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군기
* * *
비가 내린다.
장장 한 달 만에 비가 내렸다.
피를 머금은 대지에 비가 내렸다.
"허억... 허억..."
"..."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으로 검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재능은 없었다. 그저, 몸이 기억하는 움직임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시체를 본 적도,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는 평화로우니까.
내가 검을 든 유일한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이번 전쟁에서 몇 명을 죽였더라.
열 명?
스무 명?
모르겠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었다. 살기 위해 죽였다.
"허억... 허억..."
옆구리가 아팠다. 왼팔의 감각이 희미했다.
시시각각 흐르는 피를 느끼며 오른 손으로 고삐를 꽉 쥐었다. 부들거리며 떨리는 손이 창백하다.
"...! ... ...."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귀가 먹먹하다. 뭐라는 건지 도통 안 들린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인영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님! ... ...!"
그래.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온 힘을 다해 들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신 뜨지 못할 것 같았다.
"...큭!"
혀를 꽉 깨물었다.
미칠 듯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
그와 동시에 그토록 무겁던 눈꺼풀이 확 들리며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도련님! 정신 차리십쇼!!!"
절대 다시는 안 깨물리라.
정말 미친듯이 아리는 통증에 눈물이 쏙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자 로그멜 경이 더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련님!!! 안 됩니다!!!"
아냐. 아파서 그래. 아파서.
시끄러워 죽겠다.
날파리가 옆에서 왱왱거리는 느낌이다.
"창을..."
간신히 입을 열자 무언가 주르륵 쏟아진다. 피인지 침인지 모르겠다.
피 맛은 안 났으니 침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코를 통해 들어오는 피비린내에 이미 후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로그멜 경의 표정을 보니 침은 아닌가 보다.
...다시는 혀 안 씹는다.
부우
전장을 울리는 뿔피리 소리를 들으며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달리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애매한 속도다.
제국 병사들의 입장에선 기병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지만, 내 왼손에 들린 무언가를 본 적들은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움직였을까. 뒤로 물러났던 로그멜 경이 다시 다가왔다.
녹색 깃발이 달린 군기였다.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그 덕에 나는 훤히 드러난 내 뼈를 감상할 수 있었다.
"..."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하다.
부릅뜬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천천히 창끝에 푹 꽂았다.
내가 이겼다.
아무리 나를 원통하게 바라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머리를 자르기 위해 왼팔은 뼈가 드러났고 옆구리엔 구멍이 났다.
그래도 내가 이겼다.
나는 살았고, 이 자는 죽었으니 내가 이겼다.
천천히 군기를 들어 올렸다.
창끝이 무거워져 도통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게다가 왼팔은 힘을 주는 게 불가능했다.
오른손으로 창을 꼿꼿이 세웠다. 창끝에 달린 머리가 처량하게 비를 맞는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배에 힘을 줬더니 구멍이 난 옆구리에서 피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적장의 목을 베었다! 검을 내리고 항복하라!"
살면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람을 죽이고, 목을 베고, 창끝에 꽂았다. 현대에 가긴 이미 그른 것 아닐까.
"와아아아아아아!"
가는 곳마다 침묵과 함성이 교차했다.
그것은 작은 기적이었다.
군기를 본 녹색 갑주는 환호했고, 붉은 갑주는 검을 떨어트렸다.
애국심, 충성심. 이 세계엔 그런 게 없다.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는 충성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새로 부임한 영주의 세율은 얼마나 될까. 혹시 부역을 시키지는 않을까.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도 중요하지 않았다.
"검을 내리고 항복해라!!!"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적장을 잡는 순간 스크린에 결과 창이 뜨지 않는다.
때문에 군기에 꽂힌 머리는 그 뒤로 몇 시간이나 평원을 돌아다녀야 했다.
이 초원에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비를 맞으며.
전쟁의 상처는 살아남은자의 것이다.
초원을 적신 비는 핏물을 지웠지만, 시체는 남겼다.
"로그멜 경에게 군기를 넘겨주고 치료를 받았어야지."
"...이런 때 아니면 또 언제 그런 걸 들어보겠습니까."
"..."
당연하게도 한심하다는 눈초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난 그 눈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의 복수를 제가 대신했는데 고맙다고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게 죽은 놈이 될 뻔했다."
"살아있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창문 밖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한참을 스승님의 이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입이 살아난 거 보니 다 나았나 보구나."
"설마요."
전투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비를 맞으며 몇 시간 동안 평원을 돌아다니던 나는 뿔피리 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쯤 정신을 잃었다.
내 마지막 기억은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었으니 기절하길 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낙마 통증에 온 몸을 비틀어댔을테니까. 그리고 눈을 뜨자 딱 일주일이 지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적진 한가운데까지 돌격한 것이냐?"
"...그냥 가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정중앙은 아니었다. 진형이 무너져 찌르고 들어가기 좋은 빈틈이 많았을 뿐이다. 거기서 슈티엔 후작을 찾은 건 순전히 구슬의 힘이었다.
"참모가 기병을 이끌고 돌격 한 건 에어로크 역사 상 네가 처음이다. 네가 기산 줄 아느냐?"
"..."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놓고는..."
"..."
그럼 어떡해... 구슬을 남에게 줄 수도 없고.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사실, 스승님의 말대로 흥분을 한 건 사실이었다. 젊은 몸에 빙의해서 그런지 혈기가 끓어 넘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피해는 어떻습니까?"
결국 내가 한 건 화제 돌리기였다.
꼬장꼬장한 노인네의 잔소리를 듣다간 또 기절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제를 잘못 잡았다. 나를 노려보던 스승님의 얼굴이 무거워지더니 천천히 입이 열렸다.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어렵다. 남은 왕국군이 십만, 도망간 제국군이 약 오만이다."
"...많이 희생됐군요."
"..."
스승님의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도 아니다.
절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긴 대회전에서 승리했다.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그러나 방안에 내려앉은 침묵은 도통 사라질 줄 몰랐다.
상처뿐인 승리다.
20만에 달하던 제국군은 고작 5만이 남았다. 그러나23만에 달하던 왕국군 중 반수가 죽었다.
입이 썼다.
그토록 전면전은 피하고 또 피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그동안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구슬이 없었다면 아르에나 후작과의 전투에서 진작 벌어졌을 일이었으니까.
"슈티엔 후작 얼굴은 보셨습니까?"
곧바로 말을 돌렸다.
다행히 스승님도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싶진 않았는지 별 말 없이 대답했다.
"...봤다."
"빨리 칭찬해주십쇼."
"...뭐?"
"빨리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미소를 지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스승님의 이마를 보면서.
"...정신도 다쳤느냐."
"스승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었는데 칭찬 정도는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작스레 떼를 쓰는 나를 보며 스승님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낯선 표정이 퍽 즐거웠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십니까?"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느냐?"
"제가 떼쓰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
"빨리요."
그제야 스승님은 내가 정말로 듣고자 하는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나를 쳐다보던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구나."
"푸흐흐.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웃음이 터졌다.
직접적으로 나를 칭찬한 게 처음이라는 걸 스승님은 아실까.
딱 경상도 남자 느낌이었다. 아니, 이 세계 자체가 그랬다.
남자든 여자든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그래도 난 꼭 스승님의 칭찬을 듣고 싶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고마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이제 가보마. 하는 짓을 보니 다 나은 것 같으니 내일부터 회의에 참석하고."
"예?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요."
"쯧. 입만 살아가지고. 입은 왜 안 다쳤느냐."
"그건 좀 섭섭한데요."
벌써 가시려나 보다. 마음 같아선 문 앞까지 배웅해드리고 싶었지만, 오른팔만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내일 또 오셔야 합니다."
"회의에 나오라니까."
"푸흐흐."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진심이신가 보다.
내일은 아마 왜 회의에 나오지 않았냐고 닦달을 하실 생각이겠지.
방문 앞에 선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간신히 움직이는 오른팔을 들어 약하게 흔들었다.
등 뒤가 축축하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무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과일이 먹고 싶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시녀냐?"
"고마운 제자를 둔 스승님이죠."
"...썩을 놈."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스승님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87'
참 잔인하도록 선명한 숫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