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50화 (150/191)

〈 150화 〉 붉은 구슬

* * *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대전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수많은 별들이 천장에 박혀있었다. 발바닥을 통해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이곳으로 몸이 이동하는 걸까. 아니면 정신만 이동하는 걸까.

"오랜만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다란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 검은 눈. 몸을 감싼 흰 천.

신이었다.

"정신만 이곳으로 오는 겁니까?"

구멍이 뚫렸던 옆구리가 멀쩡했다. 반으로 갈라져 뼈가 보이던 왼팔도 흉터 하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통증에서 벗어나 온몸이 개운했다.

"내 의지다."

그러시겠죠.

쓸데없는 걸 물어봤다.

전지전능이라 칭하는 신이 못할 게 뭐가 있는가. 그저 내 몸이 불편하니 알아서 해준 거겠지.

오랜만에 만나 감각이 떨어졌다.

"참 물어볼 게 많았습니다."

지난 헤르트 원정이 끝나고 만났으니 근 이 년 만이었다. 때때로 신끼리 싸우다 죽었나 그런 생각도 하곤 했다.

"제가 보는 이 숫자. 정확히 무슨 능력입니까?"

무려 이 년 동안 참은 질문이었다. 언젠가 신이 나타나면 꼭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무슨 능력치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대답이 궁금했다.

...그리고 왜 능력이 떨어지는 지도.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다."

"정확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놈의 선문답 또 시작이다. 자연스레 말이 날카로워졌다.

"생명은 유한하다."

"..."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이 섭리다."

정곡을 찔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신이 마음을 읽는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방법은 없습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친절하다. 알면서도 반복되는 질답이었다.

내가 이미 직감하고 있는 그 능력치에 대해 질문한 이유.

자세하게 물어본 이유.

궁극적으로 내가 묻고자 하는 이유.

나를 바라보는 이 남자는 이미 모든 걸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신인 걸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조그마한 희망이 무너져내렸다.

"그럼..."

"..."

"..."

힘겹게 열렸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가능할 것이다. 내 영혼이 이 세계로 넘어온 것 자체가 전지전능의 증거니까.

"이별이 있기에 현재가 즐거운 것이다."

"..."

"생명이 유한하기에 역설적으로 발전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만이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본다. 휴가의 끝이 있기에 사람들은 휴가를 알차게 보낸다.

만약 휴가가 끝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생명이 무한하다면.

"..."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다 쓸데없는 소리다. 결국 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없다."

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연의 법칙 앞에 스승님의 순서가 돌아온 것 뿐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사과였다. 신의 입장에선 다짜고짜 떼를 썼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게 인간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 질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 걸 생각하면 180도 달라진 반응이었다.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을 잘 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가만히 남자를 바라봤다. 내게 굳이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부른 건 아닐 테고, 할 말이 있어 불렀을 것이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더 남긴 했지만, 돌아가는 눈치 상 이젠 들어야 할 때였다.

과연, 나를 바라보던 남자의 입에서 즉각 본론이 나왔다.

"주신께서 너를 주목한다."

"저를 말입니까."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 모호한 이야기였다. 조심하라는 뜻일까?

"다나크 제국을 관장하는 신 역시 너를 예의주시 하는 중이다."

"...그건 좋은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아마 도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가장 강력한 후보 중 하나였던 다나크 제국이 연합군에 의해 멸망 위기에 처했으니 말이다.

"좀 오싹합니다."

"괜찮다.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진 못하니."

"..."

그 말에 정말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으면 진작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 아닌가?

"숫자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 잘했다."

"..."

그 말에 의문이 하나 풀렸다. 역시나였다.

두 여인이나 스승님, 후작에겐 말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역시 말 하지 않기를 잘했다.

"너의 과거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능력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좋다."

"구슬도 그렇습니까?"

"그건 괜찮다. 다만, 그 뒷감당은 오롯이 네 몫이다."

구슬은 이미 다른 신들도 아는 능력이니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리자들이 알게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니 그걸로 인해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거겠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내 말에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을 나간 순간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 때문이었다.

붉은 눈,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비해 수수한 얼굴이라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를 조종하는 능력, 또는 최면.'

나를 유혹했던 루시의 행동.

스승님이나 후작, 또는 내 연인들이 당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이 없었다.

"남들을 조종하는 능력은 너무 사기적인 능력 아닙니까?"

"모른다."

"..."

이 년 전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나크 제국 대리자의 능력을 확답받으려 떠본 건데 역시나 단번에 의도를 간파당했다.

"다른 대리자들의 능력을 직접 알려주는 건 금지인가 보군요."

가능하면 헤르트와 알만, 파딘 제국까지 모조리 물어보려 했는데...

하여간 이놈의 신들은 쓸데없는 제약을...

"...아, 아닙니다."

온몸이 발가벗겨져 있는데도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너무 오랜만에 만났더니 속마음을 읽는다는 사실을 자꾸 까먹었다.

"그나저나... 혹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르신겁니까?"

"내가 부른 게 아니다. 내가 널 찾아온 거지."

이 년 전과 귀신같이 똑같은 대사였다. 이놈의 선문답은...

이제는 익숙해졌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성격상 할 말이 끝났다면 주저 없이 돌아갔을 터,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었다.

"말이 너무 많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사회생활로 단련된 아부였다. 그리고 역시나, 빈말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런 감흥 없이 나를 바라보던 신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갓난아기의 주먹만 한 붉은 구슬이었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그 구슬들을 받아들며 신을 바라봤다.

"구슬이다."

구슬인 건 나도 안다.

"네 상식으로 이야기하면, 통신 도구다."

"예?"

"사용 방법은 똑같다. 구슬을 쥐고, 집중하면 된다."

"...또 능력을 줘도 괜찮은 겁니까? 게다가 이번에도 비밀로 해야 한다면 의미가 없는 물건 아닙니까?"

분명 능력치를 보는 눈을 줬을 때 비밀이라며 두 번이나 강조했었다. 그런데 또 능력을 준다고?

...이거 뒷감당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신은 내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비밀이 아니다. 작은 내기를 했고, 그에 대한 보상이다."

"내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도 내기를 하는구나.

그런데 뭐 이렇게 스케일이 커.

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제야 신이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이번 전투와 관련해 다나크 제국의 신과 내기를 했던 겁니까?"

"그래."

"..."

다나크 제국의 신이 미워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괜히 또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가만히 구슬을 내려다봤다.

"형평성 문제는 없었습니까?"

"네가 가장 뛰어나다. 그게 전부다."

"..."

그런 거 없다는 소리다.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훗날 누군가에게 경쟁에 밀리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는 소리에 무서워해야 할지.

"거리 제한은 없습니까?"

"없다."

"...감사합니다."

당장은 어디에 써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전쟁 나갈 때마다 엘라와 시아라에게 쥐여주고 개인 정비 시간에 여자친구한테 전화하듯 연락을 해야 하나.

아니면 로그멜 경에게 하나 주고 공작 요원을 시켜야 하나.

...공작 요원?

이건 상당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로그멜 경은 내 말에 따라 적진에 침투하고.

다만, 실패하면 다시는 못 찾는다.

그만 좀 부려먹으라는 로그멜 경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지만, 당연히 환각이니 무시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몫이다."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언젠가, 어떻게든 쓸 일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습관적으로 두 구슬을 품 안에 집어넣으려는 자세를 취했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여기만 오면 알몸인 걸 까먹는다.

"혹시 구슬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추가할 수 없습니까?"

참 아쉬운 부분이었다. 관찰하는 것을 떠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면, 정말 완벽한 맵핵이다.

그러나 내 말에 신은 한 번 들었던 말을 다시 읊었다.

"구슬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이 말 역시 이 년 전에 들었던 말이다. 이번엔 해석이 어려웠다.

완전하니 만족하고 쓰라는 건지, 아니면 있는데 내가 아직 사용을 못 하는 건지.

꼭 잘나가다 이렇게 선문답이다.

"이 세계로 처음 넘어왔을 때 국가를 하나씩 정복할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벌써 세 개나 받았다. 물론, 하나는 너무 오랜 공을 들여야 했고 다른 하나는 사용처가 애매했다.

결국 당장 내게 유용한 선물은 처음 받았던 녹색 구슬 하나가 전부였다.

"그럼 다나크 제국을 무너뜨리면 어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적어도 내가 애용하는 녹색 구슬처럼 유용한 능력을 주지 않을까. 신에게 묻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이었다.

게다가 남은 국가는 무려 다섯 개다.

아마 마지막 국가를 점령할 때쯤이면 그 능력만으로도 정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신에게 나온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이었다.

"이미 줬다."

"...혹시 눈입니까?"

첫 번째 능력은 환영 선물이었고, 지금 받은 건 내기에서 얻은 것이라 했다. 그럼 남은 건 두 눈 뿐이었다.

맥이 탁 빠졌다.

물론 다른 대리자들은 하나만 가지고 있으니 욕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미 포장지를 뜯기도 전에 내용물을 본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지 말걸.

그때 신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땐 제대로 된 능력을 개방해주겠다."

"...제대로 된 능력이요?"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그래. 사실 이상하긴 했다. 아무런 능력도 없고 단순한 숫자만 적혀있을 뿐이니.

사람을 처음 만나면 이마부터 확인하는 쓸데없는 취미만 생겼을 뿐, 이번 전쟁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

"그건 기대됩니다."

"그래."

그 말과 함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까. 무슨 능력이 열릴까.

자세한 설명이 쓰이는 걸까. 아니면 다른 숫자도 볼 수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쌍둥이 성을 뛰쳐나가 다나크 제국으로 전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정확히 삼 초 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크흑..."

잊고 있었던 통증이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강한 통증에 호흡이 버거웠다.

간다면 간다고 말이나 해야 할 것 아닌가.

폐허가 된 대전 앞에서 갑작스레 침대로 돌아왔다.

"...씨, 씨발..."

분명 속으로 자길 욕했다고 복수한 거다. 송글송글 맺히는 식은땀을 느끼며 욕을 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를 보고 있을 확률?

백 퍼센트다.

차라리 통증에 적응하는 게 낫지. 또다시 끌려갔다가 갑작스레 돌아와 이짓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아이고."

나 죽어.

다나크 제국을 침공하는 건... 일단 몸이 다 낫고 생각해봐야겠다.

두 손에 들린 붉은 구슬 두 개를 쥔 채로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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