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휴전
* * *
"아쉽네요."
화려한 방이었다. 고풍스러운 붉은 벽지를 배경으로 온갖 금빛 장식물이 걸린 방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들어오는 것 자체만으로 눈이 돌아가지 않을까.
평범하지 않은 방에서 평범하지 않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람도 최면을 걸걸 그랬나 봐요."
붉은 머리의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곤 은은한 홍차 향기를 맡으며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늘 그랬다. 여인이 이야기하고, 남자는 듣고.
그러나 붉은 머리의 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늘 그랬으니까. 벌써 이 년이 지났다. 대답 없는 마네킹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꺼내는 것도 익숙해 보였다.
"아레스께서 얼마나 닦달을 하시는지 몰라요. 당장 전 병력을 서쪽으로 돌리라는데 그럼 정말 제국이 무너지고 말 거에요."
"..."
"카인이라 했었죠?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가."
설마 그 사람이 슈티엔 후작까지 물리칠 줄은 몰랐다. 황실의 명령을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실력 하나는 검증된 장군이었다.
혹여나 최면으로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가 그의 판단력이 흐려질까 말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알았으면 그냥 최면을 걸걸 그랬나 싶었다.
"그나저나 천리안이라니... 너무 전쟁에 유리한 능력 아닌가요?"
붉은 여인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건만,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여인이 깜짝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지더니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아레스께서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폐하는 들어도 상관없겠죠?"
어차피 기억을 못 할 테니까. 여인의 눈꼬리가 살짝 휜다.
"정말... 에어로크의 대리자를 영웅으로 만드느라 들어간 피해를 생각하면..."
제국 서부의 뷔른 영지까지 몸소 찾아갔었다. 그게 무려 일 년 전이다.
국경을 허술하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세뇌를 마친 4황자까지 보냈다. 모두 그 카인이라는 자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하지만 어쩌겠어요... 전쟁으로는 그 대리자를 이기지 못할 게 뻔한데."
마지막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시간을 끌려고 했다. 이미 그는 충분히 공적을 세웠고, 이대로 겨울이 되면 온 나라에 소문이 퍼져 영웅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슈티엔 후작이 변수였다.
설마 황실의 명령을 거부하고 쌍둥이 성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도 모든 병력의 움직임을 읽히면서 승리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지리라 생각하고 다급히 지원 병력을 소집하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엄청난 규모의 대회전.
상처뿐인 에어로크의 승리.
아니, 어쩌면 에어로크 왕국의 패배 아닐까.
슈티엔 후작은 명장의 이름값을 했다. 그 불리한 상황에서도 엄청난 병력을 소모시켰으니까.
덕분에 에어로크 왕국은 더이상 전진하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더불어 원래의 계획도 성공했다.
계획대로 카인이라는 자가 영웅이 됐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여인이 가만히 황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붉은 여인의 안광이 더욱 강하게 뿜어져나왔다. 수십, 수백 명이 바라봤던 그 안광이었다.
"폐하. 에어로크 왕국과 휴전을 부탁드려요."
"...알...겠소."
"후후. 감사해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 초원에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륙의 북부에 위치한 다나크 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겨울이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겨울은, 그 어느 나라보다 혹독했다.
"승전을 축하하며 나팔을 불며 왕국으로 귀환하겠죠."
겨울이 다가오면 테레스 산맥이 막힌다. 전쟁의 상처가 휩쓸고 간 제국 서부에 수십만 명이 먹을만한 식량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자신들의 휴전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게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붉은 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왔다.
봄이 오면...
'조금 더 가보세요.'
'...예.'
'조금 더.'
'...'
그게 마지막이었다. 시선의 끄트머리에 걸려있던 로그멜 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조금 더 돌아와서 손 흔들어 보세요.'
'...'
'손가락으로 숫자.'
몇 번이고 반복된 명령이었다. 퍼렇게 질린 로그멜 경이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반대 손엔 붉은 구슬이 들려있었다.
'셋.'
'...맞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이제 돌아오세요.'
'...'
그 말과 함께 구슬에서 손을 뗐다. 감각이 돌아오며 따듯한 훈풍이 느껴진다. 오른팔을 뻗어 물 주전자를 기울였다.
나흘 거리.
녹색 구슬로 확인할 수 있는 한계가 사람의 걸음으로 나흘 거리였다.
"쓰읍..."
말로는 이틀, 혹은 하루 거리다.
그 정도만 해도 어마어마한 범위를 볼 수 있다. 쌍둥이 성에 앉아 뷔른 성 근처까지 확인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뭔가 좀 아쉬웠다.
능력 발현에도 정체가 있나. 이 이상은 도통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신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천천히 오른손으로 물잔을 들며 창밖을 바라봤다. 병사들의 옷차림이 한 달 전에 비해 훨씬 두꺼워져 있었다. 이제 10월에 들어섰는데,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추위였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잘못하면 왼팔을 영영 못 쓴다는 말을 듣고 한 달 넘게 침대에 누워있었더니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지난번에 상상했던 구슬의 능력 확인이었다.
뷔른 성을 코앞에 두고 다시 쌍둥이 성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을 로그멜 경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기 때문에 똥개 훈련을 하긴 했지만, 어떡하겠는가. 믿을 만 하면서 친한 사람이 그밖에 없는데.
덕분에 신이 내려준 붉은 구슬도 만져보고 오히려 영광 아니겠는가.
'돌아오고 있어요?'
'으, 으악!'
'...'
'죄, 죄송합니다. 깜짝 놀라서... 지금 돌아가려고 하는 중입니다.'
'구슬 잘 챙기세요. 천벌 받아요.'
'...예.'
삭풍을 헤쳐가며 돌아올 그에게 살짝 미안할 만도 했지만,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게 그의 업보였으니까.
신의 능력은 신의 능력이었다.
직접 입으로 말을 전하는 통화 느낌인 줄 알았는데,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덕분에 처음 로그멜 경을 불러 구슬을 쥐여줬을 때 참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었다.
'...이게 뭐지?'
'왜 부르셨을까. 또 무언가 시키시려는 것 같은데.'
'이젠 침대에 누워서도 뭘 시키네.'
'...준남작만 되면 율레인에게 당당하게 고백을 할 수 있어.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뭘 참아요?"
"...예?"
"율레인이 누구예요?"
"으, 으악!!!"
내 말에 깜짝 놀랐는지 그가 기겁하며 몸을 떨었고, 그 바람에 그의 손에 있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구슬인데!
깨지면 답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구슬을 낚아챘었고, 구슬을 잡은 뒤에야 뻗어 나간 손이 왼손임을 깨달았었다. 덕분에 왼팔을 꿰맸던 실밥이 툭 하고 터지고 말았다.
팔을 타고 흐르는 피와 그 종착점에 있는 붉은 구슬. 급작스럽게 움직인 탓에 옆구리를 찌르는 고통과 귀신을 본 듯 홀린 얼굴의 로그멜 경...
한참 뒤에야 우리는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네요."
"그러니까 그게..."
잘 쉬고 있다가 상관이 부르면 짜증이 나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 2년 동안 군대에서 절절히 느꼈으니까.
그렇다고 마음씨 좋게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성안에서 시험하려던 마음을 바꿔먹고 그를 성 밖으로 내보냈다. 미루고 미뤘던 녹색 구슬 능력의 한계까지 시험할 겸.
물론, 로그멜경은 아무 말 못 하고 말 한 필과 함께 성 밖을 나가야 했다.
하늘이 어둑한 게 정말 눈이 쏟아질 것 같다.
따뜻한 홍차나 한잔 마실까.
찻잔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나다."
"스승님?"
대답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스승님이었다. 오늘 점심에 들리셨는데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걸로 밥 벌어 먹고살았는데요. 미소를 지으며 불을 올렸다.
"차 마시려는 게냐?"
"예. 스승님도... 아닙니다. 직접 타주십쇼."
차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스승님이다. 자신이 직접 한 차가 아니면 절대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내 말에 스승님이 주저 없이 다가와 자리를 차지했다.
"앉아있거라."
"감사합니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걸을 때마다 구멍이 났던 옆구리가 욱신거린다.
정말 다시는, 절대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이백 번째 다짐을 하며 등을 기댔다.
"혹시 휴전 문서가 날아왔습니까?"
"눈치 하나는 귀신같구나."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아왔다니까요.
내 앞에 내려진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깊은 홍차 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거밖에 올 게 없으니까요."
겨울이 되면 모든 게 멈춘다.
도로는 얼어붙고 산맥은 몬스터의 세상이 된다.
첫눈이 오면, 그 눈이 녹기 전까지 전쟁이 잠깐 멈추는 게 이 세상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저희도 영지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렇겠지."
내년 봄에 다시 이곳을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한 번 휴전이 체결되면, 그 상태로 몇 년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국도 우리도 너무 큰 피해를 보았다. 어쩌면 몇 년 후에나 이곳을 올지도 모른다.
"드디어 돌아가는군요."
엘라, 시아라. 디아나는 많이 컸을까. 그러고 보니 다친 후로 편지를 쓴 적이 없다.
스승님이 돌아가면 오랜만에 편지 한통 쓸까.
어쩌면 편지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다. 이 세계엔 우편이란 개념이 제대로 없으니까.
잠깐 사색에 잠겨 찻잔을 바라보는데,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만...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이상한 내용이요?"
고개를 들자 사뭇 진지한 얼굴의 스승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럴까.
휴전에 무슨 조건이라도 달린 걸까? 점령한 땅을 다시 내놓으라고 했나?
그러나, 스승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휴전 문서에 네 이름이 쓰여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