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불덩이
* * *
가을이 다가오는 초원은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갔다. 그제와 어제가 달랐고,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병사들은 아침을 깨우는 나팔 소리에 죽은 듯 누워있던 모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뜸과 동시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릴 만도 한데, 그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반응하기엔 너무 오래 맡았기에.
그들이 쥔 검날은 검붉게 말라버린 핏자국이 가득했지만, 그 역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칼날을 닦기엔, 막사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많았다.
언제 죽을까.
오늘? 아니면 내일?
의지를 뛰어넘는 열악한 상황에 병사들은 시체처럼 성벽에 올랐다.
십인장이 팔인장이 되고, 팔인장이 오인장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버틸 것이다! 제국군은 지금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아낙네가 주고 간 작은 빵조각이 시선을 빼앗는다. 어제보다 더 작은 빵조각이었다.
커다란 빵 덩이를 잘게 쪼개고 쪼개느라 사람의 손을 여럿 탔는지 거뭇한 때가 뭍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저들을 막을 것이다! 그대들의 가족을 위해! 그대들의 영지를 위해!"
딱딱하다.
입안의 수분을 모조리 빼앗아 가겠다는 듯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다.
그러나 수통을 들진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는 이 아침을 물과 함께 넘겨버리고 싶지 않았다.
"원군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식량이 떨어진 저들을 난도질하기 위해서!"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붙은 갑옷은 태양 빛을 반사하지 못했다. 갑옷 사이로 보이는 오른 어깨는 피로 물든 붕대가 칭칭 감겨있다.
"자랑스러운 병사들이여! 일어나라! 검을 들어라!"
그와 동시에 저 멀리에서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끝을 알리는 장송곡 같다. 아직 빵을 다 못 넘긴 병사들이 물을 마셨다.
붉은 성이 됐다.
그제보다, 그리고 어제보다 붉다. 어제까지 함께 막사를 쓰던 조원의 피가 더해졌다.
하얗던 성은 날이 갈수록 붉어졌다.
그리고 그때,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제국군을...!"
여전히 검을 높이 든 부관이 사기를 올리기 위해 소리를 높였지만 병사들은 부관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등 뒤를 바라봤다.
태양을 닮은 듯 동그란 구체다. 초자연적이고 기이한 상황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불덩이를 향했다.
그리고 이내, 붉은 불덩이가 붉은 성을 향해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하늘에 뜬 불덩이를 보며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땅만 보며 농사를 짓던 병사들에게 마법이란, 신의 영역이었다.
주먹만 하게 보이던 불덩이가 점점 커져 보인다. 사람만 해지다가, 순식간에 집채만 한 크기가 됐다.
그리고,
콰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문이 부서졌다.
"크하하하!"
야수의 즐거운 포효가 주둔지를 쩌렁쩌렁 울린다.
밝은 미소를 지은 슈티엔 후작이 창백한 안색의 필립 자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네. 아주 잘했어."
"...감사합니다."
제국군에겐 희망의 빛이요. 왕국군에겐 불지옥처럼 보였으리라.
단단하던 성문이 불길에 휩싸였다. 반쯤 반파된 성문 너머로 우왕좌왕하는 왕국군이 보인다.
오늘을 위해 참고 또 참았던 비밀 병기였다.
장마로 인해 젖었던 성문이 마르고, 저들의 사기가 가장 떨어질 때를 노렸다.
"이제 들어가서 쉬게. 고생했네."
"...예."
그는 이제 쓸모를 다했다.
비틀거리며 막사로 돌아가는 필립 자작의 등을 보며 슈티엔 후작이 아쉬운 듯 혀를 한 번 찼다.
그의 마법 실력이 조금 더 좋았다면 단발성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긴, 그랬으면 그의 작위도 자작이 아니었겠지.
아쉬움을 달랜 후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병사들의 속도를 높여라. 오늘 저녁은 우테라 성에서 먹는다."
"알겠습니다."
저 성벽 어딘가 있을 그를 떠올렸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절망? 분노? 좌절?
네놈을 위한 내 마지막 선물이 어떤가.
천천히 갑주를 점검했다. 찬란한 햇빛에 비친 갑옷이 햇빛을 반사한다.
그의 목은 자신이 직접 취할 생각이었다.
이제 더이상 방해꾼은 없다.
왕국군 본대는 오늘 이후 미련없이 뷔른 성으로 돌아갈 것이고, 왕국 기병은 자신이 보낸 기병에 처참히 박살 나고 있을 것이다.
"...후작님.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뭔가."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서서히 우테라 성으로 전진하는 병사들을 보는 그때 참모 중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즐거운 상상에 빠져있던 슈티엔 후작에겐 별로 반갑지 않은 보고였다.
"아마 왕국군이 눈치를 채고 새벽에 기습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이라도 부대를 보낼까요?"
"됐네."
이미 수문이 열렸다면 늦었다. 수위가 다시 낮아질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다.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미 성문은 열렸는데.
병사들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침없었다. 빠르면 점심, 늦어도 저녁이면 완전히 점령하리라.
뒤늦게 눈치를 채고 수를 쓴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
그런 건 성문이 열리기 전에나 했어야 한다.
슈티엔 후작이 다시 한번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끝이다.
저 우테라 성을 점령했다가 뒤로 물러나 보급 수레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다시 시작이다.
뷔른 성을 지킬지, 쌍둥이 성을 지킬지 다시 한 번 선택권을 강요하면 된다.
그러나, 슈티엔 후작의 즐거운 바램과는 다르게 지평선 위로 떠올랐던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반파된 성문은 굳건하게 제국군을 가로막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가, 갑자기 저들의 사기가 올랐습니다. 무력하게 접근을 허용하던 저들이 어느 순간 돌변했습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지휘관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는 성문을 지키던 왕국군보다 슈티엔 후작이 더 무서웠다.
"성벽 위에서 기름을 떨어뜨려 병사들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도 조만간이니..."
"후작님!!! 급보입니..."
막사를 벌컥 열고 들어온 부관은 분노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후작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
"왕국군 본대가 접근 중입니다. 그 수는 십팔만! 전 병력입니다!"
"...뭐?"
이제 와서?
성문이 열릴 때까지 내둥 가만히 있다가 인제 와서 공격을 한다고?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분노로 가득했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시간, 앞으로 두 시간 주겠다."
"예, 예?"
"두 시간 안으로 성문을 열어라. 오늘 저녁에 그 입으로 밥을 먹고 싶다면."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허둥지둥 막사를 빠져나가는 지휘관을 보며 후작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신머리가 빠진 놈 같으니라고.
꼭 이렇게 목숨을 걸어놔야 전력을 다한다.
그리곤 중간에 난입했던 부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병을 넓게..."
거기까지 이야기한 후작은 다시 입을 닫았다. 오천의 기병 중 삼천의 기병이 왕국 기병을 막기 위해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남은 이천의 기병을 최대한 활용해라. 시간만 끌면 된다."
"알겠습니다."
무려 18만 대 10만의 전투다.
팔을 들어 목을 잘라도 하루 종일 걸린다. 피해는 좀 크겠지만, 우테라 성문만 열리면 저들은 알아서 후퇴를 할 터였다.
허나 슈티엔 후작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묘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기병이 자리를 비운 사이 때마침 공격을 한다라...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마치 기병이 자리를 비우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후작은 괜스레 드는 께름칙함을 애써 떨쳐냈다.
아니다.
그저 우테라 성이 위험에 빠지자 다급한 마음에 공격했을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다는 황당한 의심보단 그게 더 합리적이었다.
지휘 막사를 천천히 벗어났다.
붉은 우테라 성과 노란 깃발이 보인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등을 진 제국군과 저 멀리 녹색 깃발이 보인다.
반수가 넘는 기병이 자리를 비운 게 아쉬웠다.
이천의 기병으로도 저들을 혼비백산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만, 수가 너무 적었다.
허나 괜찮다.
저 우테라 성 너머 어딘가에서 왕국군의 유일한 기병들이 초원에 몸을 눕히고 있을 테니까.
뿔피리 소리가 전장에 퍼졌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전투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제국군의 함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드디어 열렸다.
장장 20일을 두들기던 성문이 드디어 열렸다.
피에 젖은 노란 깃발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열린 성문 사이로 제국군이 조금씩, 조금씩 전진을 시도했다. 이미 기세는 기울었다.
끝난 것이다.
"크하하하!"
슈티엔 후작이 광소를 터트리며 말을 불렀다.
자, 이제 갈 시간이다.
등 뒤로 들려오는 뿔나팔 소리와 왕국군의 진군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지만, 슈티엔 후작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상관없다.
이미 늦은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악을 하고 날뛰어봐야, 성문은 열려버렸다.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말에 탄 후작이 성문으로 향하려는 그때,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제국군의 함성을 잡아먹는 아주 커다란 함성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