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52화 (152/191)

〈 152화 〉 개선식 (2부 끝)

* * *

"...휴전 문서에 네 이름이 쓰여있었다."

"제 이름이요?"

찻잔을 들던 손이 멈칫했다. 내 이름이 휴전 문서에 왜 쓰여 있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혹시 농담하신 겁니까?"

"..."

농담이 아니구나. 허공에 떠 있던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미지근한 홍차가 입안을 돌며 쌉싸름한 맛을 퍼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며 스승님을 바라봤다.

"뭐라고 쓰여있었습니까?"

워낙에 제국을 뒤집어 놓긴 했다.

겉으로는 스승님과 함께 전략을 짰다고 발표했지만, 4국 동맹을 결성해 다나크 제국을 공격한 건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거였다.

그러나, 내 대답에도 스승님은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묘한 표정, 분노와 기쁨이 섞인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를 죽이면 점령한 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다고 했습니까?"

"이것도 눈치로 쳐야 하는 게냐?"

"이건 그냥 감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했는데 실패했다.

얼마나 죽이고 싶은 거야.

"죽이는 건 아니었고 너를 보내라 하더구나. 대신 지금까지 점령한 쌍둥이 성까지 공식으로 영토를 인정해주겠다고."

"죽는 위치만 달라지는 거네요."

"그렇지."

그제야 스승님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뻔뻔한 제국의 요구에 분노했던 것이고, 그 정도로 내가 컸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보내실 건가요?"

"미쳤느냐? 왕자님께서 크게 노하셨었지. 네가 있었으면 민망해서 얼굴도 못 들었을 것이다."

"다행이네요."

혹여나 영토에 혹해서 머리를 자르자는 소리가 나오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2왕자다. 물론, 나를 질투하던 몇몇 놈들은 아쉬움에 손을 비비고 있을 거다.

"복귀는 언제부터입니까?"

"사흘 후에 뷔른 성으로 돌아간다. 여긴 약 삼만 명의 병사가 주둔할 계획이다."

"적당하네요."

그 이상은 식량 수급에 차질이 생긴다. 각각 만 오천의 병력으로 두 성을 관리할 것이다. 더불어 주변 영지까지.

"뷔른 성은요?"

"그곳도 삼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점령한 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얼마나의 병력이 필요한지는 잘 몰랐다. 그저 그럴듯한 숫자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뿐이다.

"...많이 죽었습니다."

"..."

꽃이 피는 날, 22만의 왕국군이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지금, 고작 8만의 병력이 돌아간다.

이곳에 남을 6만의 병사가 있긴 하지만, 그걸 계산해도 너무나 큰 피해였다.

슈티엔 후작...

처참했던 마지막 전투가 떠오른다.

아무런 전략도, 전술도 없이 죽고 죽이는 대학살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내 왼팔과 옆구리에 남았다.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다.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함은 옳지만, 나는 앞을 보며 걸어야 하는 사람이다.

"디아나와 루크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루크라."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의외였다. 루크보다 디아나를 더 예뻐하시길래 당연히 디아나를 먼저 떠올리실 줄 알았는데.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스승님을 보며 말을 아꼈다.

이 세상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총명한 아이들이니 잘하고 있을 게다. 아마 지금쯤이면 디아나가 루크를 이기지 않았겠느냐."

크렉스필 이야기였다.

분명 능력치는 디아나가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매번 루크한테 지곤 했다.

"그러게요. 일 년 동안 허투루 보냈으면 가서 혼내줘야죠."

"알 방법은 있느냐?"

숫자로 보면 다 나옵니다.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내 표정을 본 스승님 역시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럼요."

대답과 함께 천천히 몸을 숙였다.

책상 밑에 있는 크렉스필이 손끝에 걸려 천천히 한 손으로 빼냈다.

"오랜만에 한판 하시겠습니까?"

"클클. 좋지."

손이 살짝 떨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심장이 떨려왔다.

여기까지 티 나지 않게 잘 유도한 듯싶었다.

"제가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십쇼."

"소원? 바라는 게 있느냐?"

"지금은 비밀입니다."

싱거운 녀석이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나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번 이상 스승님과 크렉스필을 두자.

영지로 돌아가도 매일 스승님과 시간을 보내자.

이별이 있기에 현재가 즐겁다 했었나.그래. 그러면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 얼마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자.

"...많이 늘었구나."

"이제 엘라는 이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다."

"..."

내가 실력이 는 걸까.

아니면 스승님이.

조용한 방에서 기물이 움직이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가끔가다 오가는 잔잔한 대화 속에서 나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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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립니다."

누가 에어로크 왕국 아니랄까 봐 10월의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내 말에 옆에 있던 후작의 고개도 하늘을 향했다.

"영지도 눈이 오고 있을까요?"

"아마 오지 않겠느냐."

테레스 산맥을 통과하는 도중이었다.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는 걸 본 병사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저게 맞지.

저 반응이 진짜 참된 군인이지.

자연스레 진군속도가 빨라졌다. 해가 지기 전에 산맥을 넘어 숙영지를 펴야 한다. 땅이 얼어 안 그래도 막사를 펴기 어려운 상황에 눈까지 왔으니 병사들의 표정이 썩을 만도 했다.

"그나저나 수도로 갈 줄은 몰랐습니다."

"수십 년 만에 열린 개선식이라는구나."

애초에 폐쇄적인 에어로크 왕국이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한 것 자체가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전쟁의 상처를 입은 나라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축제를 여는 일이다.

왕국에 버금가는 거대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봤다. 그것이 수십 년 만의 전쟁과 겹쳐 어마어마한 축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님을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예전 헤르트 원정을 떠나기 전 수도에 들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땐 아무런 작위도, 지위도 없었기에 알현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자연히 마음이 들떴다.

하루빨리 영지로 돌아가 엘라와 시아라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그때 나를 보던 후작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쩌면... 작위를 받을지도 모르겠구나."

"...예?"

"개선식과 논공행상은 자연히 따라오니 말이다. 너도 예상하지 않았느냐?"

"..."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후작의 말대로 작위를 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작위를?

정말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문제였다. 아니, 문제라고 해야 할까. 작위를 받으니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평범했던 내가 귀족이 된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이었던 내게 어색한 일이었다.

자연스레 심장이 더욱더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제가 만약 작위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가 하는 거지."

"..."

"너는 네 가문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지그하르트 가문은 네 동생이 물려받겠지."

갑작스러운 말에 잠깐 생각이 멈췄다. 전혀 생각 안 하고 있던 문제였다. 작위부터 분가까지.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봤다. 그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작위를 받는다고 해서 남이 되는 게 아니다. 너는 여전히 지그하르트 가문의 장남이고, 내 아들이다."

"당연합니다."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굳이 정리해가며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고, 당연한 생각이었다.

내 대답에 후작이 웃음을 지었다. 대견함과 섭섭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내 눈에도 아쉬움이 담겨있을까.

"가자마자 할 일이 많겠군요."

"그렇겠지."

눈이 점점 쌓인다. 병사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십 분 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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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겨울이 오면 맑은 날보다 눈이 오는 날이 더 많은 에어로크 왕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날씨였다.

"와아아아아!"

아이들이 보인다.

부모 손을 잡은 아이들이 반짝거리는 눈을 빛내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문마다, 거리마다 화려한 장식물이 꾸며져 있었다. 한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거리는 열기로 가득했다.

"와아아아아!"

자연스레 헤르트 원정이 떠올랐다. 그때는 엘라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헤르트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서 있는 위치였다. 그땐 후작과 헤르트의 대장군을 뒤를 쫓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게."

2왕자의 말에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거리에 있던 주민들이 더 크게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에어로크 폰 리안 왕자님 만세!!!"

"카인 참모님 만세!!!"

왕자와 함께 개선식의 가장 선두를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군. 이런 경험이 있었나?"

"헤르트에서 한 번 있었습니다."

"원정을 갔을 때 말인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도 능숙하게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역시 왕족은 왕족이라는 걸까.

여전히 어색한 나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엘라도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었지.

"예."

평범한 소시민은 이런 일에 어색하다. 벌써 삼십 분째 미소를 지었더니 광대가 아파오고 있었다.

"자네는 내가 아바마마께 직접 건의 드릴 생각이네."

"예?"

"후작은 너무 높고... 백작은 괜찮나?"

"...예?"

순간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기껏해야 남작, 혹은 높아야 자작이라 생각했는데 백작이라니? 혹시 떠보는가 싶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닙니다. 백작위라니...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으음... 백작위는 받아야 영지를 하사 받을 수 있는데, 혹시 영지엔 관심이 없는가?"

"..."

몰랐던 사실이다. 어쩐지, 후작령, 백작령은 눈에 밟히게 보이는데 자작령, 남작령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영지가 작거나 너무 작위가 낮아 영지가 없나 했었다.

"...이것도 몰랐나 보군?"

"사실 작위를 받으리라 생각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하긴 후작의 후계자니 그럴 수 있겠군. 허나 논공행상은 공정해야 한다네. 그래야 후에 뒷말이 안 나와.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인 자네가 남작이나 자작의 위를 받으면 그 밑 사람들은 뭘 줘야 하는가?"

그것도 그랬다.

에어로크 왕국에 맞먹는 거대한 영토를 점령했는데, 일등 공신이 영지도 못 받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제가 영지를 잘 다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에어로크 왕국을 꿀꺽할 생각이나 하지 말게."

"...예?"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엔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왕자를 빤히 바라봤다. 너무 놀라 손을 흔드는 것도 깜빡했다.

"왜 그렇게 놀라나? 정말 반역을 생각하고 있다던가?"

"절대로요! 절대 그런 생각은 조금도..."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왕자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주민들에게 보여주던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농담일세. 그냥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든 것 뿐이네. 자네가 과연 백작으로 만족을 할까."

"지금도 과분합니다."

"허나 모르지. 앞으로 공을 더 세우면 후작이 되고 공작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언젠가..."

그제야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나를 믿으면서도 경계하는 것이다. 혹시나 반역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깃발을 들면 막을 수 있을까.

물론 에어로크 왕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들어야 하는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는 이야기였다.

결백을 위해 왕자에게 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동안 왕자님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쉽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뜬금없는 소리였는지 손을 흔들던 왕자가 고개를 내게 돌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저를 믿어주신 것에 감사해 앞으로 왕자님께 충성을 다 하려고 했는데... 제가 못 미더운 모습을 보였었나 봅니다."

"아니네. 그런 말이 아니고."

"운이 좋아 백작이 됐다는 말로 얼마나 무시를 당하겠습니까. 그때마다 왕자님께 의지하려 했는데..."

상황이 뒤집혔다.

큰 보상을 챙겨줄 테니 혹여나 나중에 딴 마음 품지 말라고 은은한 협박을 하던 왕자는 나와 사이가 틀어질 위기라고 생각했는지 안색이 변해버렸다.

"그게 아니지 않나. 내가 자네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니면 제가 백작위를 고사하는 것이."

"어허. 카인 참모. 그런 말 말게."

아무리 정치에 익숙한 왕자라지만 그 나이는 겨우 이십 대 중반이었다. 그 동안 스승님과 후작 같은 노련한 여우를 부대껴 살던 내가 보기엔 한참이나 어린 새끼 여우였다.

게다가 왕세자가 떡하니 있는 상태에서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2왕자에겐 왕국 남부의 유력자인 지그하르트 후작 가문과 장남인 나를 놓으래야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내, 내가 말실수를 했네. 자네의 충성심이야 이번 전쟁에서 그토록 봐왔는데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

"어허. 카인 참모. 내가 잘못했다니까."

간을 볼 사람한테 간을 봐야지.

테레스 산맥을 넘기 전 스승님의 후광에 밀려 천대받던 내가 아니다.

그렇게 예전보다 사이가 좋아졌는지 아닌지 모를 왕자와 함께 투닥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저 멀리 화려하게 솟아있는 왕성을 향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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