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초심
* * *
"고생했다."
"허억... 허억... 고생하셨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늘이 갈라진 듯 쏟아지는 눈에 몸이 얼 만도 한데, 뿌연 김이 올라오는 몸엔 눈꽃 하나 없었다.
팔이 후들후들 떨려 간신히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즉, 이제 이 영지를 떠날 시간이 한 달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
"예. 요즘은 하늘만 보고 있습니다."
눈이 언제 그칠까.
그나마 후작의 제자로 빙의해서 다행이지 일반 주민으로 빙의했으면 매일같이 눈을 치웠을 거다.
"...그래."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한국처럼 일 년에 두 번씩 명절마다 찾아오진 못하겠지만, 일 년에 한 번 쯤은...
"퍽이나 오겠구나."
"..."
가만히 계산해보니 왕복하는 시간만 거진 세 달이었다. 두 번만 다녀가면 반 년이 사라진다. 일 년... 아니 이 년에 한 번만 와도 되지 않을까.
할 말이 궁해져 말을 돌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에 후작의 인영이 흐려 보인다.
"저와 아버님은 또 만날 장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자마자 후작을 만날 수도 있다.
잠시 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도, 후작도 알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온 대륙이 전쟁으로 물들었다. 주신이 되기 위한 신들의 대리전이다. 유일하게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는 파딘 제국뿐이었다.
파딘 제국...
무엇을 노리는 걸까.
정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까.
'그건 아니겠지.'
파딘 제국의 대리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무슨 능력인지도,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그러나, 그저 방관만 하지 않을 것이다.
온 대륙이 전쟁에 휘말린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 테니까.
"철광석을 조금 내어주마."
조금 뜬금없는 소리였다. 한창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후작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뷔른 성과 그 주변 영지는 전쟁터였다. 기아로 굶주리는 주민들이 많을 터, 초기 자금으로 쓰거라."
"...감사합니다."
거절할만한 상황이 아닌지라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았다. 정 안 되면 후작에게 돈을 빌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다만, 거저는 아니다."
"예?"
"난 내 아들이 그렇게 뻔뻔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
그럼 그렇지.
영지의 예산이나 다름없는 철광석을 무료로 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영주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옅은 미소를 띄고 있는 후작을 바라봤다. 무엇을 대가로 원하든, 웬만하면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
뷔른 성은 직접적인 전쟁터였지만, 전투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덕분에 성벽도 온전했고, 주민들의 소모도 적었지만, 전쟁터에 휘말린 주변 영지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었다.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전화 한 통으로 아는 시대가 아니니까.
구슬의 사정거리가 한계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그저 예상만 할 뿐이었다.
부디 내 예상보다는 상황이 좋기를.
이번 겨울을 잘 버티고 있기를.
그렇기에 후작이 주겠다는 철광석을 꼭 가져가야 했다. 그래야 그걸로 식량을 사든, 농기구를 만들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대가로 어떤 것을 바라십니까?"
살짝 떨린다. 혹여나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니길 바랬다. 설마 아들인데...
그러나, 미약한 기대감을 안고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초심."
"...예?"
"초심을 지키길 바란다. 그게 내가 원하는 대가다."
"..."
"첫 상행을 나설 때를 늘 기억해라. 당장의 돈보다 네가 다스린 주민들을 생각하거라. 이건 아비가 아닌, 먼저 영주를 다스렸던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이미 식을 대로 식은 몸에 소복이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네가 다스릴 주민들은 제국민들이다. 어렵고, 낯설겠지만 늘 초심으로 그들을 대했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원래였다면 너에게 영지를 물려줄 때 했을 말이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어려워졌구나."
따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받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떳떳하게 그 눈빛을 받기엔 염치가 없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가짜 아들이 아닌 진짜 아들이 영지를 물려받게 됐으니까.
"넌 내 아들이다. 네가 기억을 잃었다 해도 내 아들이야."
"...!"
"그러니 종종 놀러 왔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나는 고개를 더욱 숙여야 했다.
연무장을 뒤덮은 흰 눈이 어찌나 하얀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만 검은 놈 같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시녀와 사이가 좋아 보였다고요?"
"...그렇소."
"흐음..."
뜻밖의 정보였다. 전담 시녀와 연인 관계라니? 생각에 빠진 여인의 손가락이 까딱거린다.
"그 말 확신할 수 있나요?"
"...확실하오."
비록 지금은 병색이 완연한 환자 꼴이지만, 처음 최면에 걸렸을 때만 하더라도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여인들과도 이런저런 교류가 많았을 터. 그의 주장엔 신빙성이 있었다.
"...보통 다른 사람들과 업무를 볼 땐 시녀를 대동하지 않소."
"그건 그렇네요."
여인의 손가락이 다시 까딱거렸다. 외부의 인사를 만나면서 부관도 아닌 전담 시녀를 곁에 둔다?
보통은 둘 중 하나였다.
생각이 짧거나, 아니면 그 정도로 연인을 소중히 하거나.
보통은 생각이 짧다 여기겠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았다.
"후후. 재밌는 정보네요."
다나크 제국을 사정 없이 압박하던 전쟁의 영웅이 사랑에는 사족을 못 쓴 다라. 한동안 예민한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오랜만에 웃음을 피웠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전에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게 몇 년 전 이야기인가요?"
"사 년... 아니, 오 년 전... 인 듯하오. 그가 상행을 나왔을 때 이야기니까..."
꽤 오래전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여인의 미간이 오므라졌다. 그 정도면 사랑이 식을만한 시기다.
"...납치는 어렵겠네요."
주변 인물을 납치하는 위험을 감수했는데 에어로크의 대리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손해였다. 다시는 똑같은 방법을 쓰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정식 부인도 아니었다. 주변 시선을 생각해 억지로 찾아올 이유마저 없다는 뜻이다.
연인이 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결혼했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추리할 수 있는 건 사랑이 식어서 헤어졌거나, 아니면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흐음..."
여인이 잠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예지를 할 때도 이렇게 술술 말하면 얼마나 좋은가. 평소엔 말만 잘하다가 예지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픽픽 쓰러졌다.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예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살이 빠지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능력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저번엔 정말로 위험했다. 무려 이 주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던 그를 간신히 살렸다. 그 때문에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예지는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인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예민한 눈빛이었다.
만약 모든 능력에 부작용이 있다면?
그저 정도의 차이일 뿐 자신도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면?
"..."
표본이 너무 적었다. 눈앞의 남자와 자신만 놓고 보자면 틀린 가설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말라갔지만, 자신은 여전히 건강했으니까.
에르딘에서 나온 성녀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볼 생각이었다. 에어로크의 카인이라는 남자를 만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가 만약 어딘가 이상하거나 건강이 안 좋다면, 부작용이 있다는 소리였다.
"..."
평소 에어로크라면 열을 내던 아레스신도 부작용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비밀이라던 카인의 능력도 이야기 해놓고 그 부분을?
여인의 의심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하일. 또 다른 정보는 없나요?"
여인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이제 이 능력 없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어려웠다. 그게 최면에 이미 걸린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한 기분이 올라온다. 그저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그랬다.
아마 안전해서 그러지 않을까.
자신의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절대 자신을 공격할 리 없으니까.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미소를 짓는 여인을 보며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뿐인 만남이었소. 연인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소."
"흐음..."
방안이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붉은 안광을 피워올리는 여인은 생각에 빠진 듯 손가락을 연신 까딱거렸고, 사내는 멍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쨌든 사랑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거네요?"
"...그렇게 보였소."
"그러면... 정말 쉬운 방법이 하나 있네요... 그렇죠?"
미소가 점점 짙어진다. 무언가 유쾌한 생각을 한 듯 여인이 마침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