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최후의 아침
* * *
"진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안 나왔잖아."
"..."
"그러게 누가 그렇게 의심스럽게 기어다니라 했나?"
내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칼슨의 표정이 볼만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지 얼굴이 빨갰다.
"자네도 목숨줄이 꽤 질기군."
"..."
"그거 아는가? 자네가 누워있던 장소에서 오십 걸음 앞에 제국군이 숨어있던걸?"
"..."
"왕국군 복장만 아니었으면 아마 그대로 목이 떨어져 나갔을 텐데."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아마 성격 더러운 참모라고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를 하고 있을 거다.
참 놀리는 맛이 있는 병사였다.
"손바닥은 좀 괜찮은가?"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했으면 변장한 제국군으로 오해받고 목이 잘렸을 텐데?"
"..."
자신의 상처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는지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참 표정 못 숨기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기밀인데... 듣고 싶나?"
"안 듣고 싶어졌습니다."
"크크큭."
결국 웃음이 터졌다. 오랜만의 미소였다.
아직도 서늘한지 목을 연신 쓰다듬는 그가 시선을 피했다. 오래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보따리 한 번 열어 봐."
"...예?"
"열어 보라고."
"...안 됩니다."
왕국군 주둔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 열 수 없다는 건가?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해했나 보다.
생각보다 투철한 임무 의식인데?
"괜찮으니까 열어 봐. 어차피 가면 지휘관들끼리 돌려 보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
이 세상 유도리는 다 챙기게 생겼는데 의외로 꽉 막혔다. 마음 같아선 본대까지 함께 가서 두루마리 속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내 말에 표정이 잔뜩 굳은 그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 갈 편지를 가로챌 줄은 몰랐다느니 그런 말을 하려는 건가?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상상을 뛰어넘은 대답이었다.
"포장을 뜯으면..."
"뜯으면?"
"...포상금을 못 받습니다."
"..."
돈보다 소중한 게 뭐가 있을까.
가족? 연인? 우정?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 아닐까.
내 눈짓 한 번에 로그멜 경의 칼이 뽑히는 걸 본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비록 뒤로 돌아 그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 썩을 대로 썩었을 것이다.
검끝으로 단단히 밀봉된 보따리를 끊자 고급스러운 두루마리가 하나 보였다.
왕국군 본대로 갈 편지였지만, 왕자는 내가 먼저 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말 없을 것이다. 이래 봬도 총애를 듬뿍 받고 있지 않은가.
무슨 말이 쓰여있을지는 예상했다.
식량 창고가 텅텅 비어있는 것을 보고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렸으니까.
내가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실링 왁스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살살 풀며 입을 열었다.
"록셀 자작님은 잘 계시나?"
구슬로 확인했는데 모습이 안 보이더라.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안부 인사를 하는 척 떠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개 병사인 그가 알까 싶었지만, 혹시나 해서.
"...그게..."
"왜 대답이 없..."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영 시원찮다. 역시 모르나 싶어 눈으로는 편지를 읽으며 칼슨을 재촉하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내가 원하던 대답은 두루마리 안에 있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나 했다.
정말 혹시나 했다.
이곳까지 돌아오는 내내 보이지 않는 스승님을 보고 혹시나 했다.
그래도 아니겠지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지실 분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등을 자극하는 불길함을 애써 억누르고 달려왔다.
「...또한 우테라 성을 지휘하시던 록셀 자작께서는 지병으로 쓰러지신 지 일주일이 넘으시어...」
「...성 내에 있는 신전으로 급히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계시나 별다른 차도가 없어...」
몇 번을 읽어도 편지 속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두루마리를 붙잡은 두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93으로 떨어졌던 스승님의 숫자가 떠올랐다.
...그러면 안 됐다.
스승님께 무거운 임무를 드려선 안 됐다.
그저 일시적이라 생각했다. 안색은 여느 때처럼 똑같았기에 애써 불안감을 내리 누르고 성을 떠났었다.
그러면 안 됐다...
내 잘못이야.
두루마리를 내팽개치고 칼슨의 멱살을 붙잡았다. 꽉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된 거지? 스승님이 왜 쓰러져."
"...모, 모릅니... 큭..."
"똑바로 이야기해!!!"
"도련님!"
옆에 있던 로그멜 경이 나를 붙잡았다. 내 입에서 나온 내용에 그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내 손에서 빠져나간 칼슨이 잠깐 사이 목이 졸렸는지 컥컥거렸다.
"자, 자세히는 모릅니다. 광장에서 병사들을 향해 연설을 하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갑자기?"
"...예."
"..."
힘이 탁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뷔른 성에서 발견했을 때 즉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왜 그냥 넘어갔을까.
숫자가 떨어진 사실을 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까.
"...우테라 성에 남은 식량은 내일 하루 치가 전부입니다. 아마 내일 아니면 모레가... 한계입니다."
칼슨의 말이 맞았다. 두루마리 안에 쓰인 내용 그대로였다.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다 천천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남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는 남의 세계라 생각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고 내 집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삭이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처음엔 세계에 적응하느라 정을 줄 여유도 없었고, 줄 생각도 없었으니까.
막무가내로 마차에 올라탄 노인이 떠올랐다. 크렉스필을 두다 말고 벌컥 화를 냈었다.
어이없게 시작한 인연은 결국 사제지연이 됐다. 그럼에도 나는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저 선생으로 그를 대하려 했다.
...그러나 욕심이었나보다.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얼굴을 맞대놓고 정이 들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나보다.
우테라 성이 열린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후퇴가 정답이다.
평원에서 제국군과 정면 대결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니까.
너무 늦어 버렸을까.
우테라 성을... 스승님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눈을 감고 있음에도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전면전을 하자고 해야 할까.
고작 스승님 한 분을 위해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게 옳을까.
...스승님을 구할 수는 있을까. 만약 본대마저 위험해지면?
만약 스승님을 구해도 희생당한 병사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성과 감성이 싸우기 시작했다.
후퇴와 반격 사이에 선 두 감정이 서로를 공격했다. 전쟁 영웅과 그저 스승님이 보고 싶은 제자가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스승님을 포기하면 다시는 이 세계 사람들에게 정을 줄 자신이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온 대륙을 통일할 때까지.
그때마다 이런 고뇌에 휩싸일 자신이 없었다. 매번 정을 붙인 인연을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니까.
나는 대인배가 아니니까...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만약 내가 우테라 성에 있었어도 그렇게 억지를 부렸을 것이냐?'
후작의 목소리였다.
참 뜬금없는 질문이었다.그때도 지금처럼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영웅도 슬퍼할 때가 있었다. 그 모습이 영웅답지 못하다 욕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터졌었다.
후작의 이 한마디에 모든 중압감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 자책하지 말아라. 나는 여전히 네가 자랑스럽다.'
이미 정을 줘버린 인연의 진실된 위로였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다는 듯한 그 말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었다.
다시, 눈을 떴다.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로그멜 경과 칼슨이 보인다.
천천히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그래.
나는 영웅이 되기엔 나약하다.
몇 년 전이었다면 어쩔 수 없다며 우테라 성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이 세계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려 했으니,
그러나, 이젠 불가능하다.
시아라, 엘라, 후작... 그리고 스승님까지.
...이젠 안 된다.
아니, 못 한다.
아무 미련 없이 포기하기엔, 이미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병사들이 나를 욕할 수도 있다.
헛된 희생이라 원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겨우 이런 남자니까.
모두 떠안고 가겠다. 그게 내 그릇이라면, 그대들의 희생은 모두 떠안겠다.
소인배라고 불릴 지라도, 나는 스승님을 버리지 못한다.
"두루마리 좀 다시 주세요."
"예? 예..."
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왕자에게 할 말이 많았다.
항복을 보고하는 글 위로 새로운 글이 쓰여진다. 지난 사흘간 구슬을 보고 또 보며 세웠던 전략을 세세하게 적어나갔다.
나를 원망해라.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대들의 희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게 하겠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겠다.
호수 너머 동쪽이 점점 밝아졌다. 새벽 어스름이 깊게 깔리며 사위가 점점 선명해진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종이 위를 돌아다니는 펜을 조금 더 빨리 놀렸다.
그렇게 오 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모든 글을 쓰고 두루마리를 다시 조심스럽게 접었다.
"로그멜 경. 칼슨을 태우고 본대에 다녀오세요.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서쪽으로 내달리는 두 인영의 등 뒤로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설킨 전투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