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53화 (153/191)

〈 153화 〉 일등 공신

* * *

"자네가 카인이군."

깊은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생각보다 젊은 나이였다. 기껏해야 마흔 중반은 됐을까. 무심한 눈매를 한 남자였다.

대전은 단출했다. 옆 나라 알만은 같은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제국들 못지 않은 화려한 왕성이라 들었다.

몇 계단 위에 있는 왕좌. 그 뒤를 장식하는 녹색 깃발과 검은 독수리 문양. 에어로크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국왕을 뵙게 돼 일생의 영광입니다."

대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은 귀족들은 나를 보며 눈을 빛냈고, 늙은 귀족들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개선식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은 정확했다.

"리안에게 편지를 받았네. 모든 작전이 자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왕자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습니다. 모두 저를 믿어주신 왕자님 덕이었습니다."

내 말에 곁에서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있던 2왕자가 안도의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정말 내가 모른 체 할까 봐 걱정됐나 보지?

양심이 있지 훗날은 몰라도 당장 이 자리에서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었다.

"으음..."

대전의 분위기가 살살 이상해졌다.

국왕 역시 무언가 깨달은 듯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왕세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다른 왕자가 힘을 얻는 건 그리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의 영웅이 2왕자와 친해졌다. 노골적으로 서로를 띄우며 추켜세운다.

나와 왕자의 의도가 어떻든 왕에겐 머리 아픈 상황이겠지.

"영특한 아들을 둬 자랑스럽겠소. 지그하르트 후작."

당연하게도 왕이 대화를 돌렸다.

평생을 귀족들과 한솥밥을 먹은 짬이 어디 가지는 않았는지 노련한 대처였다.

그리고, 왕의 기대 답게 후작은 노련하게 받았다.

"마음 같아선 영지에 꽁꽁 묶어놓고 싶습니다."

분가를 시키기 아깝다는 소리였다.

후작의 익살에 여기저기 보이던 불안한 눈초리가 단번에 사라졌다. 왕 역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경의 농담도 오랜만이오."

"저는 진심만을 이야기했습니다."

"큭큭큭."

노골적으로 말을 돌린 국왕을 후작이 도왔다.

왕세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왕의 뜻엔 동의한 것이다.

나 역시 승전을 축하하는 개선식에서 굳이 복잡한 주제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그저 이번 전쟁 내내 내 뒤를 봐준 2왕자에 대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훗날 2왕자가 내게 힘을 보태달라고 한다면... 글쎄, 대륙을 통일하기도 바쁜데 내전이라?

제 살 파먹기밖에 안 된다.

내 말 한마디로 2왕자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갈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해준 것뿐이다.

그렇게 대전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왕은 곧이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대전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 역시 긴장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개선식의 중요한 이벤트가.

"지그하르트 카인은 앞으로 나오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쏠린다.

논공행상이 공정하지 못하면 군신간의 신뢰는 떨어지고, 귀족 간에 암투가 싹튼다. 결국 큰 분란을 초래하게 된다.

일등 공신이 어떤 보상을 받느냐에 따라 이등 공신, 삼등 공신이 받을 보상도 예측이 가능해진다.

더군다나 이번 전쟁은 에어로크 왕국과 맞먹는 영토를 점령했다. 단번에 왕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 말은 즉 새로운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귀족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신흥 귀족의 탄생을 뜻했다.

국왕이 서 있는 왕좌의 바로 앞 계단까지 걸어간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직접 재연하고 있다.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의 장남 지그하르트 카인. 다나크 제국 전쟁에 참모로 출전하여 테레스 산맥 전투, 뷔른 성 전투, 쌍둥이 성 전투에 모두 참전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왕의 옆에 서 있던 신하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듣고 보니 참 많이도 싸웠다.

"특히 뷔른 성과 쌍둥이 성을 그 어떤 피해도 없이 점령한 건 그의 총명이 드러나는 일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능히 십만 대군을 살렸다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얼굴에 금칠을 하니 얼굴이 영 간지러웠다.

남들 앞에서 자랑질 잘 못 하고 칭찬에 민망해하는 것. 한국인 종특 아니겠는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바, 그의 능력과 공적을 모두 고려하여 지그하르트 카인에게..."

꿀꺽

넓은 대전이 조용해졌다.

작은 소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숨죽인 시선이 두루마리를 바라보는 신하를 향한다.

"...뷔른 성과 그 일대 영지를 하사하며, 백작의 작위를 수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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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크흠."

"...백작님."

"말하게."

"..."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로그멜 경의 입가가 움찔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다시 그를 재촉했다.

"로그멜 준 남작. 할 말이 있나?"

"...흠흠."

그제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쟁을 나섰던 도련님과 기사가 백작과 준 남작이 되어 영지로 돌아간다.

삼등 공신이 되어 준 남작은 수여받은 로그멜 경은 아직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 준 남작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방금도 내가 작위를 빼먹고 불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저 봐라. 헤벌쭉한 얼굴을.

"그나저나... 새로 수여받으신 성의 뜻이 뭡니까?"

"무슨 성?"

"...가우리 백작님?"

"크흠. 왜 부르나 로그멜 준 남작?"

'원하는 성이 있나?'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고 난 후 왕이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이제부터 난 지그하르트 카인이 아니다.

새로운 성의 시조가 된다.

원래의 성을 따 '고'로 할까 했다가 말았다. 고 카인. 어감이 지랄 맞은 건 둘째 치고 남들이 제대로 발음조차 못 할 게 당연했다.

혹시라도 누가 억센 발음으로 나를 부르면 칼로 내려칠 것 같았다.

수많은 성이 생각났다. 꽤 그럴듯한 이름도.

라인하르트.

에드먼드.

비스마르크.

작센.

그럴듯한 성은 참 많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지그하르트 후작의 이름은 지그멜이다. 지그하르트 지그멜.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지그멜이라 부르지 않는다. 후작 또는 지그하르트 후작이라 부른다.

카인이라는 이름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냥 눈을 떴을 때부터 카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성마저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불릴 이름을 애드먼드나 작센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작센 백작님.

에드먼드 백작님.

낯설었다.

'가우리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택했던 성은 가우리였다. 부르기도 쉬웠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단어였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받아서 라는 원대한 뜻은 없었다.

그저, 이 세계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거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혹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내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오글거렸지만, 진심이었다.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뜻이네."

"...처음 들어보는 단어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를 만 하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겐 여전히 카인이라 불릴 것이다. 후작도 평소엔 영주님, 혹은 후작님이라 불리지 않는가.

엘라와 시아라 역시 나를 보고 카인이라 할 것이고, 나도 카인이라 불리고 싶었다.

"그냥 지금처럼 백작님이라 부르면 되네."

"그것도 그것대로 어색합니다."

"그럼 나도 자네를 그냥 로그멜 경이라 부르고."

"흠흠."

그건 절대 안 된다는 듯 그가 헛기침을 했다.

하긴, 목숨을 걸고 작위를 얻었는데 그냥 이름으로 불리고 싶겠는가.

귀족 대우를 받는 준 남작이나 법적으로는 평민인 그는 성을 하사받지 않았으니 준 남작이라는 칭호가 더 소중할 것이다.

그렇게 로그멜 경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벌써 사흘째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이렇게 영지가 높이 있었나. 매일 같이 이곳에 살 때는 몰랐는데,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네팔이라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할 때쯤 저 멀리 하얀 고성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로그멜 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10월 초에 쌍둥이 성에서 출발해 11월 중순이 돼서야 도착했다.

여기저기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오래 걸렸다.

행렬의 속도가 자연스럽게 조금 더 빨라졌다. 나 역시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보며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벌써 사 년이 지나는 지금, 이 영지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만의 방이 있고, 익숙한 사람들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속도를 높여라! 해가 지기 전에 성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후작의 목소리가 행렬에 퍼졌다. 사흘 내내 산을 타느라 힘이 빠졌을 만도 한데, 병사들은 묵묵히 발걸음을 빨리했다.

"후작님이 돌아오셨다!!!"

"와아아아!"

성 주변에 살던 주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성벽에 서 있던 병사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와아아아!"

살아남은 병사들이 손을 흔들었다. 가족을 발견한 병사들은 고함을 질렀다.

"아들!!!"

"저 왔어요!!!"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성을 향해 걸어갔다. 주먹만 했던 성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이 세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활짝 열린 성문 안에는,

"엘라! 시아라!"

익숙한 모습의 두 여인이 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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