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재회
* * *
낯선 천장이다. 일 년 전만 해도 다나크 제국의 국기가 걸려있던 한쪽 벽면엔 에어로크 왕국기가 달려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가구도, 벽지와 천장을 꾸민 장식도, 밖을 내다보는 창문까지 모두 다나크 제국의 문화였다.
남의 집에 온 느낌이다.
원래 주인을 뺏고 들어앉았으니 남의 집이었긴 했지.
"잘 지냈나?"
낯선 집에서 익숙한 얼굴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평온을 가장했지만, 입술이 살짝 떨리는 건 숨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양옆으로 앉은 엘라와 시아라를 바라봤다.
호기심이 동한 듯 아주 묘한 표정이었다. 물론, 엘라와 시아라 역시 평범하지 않은 눈빛으로 샬롯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피우다 걸린 느낌일까.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잘못을 들킨 기분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그녀를 건든 적은 없었다.
조금의 터치도 한 적 없었고, 좋은 말 한 번 해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엘라와 시아라에게 굳이 샬롯에게 했던 괴롭힘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많이 친해 보이시네요."
"내 연인들이니까."
두 명의 존재를 숨길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이미 두 여인이 심각한 얼굴로 샬롯을 관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뻔한 거짓말은 글러 먹었으니까.
역시나, 샬롯의 두 눈이 조금 커지더니 붉은 눈동자가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전담 시녀들이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반응이었으니까. 전쟁의 영웅이자 신성인 백작이 시녀와 연인 관계라니, 남들의 입소문을 타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둘이나.
"카인... 무슨 관계야?"
시아라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혼란이 가득한 얼굴이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엘라 같은 전과가 있으니 새로운 연인이라 생각했을까. 그렇다기엔 나와 샬롯의 반응이 너무 삭막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하다가 최대한 담백하게 말하기로 했다. 엘라와 시아라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 성의 원래 주인 뷔른 백작의 딸. 전쟁 포로."
샬롯의 미간이 조금 움찔거렸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겠지. 자신의 집이었던 저택을 빼앗은 장본인이 눈앞에 있으니.
"내가 직접 심문을 했었어."
내 말에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작 영애에서 하녀가 된 여인. 그 여인을 심문했던 사람. 주인이 바뀐 저택.
자연히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입이 굳게 닫힐 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라와 시아라의 눈빛에 담겼던 의혹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원래 목적이었던 오해를 충분히 풀린 듯싶었고, 다만 그녀가 그때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까 걱정이 됐을 뿐이다.
고문실에 감금하고, 방안에 가둬 정보를 빼내고, 씻는 모습까지 모조리 감시했다는 내용은 굳이 두 여인에게 들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슬슬 눈치를 보니 서로에 대한 궁금증은 모두 풀렸다.
이제 그만 자리를 끝낼 생각으로 입을 열려는데, 샬롯의 입이 먼저 열렸다.
"...당신 눈에는 제가 못생겨 보일만 했네요."
"..."
"이렇게 예쁜 애인이 둘이나..."
"거기까지 해."
다급히 샬롯의 입을 막았다. 못생겨 보인다고 놀렸던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잘 마무리하다 봉변이었다.
찻잔을 들며 양 옆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여인의 눈빛은 사라진 경계 대신 흥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망했다.
"카인이 당신보고 못생겼다고 했나요?"
"제가 추워하니까 담요도 주고 고문실에서 빼주기도 했어요. 샤워도 시켜주고... 하녀를 불러 목욕시중도 들게 해줬어요."
"..."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 잘해주냐고 했더니 못생겨서 불쌍해서 그랬대요."
의아한 눈으로 샬롯에게 질문을 던졌던 엘라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오지 않던 주제가 나와버렸다. 빠르게 자리가 파하길 바랬는데, 이미 물 건너 갔다.
"엘라와 시아라 둘에 비하면 못생겼잖아."
"...어머."
대답은 둘에게 했는데 반응은 샬롯에게 나왔다. 정말 깜짝 놀란 듯 입이 살짝 벌어지기까지 했다.
"저한텐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으면서... 역시 다정한 성격이었네요."
"그만 하라고 했어."
"저거 봐. 나한테만 쌀쌀맞아."
대전에서 눈물을 펑펑 쏟던 여인이 맞나 싶다.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심기가 단단해졌는지, 내 경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전 이제 포로가 아니에요. 이 저택의 하녀라고요. 쌀쌀맞게 굴 필요는 없지 않나요?"
"..."
완벽한 정론이었기에 입이 다물어졌다. 이렇게 말을 잘했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화제 돌리기였다.
"네 영지와 신분을 뺏은 건 나야. 네가 지금 하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나 때문이고. 너와 내가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나?"
"나에게 선택권을 줬던 건 당신이에요. 그건 과거를 잊으라는 뜻 아니었나요?"
"..."
"당신이 미워요. 지금도 밉고요. 하지만 제가 이렇게 된 건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던 그때라도 저는 저택을 나와 주민들을 이끌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요."
"..."
"제 선택에 의한 결과에요. 죽을 용기도 없어 포로로 잡혔고요. 그러니 더 이상 과거 이야기는 안 꺼내셨으면 해요. 영주님."
거기까지 이야기한 샬롯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모든 과거를 청산한 듯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말을 잘할 줄 알았으면 고문이나 더 할 걸 그랬군."
"장마도 그렇고 쌍둥이 성을 점령한 것도 모두 제 정보를 토대로 전략을 세운 것 아니었나요?"
"..."
이번에도 밀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말리는 기분에 등을 의자에 기대고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고문이라고 하셔서 생각났는데, 제가 씻을 때마다..."
"그건 말 하지 마."
"...왜요?"
다급히 내가 말을 막자 샬롯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휘어지는 게 내가 두 여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는 걸 눈치챈 듯싶었다.
"말하지 말라고 했어."
다시 한번 샬롯의 입단속을 시켰다.
그건 안 된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가학적인 취미라고 오해할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요즘 엘라와 시아라가 의심하는 중인데...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흥미가 가득한 표정의 엘라가 입을 열었다.
"씻을 때... 라니요?"
망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반쯤 식어버린 붉은 홍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샬롯의 입단속을 시킬 수 있어도 언젠간 들킨다. 쓸데없는 오해가 생기느니 차라리 지금 모든 걸 밝히는 게...
"제가 씻을 때마다 욕실에 따라와서 감시했어요. 전 당연히 알몸이었고요."
"..."
...그냥 말릴걸.
모든 걸 밝힐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경악이 가득 담긴 엘라와 시아라의 눈빛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자살할까 감시한 거야. 손끝 하나 댄 적 없어."
"..."
"그리고 난 못생긴 여자 안 좋아해."
드디어 한 방 먹였다.
변명 뒤로 이어진 내 말에 잔뜩 올라갔던 샬롯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리더니 팔 자로 휘었던 눈썹이 역팔자로 돌아갔다.
"그 못생겼다는 말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사실인 걸."
덤덤한 척 대답을 하며 재빨리 양옆의 눈치를 살폈다.
예쁘다는 말이 주효했는지, 아니면 손끝 하나 안 댔다는 사실이 먹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 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잘 넘어간 듯 싶었다.
"그리고 말라서 볼 것도 없었..."
아뿔싸.
드디어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흥이 돋아 안 해도 될 말을 꺼내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손만 안 댔다는 소리네..."
오른편에서 들려오는 엘라의 싸늘한 목소리에 식은땀이 죽 흘렀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더 늦기 전에 화제를 돌려야 했다.
"...카인."
그러나 이번엔 왼편에서 들려오는 시아라의 낮은 목소리에 결국 생각하기를 멈췄다.
예쁜 여자가 씻고 있으면 눈이 돌아가는 건 남자의 본능일 뿐이다. 누굴 탓하겠나.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세 여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점점 강하게 쏠렸다. 이래서 샬롯이랑 엮이기 싫었는데.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샬롯의 반응이었다.아까보다 더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눈에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잔뜩 담겨있었다.
화를 내도 엘라나 시아라가 화를 내야지 왜 네가?
"...그땐 제대로 못 먹어서 말랐던 것 뿐이에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
"..."
사심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몸매가 빈약하다는 말에 화가 난 건가?
화를 쏟아내는 방향이 좀 이상하다.
분노에 찼단 샬롯 역시 잘못된 걸 깨달았는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곳에 장님은 없었다.
"...똑같은데."
"...이익!"
소란스러웠던 첫날이 지나고 그다음 날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겨울 내내 쌓이고 쌓였던 결재 서류였다.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뷔른 영지의 명칭을 가우리로 변경하고 마틴 경과 로그멜 경을 각각 재무부와 기사단에 배치하는 일이었다.
첫날 나를 안내했던 늙은 가신의 이름은 하멜 경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문 역할을 부여하고 스승님과 함께 직위를 옮겼다. 가진 능력이 출중해 보였기에 일선으로 물러나게 한 건 아쉬웠지만, 지나치게 기존 가신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와해시키고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멜 경 역시 이해한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재정 관리를 마틴 경에게 넘겨주고 뒤로 물러났다.
"와. 죽겠다."
마틴 경을 포함해 몇 명의 가신을 더 데리고 올 걸 그랬다. 예전 아르에나 후작과의 전투에서 들리는 마을마다 족족 가신들의 목을 베었더니, 그 여파를 지금 내가 겪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죄다 살려 놨을텐데...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의자에 기댔다.
벌써 한 시간째 서류만 들여다봤더니, 눈이 침침하다.
"카인. 힘들면 좀 쉬었다가 해."
"일로 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아라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영주가 되니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남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영주의 집무실은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니었으니 자연스레 시아라와 엘라는 굳이 옆 방에서 기다릴 필요 없이 늘 함께 있었다.
"엘라도 일로 와."
내 말에 엘라가 펜을 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무릎에 앉아있던 시아라가 한쪽으로 비키자 엘라가 남은 내 다리에 가볍게 앉았다.
의자에 앉아 두 여인을 껴안는 삶.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은 삶이 아닐까. 물론 그녀들 뒤로 보이는 산처럼 쌓인 서류가 감상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손 치워줘."
"힘이 솟는 거 같다."
"..."
눈앞에 있는 두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두 손으로 얇은 허리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힘이 펄펄 나는 게 박카스가 따로 없다.
"다리 안 아파?"
"하나도. 평생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양 허벅지에 앉는 두 여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들의 두 손이 내 등을 간질인다.
그녀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중심을 잡기 위해 손이 등으로 향했겠지만, 등을 간질이는 그 느낌에 분신이 살살 커지기 시작했다. 얘도 박카스를 먹었나.
"...문 잠그고 와."
"...뭐?"
"얼른."
산에서도 했는데 집무실이라고 안 될 게 뭐가 있나. 왼쪽에 앉은 시아라를 일으켜 세우면서 엘라의 등을 훑었다. 메이드복은 등 뒤에 리본이 있는데, 이게 참 벗기기 어려웠다.
"미쳤어?"
"빨리."
이미 버튼이 눌렸다.
엘라의 등을 훑는 손길이 점점 빨라지는 그 순간,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니, 중요한 이 시간에 어느 눈치 없는 놈이...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장의 목소리에 엘라와 시아라가 황급히 내 품에서 도망쳤다. 마치 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는 토끼같다.
두 여인을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누구라 하던가?"
"다나크 제국의 사절이라 했습니다."
"...사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