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예지
* * *
"카인님!"
스승님과 시간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가던 나는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빼빼 말랐던 여자아이는 어디 가고 이젠 제법 숙녀티가 나는 여인이 서 있다.
다만...
"키는 그대로네?"
"아아! 아니에요!"
만나자마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투정을 부리더니 갑작스레 품에 쏙 들어왔다.
"봐 봐요! 조금 더 컸죠?"
그러더니 해맑은 미소로 나를 올려다본다. 겨우 가슴팍에 닿는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장에 무리가 가는지 모르고 하는 행동일까.
"아니."
"히잉..."
이제 곧 16살이면 한국 나이로 17, 18살에 해당하는 나이인데도 여전히 발랄하다. 잔뜩 경계심을 품은 새끼 고양이 같던 첫 만남에 비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래도 살은 많이 올랐네."
두 손으로 디아나의 볼을 잡고 죽 늘렸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히잉... 키는 아 크고 살만 쪄여..."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복부를 통해 느껴지는 건 딱딱한...
"너무해!!!!!!"
웃음을 참는 내 표정을 본 디아나가 품에서 휙 벗어났다. 역시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눈치도 빠르다.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큭큭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디아라가 뒷걸음질을 치며 가슴을 가렸다.
"너무해요오..."
"그래도 지금이 보기 좋아."
"...흥. 그런다고 화 안 풀려요."
아무래도 콤플렉스를 건든 듯했다. 그래도 어떡해. 이렇게 귀여운데. 복도 벽에 부딪혀 더이상 뒤로 도망갈 수 없는 디아나의 볼을 다시 붙잡고 죽 늘였다.
"해지 마여..."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었어?"
"...그럼요!"
"정말?"
볼을 붙잡힌 탓에 디아나는 내게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선명하게 빛이 나는 숫자가 눈앞에서 일렁인다.
"...정마이에여."
나를 바라보던 디아나의 눈동자가 팽그르 돌아갔다. 숫자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80.'
그대로였다. 선명하게 빛나는 숫자를 보며 생각에 빠졌다.
둘 중 하나다. 정말 디아나가 열심히 공부를 안 했거나, 재능의 한계가 끝이거나.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잘못을 하면 용서를 구하면 돼.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할 행동은 몇 개 없으니까."
"..."
"그런데 거짓말은 용서를 못 해. 한 번 끊어진 신뢰는 다시 붙일 수 없거든."
디아나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차분한 목소리와 눈동자였음에도 눈치가 빠른 그녀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를 했을 거다.
"정말 공부 열심히 했어?"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면 믿을 생각이었다.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으니까. 허나, 그녀의 재능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할 참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그녀는 발을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이려 했다.
물론, 볼을 잡히고 있었기에 실제로 숙이진 못했다. 그저 볼이 늘어났을 뿐.
"...혼자 공부하니까 재미가 업써서여... 재송해요..."
"..."
진지한 사과도 발음이 뭉개지니까 애교 같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루크를 왜 데리고 왔는지 알지?"
끄덕끄덕
"그런데... 내 기대를 져버렸지?"
...끄덕끄덕
"그럼 얼른 가서 샤워하고 와."
"...에?"
"기억 안 나? 처음 너랑 루크 데리고 올 때 했던 말."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볼이 늘어난 덕에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히히... 진짜 잡아 먹게여?"
"루크도 잡아먹을 건데?"
"..."
"농담인 줄 알았어?"
"..."
그제야 붙잡힌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마, 싸늘한 내 눈초리를 보고 더 놀랐을 거다.
"노, 농담인 거 아라요..."
"루크는 어디 있어?"
"히익...!"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젔더니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흡사 소변이 마려운 꼬마 소녀 같았다.
"겅부 열시미 할게여! 지, 진짜로...!"
"...큭."
"카잉님...?"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디아나였기에 볼 수 있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마 시아라 같은 성격이었으면 겁에 질려 엉엉 울었을 거다.
150이 조금 넘는 키에 워낙 말라 아무리 봐도 귀여운 여동생 같다. 괴롭히고 싶은 귀여운 여동생.
볼을 늘이던 손을 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살짝 힘을 줘서.
역시나, 디아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옆으로 쏙 물러났다.
"앗! 누르면 안 돼요! 키 안 커요!"
이미 늦었다니까.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놀릴 거예요?"
"그러려고 데려왔는데?"
"..."
뻔뻔한 내 표정을 본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표정 변화 참 다양하다.
이놈의 장난기는 어쩔 수가 없다.
큭큭거리며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오늘 치 분량은 다 놀렸다.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할 차례였다.
"가서 짐 싸."
"...네?"
"짐 싸라고."
"...이제 안 속아요. 흥."
"그럼 여기 있을 거야? 그럼 루크만 데려가야겠다."
더는 안 통한다는 듯 휙 돌아갔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작위를 받아서 영지가 생겼어. 그래서 이사를 할 거야."
"...정말요?"
"근데 디아나는 안 간다니까 어쩔 수 없네. 나랑 엘라랑 시아라랑 루크만 가야겠다."
하도 놀림을 받았더니 아직 헷갈린다는 듯 눈동자가 팽글팽글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또 웃음이 나왔다.
"진짜죠...?
"다음에 한번 놀러 와. 마차로 한 달만 가면 돼."
"..."
쐐기를 박는 듯한 말에 그제야 긴가민가하던 표정이 그제야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루크한테도 말해 주고. 두 달 후에 이사 갈 거야."
"네!"
저렇게 뛰어다니니 머리망이 다 풀리지. 설레는 발걸음으로 복도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디아나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스승님과 로그멜 경, 마틴 경은 해결됐고, 이제 디아나와 루크까지 끝났다.
이제 정말 갈 차례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가만히 지켜보다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이 정말 많이 내려요."
"..."
"알만 왕국은 눈이 별로 안 내리죠?"
"..."
오늘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여인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던 여인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괜찮은 수확이 있기를 바라며.
"남쪽 파딘 제국은 아예 눈이 안 내린다는데... 가보셨나요?"
어느 순간, 최면이 걸리지 않은 상대와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불안했다. 무서웠다.
혹여나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까 무서웠다.
그렇기에 오늘도 질문은 메아리가 되어 방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슬슬 대답을 들어야 할 차례다. 잠시 눈을 감은 여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갈색 눈동자를 덮은 붉은 안광이 피어오른다.
"오늘은 무슨 꿈을 꿨나요?"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달랐다.
의미 없는 꿈 이야기 일 때도 있었고, 자신이 듣기에도 예지가 확실한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붉은 여인은 오랜만에 유용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란 꽃밭... 검은 머리의 남자가 마차를 타고... 카인이군. ......내 친구."
"더 이야기해보세요."
붉은 안광이 더 크게 피어올랐다. 화려한 금발을 가진 남자는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북쪽으로... 산맥을 넘어... 높은 성."
카인이라는 남자가 북쪽에 있는 산맥을 넘어 성으로 간다.
"뷔른 성이군요."
"..."
작위를 받고 영주가 됐구나.
꽃이 피는 봄에 뷔른 성으로 향한다는 걸까.
여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 정말 유용한 정보였다.
"에어로크 남부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알아서 다가와 주네요."
지금까지 구상했던 모든 작전을 폐기했다. 그와 동시에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 떠올랐다.
신변의 위협은 전혀 없으면서, 확실하게 그를 사로잡을 방법.
"정말 고마워요. 미하일."
"..."
예전의 그 총기 넘치던 사내는 사라졌다. 헝클어진 금발과 덥수룩한 수염, 피골이 상접한 볼품없는 모습은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예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때, 끝난 줄 알았던 미하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에어로크 제국... 알만 왕국이... 우리 왕국..."
"그게 무슨 말인가요?"
"파딘 제국이 드디어..."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 체력이 다해간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거지?
여인의 미간이 가늘게 모였다. 무엇보다 에어로크 제국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에어로크 왕국도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지금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처럼.
알만에 이어 에어로크까지. 다나크 제국까지 더해지면 대륙 북서부와 중앙이 전부 자신의 손에 놓인다.
그런데 에어로크 제국이라니? 말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던 사고는 갑작스레 들려온 사내의 말에 뚝 끊기고 말았다.
"다나크 제국의 멸망... 너는..."
"저 말인가요? 저요? 저는 어떻게 되나요?"
"..."
등줄기를 스치는 소름에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나크 제국의 멸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나는, 나는 왜 불렀는가.
"다시 말해봐요. 어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붉은 안광이 줄기처럼 뿜어나왔다. 방안이 붉게 물든다. 금발의 사내는 멍하니 그 빛을 보고 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다나크 제국이 멸망... 카인이... 너를..."
점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느릿하게 말을 끄집어내던 사내의 고개가 결국 푹 떨어졌다.
"저를! 저를 어떻게 한다고요!"
"..."
그러나, 이미 정신을 잃는 사내는 반응이 없었다. 이게 단점이었다. 예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내의 건강이 악화됐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신관을 불러 치료를 받게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말을 하라고!!!!"
결국, 참을성을 잃은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에어로크 제국이라니, 파딘 제국이 움직이는 건 뭐고 다나크 제국이 멸망한다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게다가 카인이라는 자가 나를 어떻게 한다는 건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불길한 예지였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건가. 어떤 미래를 봤길래 이런 말을 내뱉은 건가.
에어로크 대리자의 위치를 알아내며 기분 좋게 시작한 예지가 저주로 끝이 났다.
"미하일!!!!!"
계획은 취소다. 눈앞의 사내처럼 카인이라는 자도 최면을 걸어 데려오려 했다. 그렇게 모든 국가의 대리자들을 수집하려 했다.
모든 작전을 뒤집고 새로 짜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예지대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다나크 제국의 수도, 그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을 자랑하는 유라페스 공작가 저택 최상층 창문에서 연신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몇 시간 동안이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