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출발
* * *
세상 모든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내가 크렉스필로 엘라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소한 문제부터, 눈 앞에 펼쳐진 대인원을 보고 놀란 것까지 다양하다.
"도련님."
"..."
뷔른 성으로 떠나는 행렬은 단출하리라 생각했다.
나와 스승님, 엘라와 시아라, 디아나 남매와 두 가신까지. 고작해야 여뎗 명에 불과한 인원이기에 더욱 예상하지 못했었다.
넋이 빠진 듯 입이 헤 벌어진 시아라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후작을 바라봤다.
"...너무 많습니다."
"주민만 최소 오만에서 십만 명일 것이다. 피난을 온 주변 영주민들까지 하면 더 하겠지. 그런데도 많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계획했던 2대의 마차 뒤로 10대에 달하는 수레가 따라붙어 있었다.
철광석이 실린 수레, 여러 구황작물 종자와 식량이 담긴 수레. 동행하는 인원들의 짐이 실린 수레까지. 그저 마차 두 대에 나뉘어 뷔른 성으로 향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어쨌든 저쨌든,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때다. 싸늘한 겨울의 끝 바람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
"...조심히 가거라."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합니다."
분명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나와 후작에게 익숙한 전쟁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후작은 굳이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검보단 나이프를 들고 인사를 나누길 바랬으니까.
포옹이나 악수는 하지 않았다.
둘 다 그런 성격도 아닐 뿐더러, 그런 세계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를 보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모습을 새겼다.
"정말 가보겠습니다."
"...그래."
생긴 건 걸어 다니는 호랑이처럼 생겼는데 참 여린 사람이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하곤 몸을 돌렸다.
감회가 새롭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그 참담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왜 나일까.
굳이 왜 나였을까.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숨은 쉬고 있으니 살 방도를 찾아야지.
기억을 잃은 정신병자를 연기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겁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시아라도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시아라에게 미안한 과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귀족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으니까.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나를 기다리던 엘라와 시아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출발하자."
그렇게 4년이 흘렀다.
내 땅이 생겼다. 새로운 성도 생겼다. 영화 속, 소설 속에서나 보던 작위도 생겼다.
4년 전 그 정신병자가 귀족이 됐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4년이 흘렀지만, 그 어떤 국가도 정복하지 못했다. 백작에 만족해선 안 된다.
백작을 넘어, 후작이 되고, 혹여나 내가 왕이 된다 하더라도, 대륙을 통일하기 전까진 만족해선 안 된다.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차에 달린 작은 쪽창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칼바람이 마차 안을 헤집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쪽창을 열었다.
난생 처음 떨어진 곳이다.
한국인 고지현이 아닌 에어로크 왕국의 카인이 됐던 곳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눈에 넣고 싶었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성문까지만 배웅하겠다."
쪽창을 열어 창밖을 바라보자 마차 옆을 따라오는 후작이 보였다. 바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못내 아쉬웠을까.
그러나, 둘 다 딱히 말은 없었다.
마지막 인사는 끝났고, 그 뜻은 더이상 할 말도 없다는 뜻이니까.
거리는 한산했다. 4월이 다 와서야 산봉우리에 쌓인 눈이 다 녹는다. 지금은 2월의 끝자락이기에 주민들은 각자 집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 분 정도를 더 달린 마차가 서서히 정지했다. 외성문에 도착한 것이다. 이 성문을 넘으면, 비로소 뷔른 성으로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그때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을까. 오늘 처음으로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었다.
"뷔른 영지를 잘 다스릴 준비는 됐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잘 다스릴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겠지. 예전처럼 직접 상행은 나가지 못하겠지만, 여차하면 마틴 경을 보내면 되겠지.
무엇보다 세율은 많이 낮출 생각이었다. 4대 보험의 악랄함을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피 같은 돈을 빼앗기는 기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정 힘들면 편지를 보내거라. 내가 직접 가서 다스려줄 테니."
"...그건 좀."
"클클."
후작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처럼만 하면 주민들의 마음은 금방 얻을 것이다."
"...그럴까요."
사람 하나 없는 황량한 거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상행을 다녀온 뒤로 주민들의 식량난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 후로 내성을 나설 때마다 주민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일도 무려 4년 전이다. 감사함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몇 명의 주민들이라도 내 마지막을 배웅해주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천천히 성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던 후작이 제자리에 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인사는 잘하고 가거라."
"예?"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환하게 열린 성문을 향해 마차가 나아간다. 조금씩 멀어지는 후작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때,
"와아아아!"
"도련님!!! 저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드디어 나오셨다! 도련님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순간, 너무 깜짝 놀라 숨 쉬는 걸 잠시 잊었다.
환하게 열린 성문 밖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코끝이 빨갛다. 오래 기다렸는지 발을 동동 구르는 주민들도 보였다.
"거기 영주민들은 좋겠어. 우리 도련님이 영주로 가니까 말이야."
"암. 복 받은 거지. 에어코르에서 우리만큼 잘 사는 영지도 없지 않나?"
손을 흔드는 아이들이 보였다. 작은 쪽창 사이에 있는 모든 풍경이 주민들로 꽉 차 있었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
거리에 주민들이 없던 이유가 있었구나.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아. 조금 민망하다.
흩날리는 꽃잎도 없다. 포근한 날씨도 아니다. 모든 세상이 흰 눈으로 덮인 삭막한 풍경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잘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마차를 세우고 천천히 내려섰다. 수많은 주민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곳이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면, 이곳 사람들은 내 고향 사람들 아닐까. 마지막 인사를 하라던 후작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추운 날 저를 배웅해주시겠다고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코끝이 빨간 게 다들 한 잔씩 걸치고 나온 것 같습니다."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말투와 과장된 행동을 지었다. 여기저기서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는 이제 떠납니다. 지그하르트 카인에서 가우리 카인이 되어 이 영지를 떠납니다."
"..."
주민들의 다양한 표정이 보인다. 아쉬워하는 표정, 슬픈 표정, 아무것도 모른 채 미소짓는 아이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이 영지 사람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지그하르트 영지이며, 저는 이 영지를, 그리고 여러분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
그냥 존댓말이 하고 싶었다. 백작의 지위를 받았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도련님이고 싶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저를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언젠가 제가 이곳을 놀러 왔을 때, 평소처럼 대해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
"왜냐하면 저는 지그하르트 영지 사람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였다.
벌써 손끝이 시리다. 이 추운 날 나를 배웅해준 주민들에 대한 최대의 감사 표현이었다.
"와아아아!"
"가셔도 행복하셔야 합니다!"
진심이 잘 통했을까. 성문이 열렸을 때보다 더 큰 함성이 외성 밖을 울렸다.
"도련님! 다음에 놀러 오시면 꼭 한 번 더 들려주십쇼!"
함성을 뚫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누군가 했더니 디아나와 루크를 주웠던 그 여관 주인장이었다. 두툼한 몸짓에 더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으니 한 마리 곰 같다.
그를 향해 다가가자 그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내가 꼭 가겠네!"
"약속했습니다!"
그와 마지막 포옹을 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이제 정말 갈 차례다.
쪽창을 통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서운함을 술술 털어버려서 그런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음에도 팔이 가볍다.
서서히 멀어지는 주민들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넘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문을 닫았다.
"수많은 환송식은 봤는데 주민들이 직접 배웅을 해주는 건 처음 봤어."
꽤 놀랐는지 엘라의 눈이 동그랗다. 늘 날씨가 따듯한 헤르트 사람 아니랄까봐 시아라에 비하면 두 배는 두툼한 차림새였다.
"상행 일도 있었고... 구황 작물이나 알만에서 데려온 가축 때문에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녔거든."
나라의 근간은 백성이고, 영지의 근간은 영주민이다. 그러니 영주민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대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지만, 이곳에선 낯선 개념이었다.
물론 그런 걸 잘 알았다면 뷔른 성이 열릴 일은 없었을 것이고, 프랑스 혁명 역시 일어나지 않았겠지.
"...나는 카인이 자랑스러워."
"흠흠."
두 여인의 존경심 어린 눈빛을 받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거린다. 2왕자의 노골적인 눈빛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가장 최고는 사랑하는 여인의 눈빛 아닐까.
한창 그렇게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그때, 흥분에 사로잡혀 까먹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
"카인 무슨 일 있어?"
"...술값 안 줬네."
"응?"
두툼한 곰이 떠올랐다.
포옹까지 했는데 왜 기억이 안 났지?
...어쩔 수 있나.
술값 갚겠다고 이제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음에 놀러 오면 그때 줘야지.
...다음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