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익숙한 얼굴 (3부 시작)
* * *
"허리 아파..."
"좀 쉬다 갈까?"
"아냐. 거의 다 왔잖아."
반 죽어 가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은 시아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구름 아래로 보이는 초원 끝에 희미한 성 하나가 보였다.
"...사흘은 더 가야 할 텐데."
"..."
뛰는 것보단 걷는 게 편하다. 말을 직접 타는 것보단 마차가 편하다. 하지만, 그럴듯한 시트도, 푹신한 등받이도 없는 마차로 테레스 산맥을 넘는 건 그 자체로 고문이기도 했다.
잘 깔린 아스팔트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나마 잘 다듬어진 관도를 벗어난 이후 시작된 산길은 시아라와 엘라를 반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엘라 멀미는 좀 괜찮아 졌..."
"말... 걸지 마."
"네."
창백하게 질린 엘라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그녀가 예민할 땐 얼마나 싸늘해지는지 잘 알기에 곧바로 입을 다물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맥을 따라 이어진 내리막길 양옆으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테레스 산맥 정상에서 바라보는 그 아름다운 장관에 절로 마음이 들떴다.
"엘라, 시아라 좀 쉬었다 가자."
등 뒤에 있는 벽을 두드려 마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점심도 먹고, 휴식도 좀 취하며 꽃구경 좀 하다 가면 좋을 듯싶었다.
"...나는 점심 안 먹어도..."
"나도..."
"얼른 나와."
두 사람의 증상이 단번에 나을 치료제가 마차 밖에 있는데 안 나간다니, 말도 안 된다.
그렇게 빌빌거리는 두 여인을 붙잡고 마차를 벗어나 푹신한 잔디에 앉았다.
"...어머."
"꽃향기 너무 좋다."
거 봐. 꽃 싫어하는 여자 못 봤다.
언제 멀미를 하고 허리가 아팠냐는 듯 두 여인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엘라. 저 멀리 성 보여?"
"저기가 뷔른 성이야?"
자연스럽게 시선을 멀리 두게 유도했다. 멀미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니까.
"여기 이 테레스 산맥 정상부터 저기 뷔른 성까지, 전부 뷔른 영지야. 이제 가우리 영지구나."
가슴이 웅장해진다. 말을 타고 나흘이 걸리는 영토 크기라니. 이 땅 절반만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떼부자가 될 수 있는데.
"원래 변경백 영토라고 했지?"
"응. 거진 후작령과 비슷한 크기야. 좀 더 클 수도 있고."
"...마냥 좋은 건 아니야."
"그렇지?"
진지해지는 엘라를 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던 엘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카인도 알고 있구나."
"물론이죠. 공주님."
혼자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눈이 동그래진 시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괜찮아. 자신 있어."
"나도 카인을 믿어."
"...나도."
나와 엘라의 눈치를 살피며 시아라가 말을 이었다. 뭘 안다고 나도라고 하는 걸까. 결국 웃음이 터져 볼을 잡아당겼다.
이제 갓 성인이 지난 젊은 참모에게 하사된 뷔른 영지.
파격적인 인사로 왕실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국왕의 속마음을 파악한 사람들은 가만히 침묵했다. 꽤 노골적인 이유였으니까. 물론, 나 역시 뷔른 영지를 하사받은 그 순간 깨달았었다.
새로 점령한 지역을 지켜라.
단순한 이유였다.
쌍둥이 성을 포함 주변 영지로 가기 위한 모든 물자는 테레스 산맥을 넘어 뷔른 성을 들른다. 그 말은 즉 보급기지의 역할과 더불어 테레스 산맥 너머에 있는 모든 영토를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내 전략을 높이 평가해 가장 위험한 최전방 영지를 맡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네가 점령했으니 네가 책임져라. 라는 뜻이다.
물론 나는 자신 있었다.
"시아라. 배고파."
"그으래? 좀만 기다려!"
혼자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우울한 표정을 짓던 시아라가 고개를 휙 들더니 벌떡 일어났다. 엘라가 잘하는 일이 있고, 시아라가 잘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시녀 일은 여전히 시아라가 엘라보다 능숙했다.
"나도 갔다 올게."
"응."
엘라 역시 시아라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차림을 정리하기 위해 엉덩이를 톡톡 치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양손을 들었다.
짝!
"엄마야!"
"꺅!"
"풀이 묻어서."
웃을까 하다가 표정을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둘을 바라봤다. 역시나, 둘의 반응이 확연히 달랐다.
"..."
사과보다 더 얼굴이 빨개진 시아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물론, 떠나기 전 한 번 흘겨보는 건 잊지 않았다.
공주 타이틀을 뗀 지 아직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엘라는 엉덩이를 맞은 게 수치스러웠는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뭐하는 거야?"
"풀이 묻어서."
"..."
계속해서 뻔뻔한 표정을 지으면 더 화를 낼까 싶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살짝 쫄은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내 표정을 본 그녀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물론 카인이 장난을 좋아하는 건 알지만... 밖에서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안 좋아해..."
"미안해. ...다음엔 평소처럼 밤에 할게요 누나."
"...읏"
살짝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척 목소리도 조금 낮춰 비밀스러운 말을 하는 시늉을 하자 영락없이 은밀한 말을 건네는 꼴이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그녀는 내 행동을 보고 무언갈 깨달았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채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시아라보다 얼굴이 더 빨갛다.
이래서 장난을 못 끊는다. 여전히 남아있는 부드러운 감촉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삼 일.
삼 일만 지나면 성에 도착한다.
그때까지만 참자.
사랑하는 여인들과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생각보다 높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게 한 달이 넘는 기간이라면, 몸에 사리가 쌓이는 게 느껴진다.
잠시 후, 간단한 점심과 돗자리 등을 가져온 두 여인이 연신 나를 흘기며 다가왔다.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다음부턴 남들 있을 때 그러면 안 돼."
"알겠어.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할게."
조곤거리는 목소리로 나긋하게 타이르는 시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같은 포근함. 시아라 다운 반응이었다.
"아까 시아라 너 먼저 가고 엘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빵에 버터를 바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단정한 움직임으로 빵을 들었던 시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응? 언니가?"
"그런 건 이따 밤에 해달라던데."
우뚝.
아무렇지 않게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내 말을 들은 두 여인만 움직임이 멈췄다.
"내가 언... 제?"
"..."
"아냐. 난 그런 적 없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엘라가 시아라를 보며 열심히 변명을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한입 크게 물었다.
"카인.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맞아. 사실 거짓말이었어."
"..."
"근데 이따 밤에 엉덩이를 때릴 거라는 건 사실이야."
"..."
"..."
"빵 맛있다. 얼른 먹어."
삼 일이면 뷔른 성에 도착하는데 못 참겠다. 엉덩이를 괜히 때렸나 싶었다. 뭐, 한 번쯤 밖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고.
어쩌다 보니 식사 시간이 조용해졌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연신 내 눈치를 살피는 두 여인을 보니 다시 웃음이 터진다.
"많이 먹어."
많은 뜻이 내포된 말을 던졌다. 그제야 내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둘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제는 내가 아닌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경쟁 심리를 모른 체하며 나는 열심히 빵을 씹었다.
산 밑에 걸린 구름과 온 주변에 핀 꽃, 저 멀리 뷔른 성이 보이는 멋진 경치 속에서 먹으니 꿀맛이다. 역시 산에서 먹는 라면이 꿀맛이다. 물론 라면이 아니라 빵이었지만.
저녁 역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오늘 밤 할 일이 있었으니까.
"뷔른 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주님."
얼굴 곳곳 검버섯이 핀 늙은 노인이었다. 어깨엔 가신을 뜻하는 견장이 달려있었다. 다나크 제국의 풍습이다.
"성문을 열었던 분이군요."
"기억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지난 전쟁, 뷔른 성문을 열고 가장 먼저 나왔던 노인이었다. 뷔른 백작의 충실한 심복이라 했었나. 시민들을 선동해 성문을 연 공로가 인정돼 처벌을 받지 않은 유일한 가신이었다.
"우선 들어가시지요."
환하게 열린 성문 밖으로 마중을 나왔던 노인이 길을 비켰다. 그렇게 그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때,
"영주님이 오셨다!!!"
"만세!!!"
"가우리 백작님 만세!!!"
수많은 주민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꽃잎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길바닥을 장식했다. 형형색색의 천이 주민들의 손을 따라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가우리 백작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얼마나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는지 모르실 겁니다. 작년에 있었던 그 일이 모두 영주님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주민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환영을 해줘 다행입니다."
영주가 바뀔 때마다 치르는 요식행위일 것이다. 영주에게 좋은 인상을 박아둬야 세율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테니까.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저들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에게 난 점령국의 귀족이다.
때문에 배척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먼 여정을 오셨으니 여독이 쌓이셨을 겁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시고 내일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때마침 반가운 소리라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외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렇게 내성으로 들어갔다.역시 변경백의 성이라 그런가, 성벽의 높이도 높이였지만 그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영주님."
"예. 고생하셨습니다."
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늙은 가신을 배웅했다.
반말을 해도 무방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스승님보다 윗배다. 그런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놓기엔 한국인의 유교 유전자가 너무 강했다.
뭐, 어떤가. 내가 영주인데. 내가 편하면 그걸로 됐지.
"들어가서 쉬자. 이제."
몸에 쌓인 사리도 다 풀렸고, 남은 건 피로 뿐이다. 엘라와 시아라 역시 피곤한 얼굴로 각자의 짐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도 꽤 크네."
지그하르트 영지 못지않은 거대한 저택이다. 햐안 벽돌로 세워진 약 삼층 크기의 저택이었다.
이제 내 집이다.
한국에서도 못 이뤘던 내 집 마련이 이 세계에서 실현됐다. 그것도 삼층 짜리 대저택으로.
생명이 움트고 있는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이제야 정말 내 영지가 생긴 게 실감 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향하고 있는데, 저 멀리 늙은 시종과 여러 하녀들이 서 있었다.
여기서 일하는 집사장이랑 하녀들인가?
아직 거리가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러다 목 떨어지겠다.
그런데, 그들 사이로 아주... 익숙한 머리카락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마른 몸매부터 은빛 머리카락이 마치...
다른 의미로 심장이 빨리 뛰었다. 작년 초여름 있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마침내 하녀들 앞에 도달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 부탁대로 착한 영주님이 오셨네요."
"...샬롯?"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