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54화 (154/191)

〈 154화 〉 우리가 남인가

* * *

"배, 백작님?"

"그래."

"..."

"앞으로 백작님이라 부르거라."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근엄한 얼굴을 지었다. 넋이 빠진 시아라가 입이 헤 벌어졌다. 눈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

"영지도 받았어?"

"어허. 어디 귀족에게 반말을 하는가?"

"...영지도 받으셨나요?"

내 말에 엘라가 웃음을 지으며 맞춰줬다. 자랑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읽은 것이다. 역시 속이 깊은 여자다.

시아라 만큼은 아니지만 엘라 역시 한참 눈물을 흘린 지라 눈가가 붉었다.

"당연하지 않느냐? 이 영지와 맞먹는 크기이느라."

"그런 말투는 너무 할아버지 같은데..."

"..."

"그리고 난 원래 공주였는걸?"

그 말과 함께 엘라가 허리를 꼿꼿이 피고 얼굴을 굳혔다. 그 자체만으로 방의 분위기가 뒤집혔다.

"수고했어요. 백작."

"...예."

고고한 표정. 싸늘한 눈매와 모든 걸 내려다보는 눈빛. 엘라를 처음 만났던 날 봤던 그 위압감에 절로 존댓말이 나갔다.

...역시 태생이 다르다.

그때, 드디어 넋이 돌아온 시아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우리 다른 영지로 가는 거야?"

"그렇지? 근데 바로는 못 가. 겨울이 끝나갈 때쯤 갈 거야."

여기서 뷔른 성까지 한 달이 넘는 거리다. 게다가 쏟아지는 눈으로 테레스 산맥이 막혔을 것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휴식도 좀 취하고 짐도 싸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백작. 영지를 옮기는 인원은 어떻게 되죠?"

"그러니까 그게..."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다 멈칫했다. 이 여자, 연기를 너무 잘한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원래 모습인가?

"...우리 셋이랑 디아나 루크, 스승님까지? 아, 엘라가 데려온 시녀 둘 있지? 걔네들도."

"율레인이랑 헤리스도?"

"응. 반대는 안 하실 거야. 여기에 엘라 너 말고 아는 사람들도 없고."

마틴 경이나 로그멜 경까지 같이 가면 좋은데...

둘 다 쓸만한 인재였다. 특히나 로그멜 경은 나이에 비해 실력도 좋고 눈치도 좋았다.

마틴 경을 영지 관리 쪽으로 두고 로그멜 경을 군사 쪽으로 두면 딱 좋았다.

다만, 둘 다 이곳이 고향인 만큼 나를 따라가느냐가 문제였다.

특히 로그멜 경은 어떤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더더욱 가능성이 낮았...

...

...잠깐만.

"엘라."

"응?"

"율레인이랑 헤리스라고 했나?"

"응. 왜? 같이 가는 건 좀 어려울까...?"

"아니, 안 될 리가. 무조건 데려가야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엘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레 웃음이 터졌다.

"대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부탁?"

아주 좋은 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올가미가.

­­­­­­­­­­

"여기서 자네를 볼 줄은 몰랐군."

"도련... 백작님..."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로그멜 경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얼굴이 불콰한 게 술 꽤나 들어간 듯싶었다.

"무슨 일인데 혼자 청승인가."

자연스럽게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카운터를 보던 주인장이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길래 손을 흔들었다.

'61'

여전히 높은 숫자였다.

디아나와 루크를 주웠던 그 식당 겸 여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일도 벌써 이 년이 다 되어간다.

"...아닙니다."

"왜 그러나. 말해보게.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그럼 특별한 사이인가? 로그멜 경이 잠깐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왜, 혹시 고백을 차였나?"

우뚝

내 말에 술잔을 들던 그의 손이 멈췄다. 순박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보이십니까?"

"그냥 눈치였네."

물론 내가 로그멜 경을 찾은 건 구슬의 힘이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그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전쟁터에서 사정없이 제국군의 목을 따던 그 기사가 맞나 싶을 정도다.

"후우... 맞습니다."

"이런, 자네만 좋아했던 거 아닌가?"

한숨을 푹 쉬던 로그멜 경이 내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절대 아닙니다! 분명 전쟁을 가기 전에도 조심히 다녀오라고 제게 손수건까지 줬었습니다! ...그런데."

손수건을 건네주는 사이라... 그 정도면 폐쇄적인 이 세상 가치관 상 거진 연인 관계였다.

"혹시 이유를 이야기해 주던가?"

"...아니요. 안 해줬습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연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주인장을 향해 맥주잔을 두드렸다.

"으음... 자네 율레인이 어쩌다 시녀로 들어갔는지는 아는가?"

"...아뇨. 그저 헤르트에서만 왔다고 들었습니다."

"크흐."

칼 같이 나온 맥주잔을 들어 올리자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때렸다. 현대의 부드러운 맥주에 비하면 거칠기 짝이 없지만, 이것도 몇 년째 먹다 보니 나름의 맛이 있었다.

"나는 알고 있네."

"...예?"

바닥을 바라보던 그의 고개가 휙 올라왔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내 전담 시녀 중 엘라라고 아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환한 금발을 가진 시녀... 아닙니까?"

역시 그렇게 기억할 줄 알았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금발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까.

"율레인이 엘라의 친구네. 소꿉친구지. 그래서 엘라가 나를 따라 뷔른 성으로 가게 됐는데..."

"..."

"무슨 말인지 알겠나? 율레인과 헤리스도 함께 가기로 했다네. 엘라를 따라서."

다시 맥주잔을 들이켰다. 캬. 쓰긴 쓰다. 마지막 한입까지 모두 마신 나는 가만히 맥주잔을 내려봤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미끼는 모두 뿌렸다.

이제 물기만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가 무조건 물리라 예상했다.

"저, 저도... 뷔른 성으로..."

역시나.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거절이었다.

"안 되네."

"..."

"자네는 지그하르트 영지 소속이야. 아버님께 충성 서약을 맺지 않았는가?"

내 말에 그가 절망적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붉어졌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자, 그럼 다시 미끼를 던질 차례다.

비어버린 술잔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안쓰러워 보이는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 뭡니까?"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 맥주잔을 들어 다시 두들겼다.

이곳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주인장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안으로 사라지더니 곧이어 새로운 잔을 들고 나타났다.

"크으."

"...백작님..."

어지간히 안달이 났나 보다. 목을 때리는 청량감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법은 간단하네. 내게 충성 서약을 하면 되지. 물론 아버님께는 내게 말씀드리겠네."

"..."

"그러면 자네도 뷔른 성으로 함께 갈 수 있어. 준 남작이니 내가 집도 하나 구해주겠네. 우리가 보통 사인가?"

아쉬운 놈이 약점을 드러내는 법이다.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한 사람이 을에 위치에 서는 건 어느 상황이나 똑같다.

그것이 사랑이든, 정치든, 협상 테이블이든.

이번 전쟁 내내 내게 시달렸다. 물론 덕분에 준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위험하기 짝이 없던 내 작전에 학을 뗐을 것이다.

때문에 내가 먼저 그를 꼬셨다면, 무조건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분명 충성 서약으로 딴지를 걸었겠지.

물론 율레인을 미끼로 꼬셨다면 넘어왔겠지만, 그를 앞으로도 수월하게 부려먹으려면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남인가?"

"백작님...!"

아아. 이것이 K­친목이라는 것이다.

감동을 받은 듯 두 눈이 커다래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젠 근거를 들이밀 차례다.

"자네도 내가 시아라와 연인 관계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건..."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거사를 치르기 전 방문을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끄집어내면 상대방은 더욱더 믿을 수밖에 없다.설마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니.

"뭐... 그래서 동질감이라고 하면 되겠는가? 아무튼 그런 기분이라네. 남 일 같지 않아서 말이야. 자네의 능력이 탐나기도 했고."

"..."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이제 그만 마실 때가 됐다. 칼바람을 뚫고 내성까지 들어가려면 한세월이다.마지막으로 맥주잔을 들어 올려 바닥까지 싹싹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그멜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해보고 내일 아침에 찾아오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식당을 벗어났다. 내성이 보일 때쯤이 돼서야 계산을 안 하고 왔다는 게 생각났지만,그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엄두가 도저히 안 났다. 뭐 어떤가. 우리가 남도 아니고. 다음에 갚으면 되겠지.

그리고 당연하게도 다음 날 아침 로그멜 경이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멀끔한 복장을 입은 그를 껴안으며 짙은 웃음을 지었다.

"잘 선택했네."

앞으로 나와 많은 일을 할 거다.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로그멜 경을 손에 넣은 나는 그 길로 마틴 경을 찾아가 설득을 했다. 물론, 이번엔 내가 먼저 아쉬운 소리를 했기에 괜찮은 집과 임금을 약속해야만 했다.

"됐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으며 두 손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계획대로 영지의 관리와 재정은 마틴 경에게 맡기고 군사는 로그멜 경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응?"

홍차를 우리던 시아라가 내 혼잣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으...응? 애?"

왜? 라고 하고 싶었던 걸까. 갑작스레 볼이 잡힌 시아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여워서."

"흐흥... 하디 마."

좋으면 좋다고 하지 웃으면서 하지 말라는 건 뭐야. 오랜만에 만진 볼이 너무 부드러워 죽죽 늘렸다.

"흐지 마라니까..."

"싫어."

오랜만에 스킨십 때문인지 시아라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고 참았던 욕구가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니다. 아직 아침이다. 이따 밤에 해도...

"백작. ...나는 볼 늘리는 거 좋아...해요."

자연스레 고개가 홱 돌아갔다. 말해 놓고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엘라가 시선을 피했다.

"...안 되겠다."

"응?"

"뭐를... 말인가요?"

방문으로 곧장 걸어가 확실하게 문을 잠갔다. 닫힌 창문도 다시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두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모습일 거다. 내가 늘 밤마다 하던 행동이었으니까.

"카, 카인 아직 아침인..."

"백작. 아직 아침... 이에요."

뭐 어때. 불 끄고 커튼 치면 밤이지.

웃옷을 풀며 시아라를 들어 침대로 던졌다. 꺄악 하는 시아라의 비명을 들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엘라에게 다가갔다.

"카, 카인...?"

한동안 공주 놀이를 하더니 어지간히 당황했나 보다. 도도하던 표정이 무너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바지를 벗었다.

"빨아."

그렇게 공주에서 시녀로 돌아온 여인은 천천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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