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46화 (146/191)

〈 146화 〉 록셀

* * *

"진형을 좁혀라! 중갑 보병은 방패를 들어라!"

2왕자의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선두엔 선 중갑 보병들이 어깨를 더 가까이 맞댔다.

방패를 든 손이 덜덜 떨린다.

저 기병을 막을 방법이 존재는 할까. 등을 받치는 손길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땅이 울린다.

수천의 기마가 만들어내는 죽음의 진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작 십 분을 들고 있기도 힘들던 무거운 방패가 오늘은 유독 얇아 보인다. 아마, 저들의 속력을 늦추는 건 자신들 뒤로 수백 명은 죽어야 가망이 보일 것이다.

"기병의 수는 고작 이천이다! 자랑스러운 왕국군이여! 걸음을 멈추지 마라!"

정말 다행이었다.

두루마리에 쓰여 있던 그의 말대로 기병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왕국군의 지휘부가 공격을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아마 오천 기병이 그대로 있었다면, 이 거대한 진형이 반 토막이 났을 것이다.

진형이 붕괴된 상태에서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 토막이 난 진형은, 이미 그 형체가 일그러짐으로써 기능을 다 한다. 그다음 돌격에 더 큰 피해가 올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이천이라면 해볼 만 했다.

여전히 저들의 돌파를 막기는 어려웠지만, 왕국군 전부를 공격할 수는 없다.

저들도 숨을 쉬는 이상 말도 지치고 사람도 지칠 것이다.

그렇게 그 전투의 서막이 기병의 돌파와 함께 시작됐다.

꽈앙!

히이이이잉!

"끄아악!"

"아악!"

그 무거운 중갑을 입은 병사들이 하늘로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가장 선두에 섰던 기마들이 창에 찔려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러나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기마의 말발굽에 짓밟히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생물은 없으니까.

멈출 수 없는 자와 멈춰야 하는 자가 끊임없이 충돌한다.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아무렇게나 창을 휘둘렀다.

말 위에 탄 기병들은 홍해처럼 갈라진 길을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멈출 수 없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뒤따라오는 기마에 압사당한다.

창에 찔린 선두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기마가 자리를 채운다. 기병대의 선두가 계속해서 바뀐다.

검을 든 기사들은 자신의 차례가 오면 더욱 속력을 높였다. 사람의 바다 한가운데서 벗어나야 살 수 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진형의 오른편이 그렇게 어그러지는 동안에도 왕국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장 18만에 달하는 대병력이다.

겨우 2천의 기병에 발걸음을 멈추기엔, 그 수가 많았다.

부우­­­

선두에 선 병사들이 점점 더 발걸음을 빨리했다.

창을 들어 올리고, 방패로 몸을 가렸다.

긴장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함성을 질렀다.

맞은편 병사들이 보인다.

그들의 눈동자가 보인다.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눈빛이다.

왜 우리는 칼을 들어야 했는가.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무얼 위해 가족을 놓고 영지를 떠나왔는가.

이제 와서 묻기엔 늦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들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사실이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

장장 수 킬로에 걸친 전투가 드디어 시작됐다.

똑같은 눈빛을 하고, 똑같은 창을 든 병사들이 서로를 찔렀다. 그들의 차이점은 낡아빠진 갑주의 색뿐이었다.

"기병을 견제하며 최대한 전선을 길게 잡아야 합니다!"

2왕자의 외침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선의 끝부터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진형을 최대한 두껍게 유지해야 합니다! 저들의 기병에 부대가 반으로 돌파당하는 순간 명령 체계가 무너집니다!"

카인이 없다.

여기까지 왕국군을 이끌고 온 카인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낸 두루마리는 있다.

그가 하라는 대로 병력을 분산했다. 자신들이 할 일은 버티고 버티는 일이다.

반 조각이 난 보따리와 이미 봉인이 풀린 두루마리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었는가. 원래 같았으면 간수를 제대로 못 한 죄로 전령의 목을 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두루마리를 확인해달라는 말에 2왕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두루마리를 열었었다.

항복을 해야 하는 이유가 주저리주저리 쓰여 있는 부분이 익숙한 글씨로 덧대 있었다. 유일하게 편지에서 깨끗한 부분은 록셀 자작이 쓰러졌다는 내용뿐이었다.

「제국 기병의 수가 반수 밑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바로 전면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테라 성의 식량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 제국군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전선을 최대한 넓게 잡아야 합니다. 최소 사만 이상의 병력을 뒤로 숨겨 우테라 성으로 지원을 보내셔야 합니다.」

「우테라 성이 안전해질 때까지 본대를 붙잡고 계셔야 합니다. 패퇴시키면 더욱더 좋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려운 부탁투성이에 의문투성이였다.

기병의 수가 반으로 줄어든 것은 어떻게 알았고 우테라 성으로 지원을 보내면서 제국군까지 패퇴하라니.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자신 같은 부류인 줄 아는가 싶었다.

"우리의 전우들이 우테라 성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모두 전쟁터다.

그 전율스러운 공간에 선 2왕자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우테라의 희망이다!"

"와아아아!!"

그와 함께 왕자가 왼쪽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저 멀리 검은 깃발이 있는 곳이었다.

부우우­

"우리는 우테라 성으로 향한다!"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지그하르트 후작이 검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4만의 병력이 걸음을 옮겼다.

저들의 정신이 정면에 집중됐을 때 움직여야 한다.

혹여나 제국 기병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온다면, 모든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전선을 돌아 우테라 성으로 향하던 지그하르트 후작은 전장이 떠나갈 듯 거대한 함성에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

그리고 거기엔, 성문이 활짝 열린 우테라 성이 있었다.

­­­­­­­­­­

"성문이 열렸다! 밀어라! 안으로 들어가라!"

"막아라! 저들이 들어오게 둬선 안 된다! 막아!"

"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 소리, 성벽 위에서 돌이 떨어지는 소리,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화살 소리, 사지가 절단난 병사들의 비명.

아비규환이었다.

시체가 산을 이뤘고 성문 앞은 붉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호수의 수위가 올라감에 따라 한숨 돌렸던 병사들은 갑작스레 열린 성문을 막기 위해 달려가야 했다.

성문이 열렸다.

정말 끝이구나. 지금은 어떻게든 성문을 사수하지만, 언젠간 분명 뚫릴 것이 자명했다.

왕국군의 표정에 절망이 물들기 시작했다. 창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며 왕국군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기세등등한 제국군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성문을 막은 왕국군이 점점 뒤로 밀려나는 그 순간,

"원군이 왔다!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이여! 원군이 보이는가!"

"와아아아아아!"

성벽 위에 선 왕국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저 멀리 제국군과 싸우는 본대가 보였다.

우테라 성을 포기하지 않았다.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성문이 열렸을 때보다 더 큰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성문을 막던 병사들 역시 함성을 질렀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군이 오고 있다.

제국군의 함성이 잡아먹혔다.

그와 동시에 왕국군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전진했다. 성문으로 들어오려는 제국군을 다시 밀어냈다.

일어내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 성문을 사수한 하고 있으면, 원군이 와서 저들을 싹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기세를 타고 제국군을 몰아냈나 싶었던 그때,

"죽어라!"

"뭐, 뭐야!"

제국군의 등 뒤에서 화려한 갑주를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기, 기사다!"

"크아악!"

붉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은 등장과 동시에 허수아비를 베듯 왕국군 병사들을 토막 내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하며 제국군을 몰아내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우후죽순 쓰러졌다.

"클클."

그 모습을 본 슈티엔 후작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비싼 돈을 들여 기사를 육성하는 게 아니겠는가.

철옹성같이 성문을 틀어막던 왕국군 병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허름한 나무 창으로 단단한 갑주가 뚫리길 바라는 건 요원한 일이다.

"당황하지 마라! 협공으로 이음새를 찔러라!"

병사들을 다그치는 지휘관의 명령에도 성문을 막은 왕국군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났다. 붉은 갑주를 입은 자들의 검이 한번 번쩍일 때마다 피 분수가 터져나갔다.

"트, 틀렸어... 못 막을 거야."

"왜 우리는 기사가 안 오는 거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좁은 성문에서 싸우느라 그 현상이 더 심했다. 차라리 포위라도 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사들의 등 뒤엔 제국 병사들로 그득했다.

"크하하하!"

점점 성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제국군을 보며 슈티엔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장장 삼십 년을 넘게 서로를 두드리던 검과 방패가 드디어 결말을 맺었다.

끝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이게 옳았다.

고작 성문을 가로막는 게 전부인 그는 자신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의 목을 잘라 성벽 높이 걸어두리라.

우테라 성을 구하러 온 저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병사들을 제치고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목을 자르는 건 자신이 할 일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조금씩 조금씩 전진을 거듭하던 병사들이 모두 멈춰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주변 지휘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슈티엔 후작이 천천히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서 본 것은,

"록셀!!!!!!!!!"

"...오냐."

성문 앞에 우뚝 선 록셀 자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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