 있나?

혹시 티가 났나?

일부러 표정을 더 굳혔다. 조금 짜증이 난 기색까지 내비치자 그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남자다운 남자가 좋아요."

"...안 궁금하오."

어디 쌍팔년도에서도 안 통할 유혹이냐고 핀잔을 주려다 간신히 참았다. 쌍팔년도가 아니라 구한말 유혹이었어도 통했을 미모 때문에.

예쁘긴 더럽게 예쁘다.

허리까지 떨어지는 긴 생머리에 가느다란 눈썹이 곱게 뻗어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매끄러운 콧날에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요염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정말 아름다운 미묘가 옅은 눈웃음을 치면 안 넘어갈 남자가 있을까.

몸매를 부각하는 붉은 드레스에 윗가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저 안에 뽕이 없다면, 엘라와 비슷한 크기는 돼 보였다.

아니, 근데 아무리 봐도 사절단이 드레스라니? 저택 밖을 처음 나와 신이 난 영애인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 단 둘이 말씀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까보다 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여전히 맺혀있는 옅은 눈웃음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되오."

"혹시 저와 단둘이 있는 게 부끄러우신가요?"

"..."

드레스를 입고 온 이유가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엔 지금까지 한 성격 급한 연기가 모두 물 건너갔다.

평소라면 헛소리 말고 용건이나 이야기하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연기 중인 성격 급한 젊은 귀족이라면...

"스승님. 하멜 경 잠시 단둘이 대화 좀 나누겠습니다."

살짝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연기하지 말걸 그랬다.

저들을 방심하게 하려다 오히려 내 발목을 잡았다.

"...근처에 있으마."

많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스승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지 마세요.

그렇게 하멜 경과 스승님, 그리고 제국에서 온 중년의 기사까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알현실을 벗어났다. 가만히 차를 마시며 기다리다가 그들이 문을 닫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이제 용건을 말씀하시오."

"후후... 백작님이 연기를 그만두면 말씀드릴게요."

"..."

등골이 오싹했다. 어디 가서 연기를 못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미 기세에서 졌다. 다시 기세를 가져와야...

"드디어 저희 둘만 남았네요."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눈꼬리가 더욱 휘었다. 정말 예쁘긴 예쁘다. 치명적인 눈웃음을 보자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엘라와 시아라를 생각했다.

결코 이 여인에게 꿇리지 않는 미모다.

그래. 내가 심장이 두근거릴 이유는 전혀 없다.

"이제 정말 용건을 말씀하시오."

마지막이라는 듯 어조에 힘을 줬다.이번에도 말을 돌리면 정말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단호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어로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요."

"..."

미친년인가.

혹시 어디 공작의 딸을 데려와 약을 먹여 보냈을까. 내가 열이 뻗쳐 죽이면 그걸 빌미로 쳐들어오려고?

"농담이 아니에요. 일단 에어로크 수도로 가 종전 협의를 할 생각이에요."

"...점령당한 영토는?"

"어쩔 수 없죠. 빼앗겼으니 인정해야죠."

정말 아쉽다는 듯 그녀가 입을 살짝 삐죽였다. 참 표정 변화가 다양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게 과하지 않았다. 마치 여배우가 연기하는 느낌.

"나는 바보가 아니오."

"후후. 저도 아니랍니다."

"둘 중 하나는 바보가 맞는 것 같은데."

"어머. 숙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상처받는답니다."

동맹이라니. 종전 협정은 그렇다 쳐도 빼앗긴 영토까지 제대로 인정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에어로크와 다나크가 동맹을 맺어서 어딜 치겠다는 거요? 설마 파딘 제국은 아닐 것이고."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

미친년 맞았다.

더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혹시 사절단이라는 말도 거짓말 아닐까.

괜히 긴장한 게 아까웠다. 어차피 내가 반응을 어떻게 하든 이들이 정말 동맹을 제의하고 싶은 거라면 수도까지 가야 한다. 물론 대차게 쫓겨나겠지만.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며 찻잔을 들었는데, 어느새 바닥이 보였다.

"차 좀 더 드시겠소?"

"그럴까요?"

엘라와 시아라를 빼고 이렇게 예쁜 여자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적당히 차 한 잔 정도의 시간 정도 더 노가리를 까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어쨌든, 예쁜 여자와의 시간은 늘 즐거우니까.

잠깐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찻병을 든 하녀가 들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아라였다.

"..."

"..."

제국의 사절 앞이다.

아무리 머리가 비어 보이는 여자라도 쓸데없이 시아라와 친한 척 할 필요는 없었다.

시아라 역시 눈치껏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차를 따랐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해서 그런가 소변이 마려웠다. 잠깐 차를 따르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잠깐 시킬 게 있어 다녀오겠소."

"예. 다녀오세요."

여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 빨리는 기분이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척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연기를 한눈에 꿰뚫어 본 걸 보면 절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국 역시 미친 게 아니라면 저런 여인을 사절로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기엔 하는 행동도 그렇고 사절단의 용건이...

그렇게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시아라가 여전히 알현실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보며 여인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정말 아름답네요. 백작님이 직접 영지에서 데려온 시녀군요?"

"...일을 잘 하오."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검은 머리카락. 오로지 에어로크에서만 볼 수 있는 머리색이었으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애매했던 문제를 확실시 할 수 있었다.

이 여자.

연기 중이다.

그게 아니라면 겨우 머리카락 색으로 배경을 유추할 수 없다.

조심스럽게 침을 한 번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연기로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려 했는데, 오히려 내가 당했다.아까 뭐 말실수는 하지 않았나? 등골이 서늘하다.

"이제 그만 가보도록."

"...예."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던 시아라를 내보냈다. 차를 다 따르고도 가만히 서 있는 게 이상했지만, 그저 타이밍을 못 잡았나 싶어 넘겼다.

알현실 밖으로 나서는 시아라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정말 환한 미소였다. 시아라와의 대화가 즐거웠나?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드렸네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보통은 서로 인사부터 하는 게 우선인데, 아까 들어오자 마자 본론부터 꺼냈으니 그녀가 눈치 챌 만도 했다.

처음 겪는 일에 너무 긴장했었나... 입이 조금 썼다.

"제 이름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알현실을 울린다. 그 부드러운 음색을 들으며 그녀의 환한 미소를 바라봤다.

"유라페스 헤일리. 유라페스 공작 가문의 가주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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