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48화 (148/191)

〈 148화 〉 대지를 물들였다

* * *

"후작님을 지켜라!"

방심했다. 다 잡은 물고기라 생각하고 방심했다.

등 뒤로 들려오는 함성과 비명은 그저 평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생각했다.

지나치게 큰 소리에 이상함을 느꼈어야 할 때에는, 록셀의 언변에 넘어가 흥분한 상태였다.

"끄아악!"

"사, 살려줘!"

우테라 성을 포위하느라 진형이 망가진 상태였다. 아니, 애초에 진형이랄 것도 없었다.

게다가 등을 보이고 있던 상태였다. 가장 후방에 있던 궁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물러나셔야 합니다! 금방 들이닥칠 겁니다!"

성문을 열던 기사와 지휘관들이 화살을 쳐내며 후작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여유는 있었다.

저들은 고작 이천의 기마들...

...기병!

"...저들을 처리하러 간 제국 기병들은 어디서 무얼 한 것이냐!"

등줄기를 훑는 싸늘한 감각이 느껴진다.

분명 저들을 처리하기 위해 삼천의 기병을 보냈다.

제국 기병은 바보가 아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적들을 추적하기 위한 기술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들을 놓쳤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성벽 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저 위에 있는 병사들은 분명 뒤에서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던 걸 미리 봤을 것이다.

제대로 당했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록셀!!!!!!!!!!!!!"

제국 기병이 자리를 비우자 쳐들어온 왕국 본대, 생각보다 약했던 저들의 반격, 주둔지를 벗어나자 들이닥치는 기병.

언제부터 함정이었는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가.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주변 지휘관들이 후작을 이끌고 기병의 반대로 움직였다. 우테라 성을 감싼 제국군을 찢어발기며 오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다! 성문이 열려있다! 성으로 들어가라!"

성문이 열렸다.

들어가기만 하면, 들어가서 록셀 그놈을 죽이기만 하면...!

"말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지휘관 갑주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특히 백마를 타고 있는 후작은 더욱 그랬다. 주변 부관들의 손에 이끌려 말에서 내려온 그는 강제로 도망쳐야 했다.

"이거 놔라! 성문만 들어가면...! 저놈이 나를 보며 비웃고 있지 않느냐!"

"안 됩니다! 후작님이 다치시면 누가 제국군을 이끈단 말입니까!"

후작의 갑주를 감싼 부관들은 참담함에 눈을 감았다.

제국의 지휘관이 가장 먼저 성문을 들어가는 모습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이미 성문은 열렸었고, 방해될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수만 명의 제국군 앞에서 비참하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버렸다.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군이 보여선 안 될 행동이었다.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도망가는 지휘관이 돌격 명령을 내린다면, 그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공포로 군림하던 짐승은 사라지고, 아집과 집착만 남은 노인이 남았다.

"이거 놔라! 록셀!!!!!!! 당장 나오거라! 네 제자놈을 찢어죽이기 전에 나오란 말이다!!!"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기병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단단하게 중무장한 중갑 보병이 서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가장 약한 궁수부터 등을 맞았다.

그나마 기병을 견제할 중갑 보병은 전부 성벽을 오르기 위해 선두에 있었다.

"피하셔야 합니다!"

일단 물러나야 한다.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하고, 우테라 성을 다시 공격하든, 아니면 원래 계획대로 방어선을 구축하든 해야 한다.

이성을 잃은 후작을 잡아끄는 부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은 얼굴로 화살을 쳐냈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가는 그때, 후작을 위시한 지휘관들의 귀에 기다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

둥­­ 둥­­ 둥­­

"검을 들어라!"

"와아아아아아아!!!"

삼만, 아니 사만은 되어 보이는 부대였다.

후방을 틀어막은 본대를 철썩같이 믿고 있던 그들은, 지그하르트 후작이 이끄는 별동대를 마주쳐야 했다.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우테라 성부터 성문 앞, 저 멀리 보이는 대회전과 제국군의 주둔지 바로 앞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록셀!!!!!!!!!"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우테라 성은 무력했으며, 저들의 본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었다.

기병은 당연히 초원에 드러누웠을 줄 알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어쩌다...

"일단 물러나셔야 합니다!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저 멀리 왕국군 본대를 상대하는 제국군의 등이 보인다. 뒤의 상황은 까맣게 모르고 눈앞의 왕국군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물러나면 십만에 달하는 저 본대는 어떻게 되는가.

겨우 오만도 되지 않는 병사들을 이끌고 무얼 할 수 있다는 건가.

자신들을 유린하는 왕국 기병이 본대의 등을 칠 것이다. 앞을 가로막은 저 별동대도 방향을 돌려 제국군을 포위할 것이다.

"..."

"후작님!"

대지를 울리는 기마 소리가 들린다. 앞길을 가로막는 수많은 병사들을 뚫고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오는 중이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미 부관들에 의해 갑옷이고 말이고 다 벗어던져 단출한 차림새가 됐건만, 저들은 귀신같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촤학­!

"...검을 들어라."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슈티엔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겁에 질려 자신을 붙잡던 부관은 목이 잘려 땅에 뒹굴었다.

"..."

"방향을 서쪽으로 튼다. 제국군 본대를 구하러 간다."

우테라 성을 구하기 위해 왕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을 차린 짐승은 이전보다 더 사나워졌다. 날카로운 이빨을 잔뜩 드러낸 야수가 서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로 우테라 성을 공격하던 오만의 병사가 따르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뒤를 쫓아라! 오늘 이 땅은!!! 저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노인의 팔이 높이 들렸다.

그 신호를 따라 삼만의 병사가 우테라 성을 나섰다. 장장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

"로그멜 경!"

"예!"

"곧바로 별동대로 가세요! 아버님에게 진군을 멈추고 방어태세를 갖추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이랴!"

명령을 받은 로그멜 경이 곧 몇 기의 기마와 함께 왼쪽으로 갈라졌다. 저 멀리 보이는 별동대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휘관을 쫓는다!"

북쪽으로 도망치던 제국군이 갑작스레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후작이 있는 방향이었다.

칼날이 오가는 전장 한복판에서 여유롭게 구슬을 보고 있을 시간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하얗던 백마도 버리고, 화려한 갑주도 벗어던진 지휘관을 찾을 때마다 제국군의 진형에서 벗어나야 했다.

"조금 더 힘을 내라! 우리가 적들을 헤집을수록 아군이 편해진다!"

이미 진형이랄 것도 없다. 성문을 감싸던 제국군은 지휘관을 따라 우왕좌왕 움직였다.

그러나, 옆구리에서 기병이 들이닥치고 뒤에서 아군이 쫓는 상황에 저들이 취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사람을 문다.

이대로라면 후작의 별동대가 위험했다.

"들어간다! 추형진으로!"

기병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제국군 진형의 한복판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기병들이 고개를 숙이며 검을 들었다.

히히이이잉!

검날이 병사들의 목을 스칠 때마다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말의 속도를 받은 검은 병사들이 미처 대응을 하기도 전에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촤학­!

"아아악!"

저 멀리 선두가 보인다. 두꺼운 갑주를 입은 기사들도 보인다.

그러나 적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숨었을까. 함정일지도 모른다. 혹여나 들어갔다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선두를 분리시킨다! 진형을 빠져나간 후 그대로 돌아친다!"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가로막은 그 너머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적이 너무 많았다. 변변찮은 방어구도 없는 병사들은 괜찮지만, 단단한 갑주를 입은 기사는 상대하기 껄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기사는 공격하지 마라! 철저히 진형을 붕괴시킨다!"

벌써 삼십만이 넘는 제국군을 상대했다. 지금 이 평원에 있는 제국군까지 다 합하면 오십만에 육박한다.

물론 그 전부와 전투를 벌이진 않았지만, 이런 전면전도 처음이었다.

이 전투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수십만의 피를 머금은 초원에 또 다른 피를 쏟기 위해 제국군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기병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속도를 늦추기 위해 끊임없이 제국군을 괴롭혔다. 장시간 말을 타고 긴장을 한 터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르다.

스승님을 미끼 삼아 저들의 수뇌부를 주둔지에서 끄집어냈다.

지금이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유일한 기회였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왕국군 본대와 제국군 본대가 싸운다. 그 뒤로 별동대와 공성 부대가 싸운다. 부대를 벗어난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평원에 몸을 눕힌다.

우테라 성을 나온 왕국군이 공성 부대의 뒤를 공격한다. 제국 기병과 왕국 기병의 서로의 진형을 유린한다.

시야 안의 모든 곳이 전장이었다.

우테라 성부터, 저 멀리 지평선이 모두.

푸른 초원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늘도 이 참상을 보고 싶지 않았을까. 우중충했던 하늘이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먹구름 뒤로 숨은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마지막 돌격이다! 검을 들어라!"

몇 번이나 돌격을 했을까. 말들이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어려웠다.

마지막이니 조금만 더 깊이 찌르자. 제발 이번에는 적장에게 닿기를 바랬다.

서서히 말의 속력을 높이며 제국군을 바라봤다.

앞에는 별동대가 있고 뒤로는 우테라 성을 지키던 왕국군이 있다. 옆구리에 서 있던 병사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검을 들었지만, 의미 없다.

"돌격!"

힘에 겨운지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낸다. 갈기를 빠르게 쓰다듬으며 고삐를 박찼다. 그와 동시에 어설프게 서 있던 제국군의 옆구리를 강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으아악!"

"아, 안돼!"

언제 돌진해도 위험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창을 쳐내며 진형을 갈랐다.

반으로 갈라져 등을 보이는 병사들의 목을 가차 없이 치며 움직였다.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를 따라오는 기병이 죽는다.

천천히 속도가 줄어든다.

말이 지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내가, 그리고 말이 고생할수록 아군이 편해진다. 다리를 통해 느껴지는 말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고삐를 박찼다.

다시 속도가 높아진다.

검을 들어 병사를 헤집었다. 목을 가른 검을 그대로 휘둘러 다른 목을 자른다.

조금만 더!

얼굴로 튀는 피를 고개를 돌려 피했다. 목을 적신 뜨거운 피가 옷 안으로 흘렀다.

조금만 더!

비명을 지르는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호흡이 어려웠다.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검을 휘둘렀을 때,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그 주위를 두꺼운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감싸고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필사적으로 마비된 이성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지금 저곳으로 향하면 목을 칠 수 있을까.

말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차라리 아까 공격을 했으면 더 확실했을 수도 있다.

위험하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다 이긴 전투였다.

이대로 안전하게 방향을 틀어도 된다.

그러나,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적장을 잡을 유일한 기회.

그리고 그때, 기사들에게 둘러 쌓인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했다.

"적장이 보인다!"

스승님을 노린 자.

이대로 쉽게 보낼 수 없다.

이 대지에 몸을 누인 모든 병사들의 원수.

전면전을 벌이게 만든 원흉.

내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의 목을 잘라 스승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돌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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