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미끼
* * *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장마가 끝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때에, 참으로 오랜만에 비가 내릴 것 같았다.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던 로그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 봤다.
"...괜찮겠습니까."
"아직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걸까.
전투가 시작됐다.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우리도 출발해야 할 때였다.
거대한 불덩이에 반파된 우테라 성을 돕던가, 아니면 본대끼리의 전투를 도와줄 수도 있다.
처음 제국군에서 포물선을 그렸던 불덩이를 봤을 땐, 혼이 쏙 빠지는 줄 알았다. 살면서 마법이란 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혼비백산한 기마를 달래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도련님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부, 부, 불덩이가 날아갔습니다!"
"...저도 알아요."
뭘 안다는 거야.
눈 감고 있었으면서!
결국 로그멜은 제국군이 천천히 우테라 성으로 향하는 걸을 우두커니 바라만 봐야 했다.
그와 동시에 충돌한 양 국가의 전면전. 장장 수 킬로에 달하는 전선이었다.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혈향, 수십만 대군이 지르는 함성은 대기를 울렸다. 날카로운 쇳소리, 생명을 다한 자의 마지막 단말마.
로그멜 경을 포함한 기병들은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도련님.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아직 아닙니다."
"..."
벌써 몇 시간째 눈을 감고 있었다.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끊임없이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만 보면 알 수 있었다.
도련님이 말하는 그때가 언제일까. ...언젠가는 말씀해 주시겠지.
그래서 로그멜은 꾹 참았다.
바람을 타고 오는 혈향에도 참았다.
당장이라도 아군을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때를 위해서.
제국 기병에 우르르 무너지는 아군이 보인다.
전선을 돌아 우테라 성으로 향하는 별동대도 보인다.
우테라 성을 완전히 감싼 제국군도 보인다. 반파된 성문이 당장이라도 열릴 듯 위태로웠다.
다 보이기만 한다.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우테라 성문이 열리며 제국군의 함성이 들려온 순간 도련님의 눈이 떠졌다.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방향은 우테라 성, 목표는... 제국군의 수장."
*****
처음엔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뷔른 성을 향하던 제국군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을 때는 그저 기만이 들통났다고 생각했다.
스승님을 구하기 위해 왕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대를 회군했다.
그때부터였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오만의 병사가 쌍둥이 성에 반으로 나누어져 모두 성벽 위에 올라있었다.
모든 깃발도 꽂아놓고 후퇴했다. 저들이 나처럼 하늘에서 성 안을 둘러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들통날 리가 없었다.
한 가지 달랐던 점은 바로 스승님의 노란 깃발이 추가됐다는 것.
그때 깨달았다.
상대 지휘관이 스승님을 잘 아는 사람이구나.
수십 년을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헤르트의 방패라 불렸던 스승님이었으니 다나크 제국의 지휘관들이 노란 깃발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모순이었다. 그렇게 수성을 잘하는 사람이 쌍둥이 성에 있으면 당연히 전투를 피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군은 방향을 꺾었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간다?
확실한 모순이다.
거기서 머리를 싸맸다.
왜 쌍둥이 성으로 향했을까. 스승님의 깃발을 알아봤는데 왜 쌍둥이 성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단서가 너무 적었다. 별 수 없이 내 추리는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풀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로그멜 경의 지나가는 듯한 말로 풀 수 있었다. 두 번째 보급 부대를 처리하고 우테라 성으로 급히 복귀하는 도중이었다.
"이미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 가는 중일 텐데 왜 후퇴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보세요."
"예? ...그러니까 쌍둥이 성에 꿀을 발라놓은 것도 아니고 굳이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이미 식량은 다 떨어졌고, 힘들게 우테라 성을 점령한다 해도 저희가 계속해서 보급 부대를 급습하면 결국 다 굶어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럼 성을 버리고 후퇴해야 할 텐데..."
성에 집착하는 이유.
식량이 없는 상황에도 굳이 성에 집착하는 이유.
잠깐 물러나서 식량을 수급하고 돌아와도 될 일을 굳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
"로그멜 경 준남작 되고 싶다 했죠?"
"예? ...예??? 갑자기요?"
"제가 적극적으로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그때 깨달았다.
기만임을 눈치 챌 정도로 똑똑한 자가 굳이 바보처럼 성에 집착하는지.
그게 아니었다.
상대 지휘관은 성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다.
...깃발에 집착하는 거였다.
아무런 작위도 없고 타국의 사람인 스승님이 쌍둥이 성을 지휘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대 지휘관은 알고 있던 것이다.
뒤로 물러나 식량을 보충하고 오면 노란 깃발이 사라진다는 것을.
지금이 노란 깃발을 부러뜨릴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속도를 높여라!"
이천의 기마가 우테라 성을 향해 질주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본능을 모두 폭발시키겠다는 듯 호쾌한 질주였다.
저 멀리 붉은 성이 보인다.
완전히 열린 성문과, 그 성을 감싼 제국군이 보인다.
...그리고 성문 앞에 선 화려한 갑주가 보인다.
고삐를 더 강하게 쥐고 말을 재촉했다.
"이랴!"
"정말 오랜만이군."
"..."
사위가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바로 직전까지 울리던 쇳소리와 비명이 울리던 성문은 화려한 갑주를 입은 후작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웃기지 않나? ...결국 우리는 전장에서 만날 운명이었다는 게지."
"..."
짐승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단출한 복장을 한 노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짐승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내가 이겼다네. ...방패는 검을 이기지 못해. 그건 만고의 진리지."
짐승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즐거웠다. 오늘부로 더 이상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노인의 입이 열렸다.
운명의 상대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평온한 말투였다.
"...아직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네. 자네도 성문 밖에 서 있지 않나?"
"..."
물론 성문은 없었다.
이미 완파되어 떨어져 나간 성문은, 그 형체만 남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문 밖에 있는 건 맞았다. 즐거워하는 자신과 달리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한 말투에 후작의 흉터가 일그러졌다.
"문이 없는 성문도 성문이라 하나? 그건 통로라고 부르네. 내가 자네를 죽일 통로."
"이렇게 말만 많을 줄 알았으면 안 나왔을 거네."
"..."
후작의 도발에도 노인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귀찮은 듯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자연히 후작의 흉터가 완전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안 즐거운가?
자신은 이 상황이 너무나 즐거웠다.
등 뒤로 여전히 뿔피리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장장 삼십 년을 서로 칼을 맞대며 싸워왔는데!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나타났는데!
질기고 질겼던 인연의 끈이 드디어 만났다. 후작은 도무지 노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잠깐의 생각 끝에 후작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이 운명의 끝을 자신의 승리로 끝이나 화가 났구나.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려는 구나.
그제야 후작의 흉터가 다시 펴졌다.
멈췄던 웃음이 다시 흘러나왔다.
그래. 이 자는 지금 나에게 일부러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이다.
즐거웠다.
노인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니 이 상황이 더욱 즐거웠다.
"클클클. 참으로 추하기 그지..."
"자네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이 끝났으면 검을 들게.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뭐?"
짐승의 웃음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자네는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를 기억하지 못해. 그저 헤르트를 침략한 수많은 제국 귀족 중 하나였네. 내가 자네에 대해 기억하는 건 검도 못 쓰는 내게 당한 자네의 흉터만 기억할 뿐."
"..."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그저 자네의 집착이었을 뿐이야. 내 얼굴을 보자고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킨 자네의 집착."
"..."
"...그러니 내게 별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게. 난 자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까."
사위가 침묵에 빠져들었다.
둘의 사정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후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한 병사들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집착으로 인해 이 모든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여전히 들려오는 초원의 함성과 비명이 모두 헛된 희생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굶은 이유가 그저 지휘관의 아집 때문이었다는 것을.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주변이 고요한 침묵에 빠진 그때, 짐승이 거칠게 포효했다.
"록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저 기만이자 궤변이었다. 그가 자신을 모를 리 없었다.
정말 자신을 몰랐다면, 이렇게 직접 자신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자네의 제자를 죽인 나를 모른다고 하는 건가!!! 내가 직접! 자네의 제자를 죽였는데 나를 모른다고!"
"..."
"그날 이후로 제자를 들이지 못한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런데 나를 모른다고 해!!!"
후작에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사실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록셀 자작에게 향했다.
그가 왕궁의 명령에도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는 소문은 헤르트의 방패라는 위명과 함께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한 록셀 자작의 대답은 더 충격적이었다.
"...들였네."
"...뭐?"
"새로 제자를 들였네. 내 마음에 쏙 드는 놈이지. 결코 자네 때문에 제자를 들이지 못했던 건 아니야."
"...크하하하하!"
거짓말이었다.
은퇴하기 직전까지 제자를 들이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인제 와서 제자를 들였다고? 그것도 에어로크 왕국까지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거짓말도 좀 그럴듯하게..."
"그리고... 아마 거의 다 왔을 거라네."
"...뭐?"
"스승을 미끼로 삼다니... 제자를 잘못 키웠어."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제야 주변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울리는 함성과 비명,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 그리고 기마의 울음소리.
...기마의 울음소리?
두두두두두두!
콰앙!
"스승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