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43화 (143/191)

〈 143화 〉 씨앗이 열매로

* * *

"...남은 식량은?"

"내일...이 마지막 배급입니다."

"..."

사방이 붉고 검다. 하얀 자태를 뽐내며 고고하게 서 있던 우테라 성은 어디 가고 불에 타는 가옥만이 보인다.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린다. 급히 천으로 칼이 지나간 자리를 묶었지만, 오른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전투는 정말 위험했다. 몇 번이나 성벽을 넘은 제국군을 막기 위해 온몸으로 적들을 밀어냈다.

결국 오늘도 버텼다.

떨어지는 해와 동시에 물러난 제국군은 내일을 기약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러나 우테라 성 병사들은 쉴 시간이 없었다.

화살을 꽃은 채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양동이를 들었다.

해는 졌으나 우테라 성은 밝았다. 가옥으로 떨어진 불화살은 주민들의 잠자리를 불태우고 있었다.

온몸을 감싼 하얀 천이 붉게 물들었으나 그 누구도 불평을 터트리지 않았다. 고작 붕대를 감은 거로 엄살을 피우기엔, 사지가 온전한 병사가 몇 없었다.

"...원군은?"

"계속해서 공성을 방해하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식량.

식량이 문제였다.

제국군보다 무서운 것이 바닥을 드러낸 식량 창고였다.

배급을 반으로 줄이고, 그 배급을 다시 반으로 줄였다.

손바닥만 한 빵으로 아침을 맞이한 병사들은 해가 지면 조금 더 작은 빵을 받아야 했다. 목숨을 바쳐가며 성벽을 지킨 대가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이젠 그마저도 식량이 바닥난 지경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누군가가 퍼트렸던 씨앗은 최적의 양분을 받아먹고 그 잎을 틔우고 있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각오를 다져야 할 지휘관들의 표정에선 희망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면 정말 오래 버틴 게 아닐까.

오만의 병력으로 20일을 버텼다. 방패가 쓰러지고 난 이후 닷새나 더 버텼다.

오만이었던 병력이 이제는 삼만이 채 안 됐다. 이제는 네 면의 성벽을 모두 사수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식량이 다 떨어진 병사들이 언제까지 창을 들까.

길면 모레...

짧으면 내일.

"부관님..."

결국, 망루에 모인 누군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한마디에 선임 부관도, 관리들도 올 게 왔음을 느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부족한 식량과 낮은 성벽으로 제국군을 20일이나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모든 지휘관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린다. 하얀 갑주를 붉게 물들인 중년의 남자가 어두운 얼굴로 땅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임 부관을 바라봤다.

그리고 결국 선임 부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수영을 잘하는 병사들을 차출하게. 왕자님께 항복 의사를 밝히고 뒤로 물러나라고 전달해야 하네."

"..."

말에는 힘이 있었다.

비옥한 토지에 심은 씨앗은 결국 그 씨앗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던 선임 부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결국 나온 것이다.

항복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은 항복해도 본대는 살려야 한다.

그래야 뷔른 성을 지키고, 뷔른 영지를 지킨다.

이들이 쌍둥이 성을 점령하고 뷔른 성으로 움직일 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왕국군이 안전하게 후방으로 물러날 시간은 필요했다.

"록셀 자작님이 쓰러진 사실과 식량이 없다는 것. 그래서 모레... 항복을 할 것이라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우테라 성 동쪽으로 난 수로를 빠져나온 한 인영이 가죽으로 단단히 밀봉한 보따리를 등에 매달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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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총공격을 할 것이다."

지휘관들을 바라보는 슈티엔 후작의 눈이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천막 사이로 검게 그을린 우테라 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정말 아쉬웠다.

성벽 끝까지 올라탄 제국군은 성벽을 넘을 듯 못 넘어가며 종일 후작의 애를 태웠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우테라 성을 막는 왕국군의 반격이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었다. 내일 드디어 성문이 열리리라고 후작은 직감했다.

"우테라 성을 공격하는 병력의 수를 늘린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왕국군의 본대를 막는 병력의 수가 줄어듭니다."

"성문만 열리면 모든 게 끝이다. 성문이 열린 순간 저들은 뷔른 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어."

미친 게 아니라면 성문이 열렸는데도 대회전을 할 리가 없었다. 하려면 지난 20일 동안 진작 했어야 했다. 게다가 저들은 기병마저 없지 않은가.

허나 슈티엔 후작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놈이 막는 성이 이렇게 허술하게 열릴 리가 없다. 무슨 변고가 있던가... 아니면 함정이라는 뜻이다."

장장 삼십 년을 넘게 전장에서 칼을 맞댔다.

아무리 우테라 성벽이 낮고 호숫가가 드러났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뚫릴 그가 아니었다.

묘한 꺼림칙함이 후작의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변고가 있었을까. 아니면 함정일까.

며칠 전만 해도 멀쩡히 성을 지휘하던 그가 쓰러져?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등을 노리는 왕국군의 본대, 생각보다 단단하지 못한 성벽, 두 번이나 습격당한 보급.

후작의 신경을 긁어대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내일부로 끝이다. 성문이 열리고 록셀 그놈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보급 부대를 습격한 저들의 기병은 어디 있지?"

"...보급 부대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던 곳은 이곳에서 닷새 거리였습니다. 우테라 성의 위기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을 테니 아마 여전히 그곳에서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여나 돌아오는 중이라 해도 아직 이틀 거리에 있습니다."

그 말에 슈티엔 후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 걸림돌까지 사라졌다.

그러나 확실하게 확인사살은 해야겠지.

"삼천의 기병으로 복귀하는 왕국군의 기병을 막아라. 혹여나 내일 난입하면 골치 아파진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관리가 다급히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슈티엔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원군을 견제하는 병력 중 이만을 공성으로 돌린다."

그렇게 되면 공성을 하는 병력이 6만, 왕국군 본대를 막아서는 병력이 10만이었다.

18만이나 달하는 왕국군 본대를 막기엔 버거웠지만, 시간만 끌면 된다. 어차피 성문이 열리면 저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으니까.

무리한 공성을 펼치느라 소모된 4만의 병력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느긋하게 공성을 하기엔 식량이 모자랐다.

"우테라 성을 점령하면 부대를 반으로 나눠 보급 부대를 호위한다. 후에 식량을 충원하고 뷔른 성으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우테라 성을 점령하고 나면 보급 부대를 방해할 요소도 사라진다. 며칠 굶긴 하겠지만 보급만 도착하면 그때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면 되는 일이다.

제국에 발을 들인 더러운 왕국군 놈들의 발목을 모조리 잘라버리리라.

그리고 그 첫 희생양은 우테라 성을 지킬 록셀이 될 것이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질긴 인연도 끝이다.

자신이 직접 그의 목을 잘라 최후의 승리자임을 선포할 생각이었다.

슈티엔 후작의 눈이 열망으로 한층 더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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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흉이 남은 상처가 따끔거렸다. 오랜만에 수영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호숫가를 비추는 횃불에 긴장이 돼서 그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아이고..."

이러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게 생겼다.

등에 멘 가죽 보따리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가죽 안에 물이 들어갈까 호숫가를 지키는 제국군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면서 헤엄을 친지 벌써 삼십 분이 지났다.

서서히 멀어지는 횃불을 보며 제국군이 지키지 않는 구역까지 계속해서 남쪽으로 헤엄을 쳤다.

"아이고 마누라... 남편 죽어."

차라리 전쟁에 나오지 말 걸 그랬다. 그때 그 젊은 참모가 집으로 돌아가라 할 때 돌아갔어야 했다.

이렇게 우테라 성에 갇혀 죽을 날만 받아놓고 기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놈의 돈이 뭐라고... 끄응."

입으로 쉼 없이 불평을 하면서 조심스레 팔을 저었다. 발로 빠르게 물장구를 치면 수 배는 빨랐겠지만, 아마 그랬다면 감시병이 날린 화살에 꼬치가 됐을 것이다.

성벽에 드러누워 오늘 하루도 살았음에 감사를 하는 도중 백인장이 십인장들을 호출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있냐길래 먹을 게 없어 호수에서 물고기라도 잡나 싶어 손을 들었다.

몇 마리는 꽁쳐두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커졌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앞으로 피범벅이 된 갑주를 입은 높으신 분이 오더니, 전령을 뽑는다고 했다.

당연히 바닥에 얼굴을 박고 모른 척했지만, 그다음으로 들려오는 포상금 액수에 절로 손이 들렸다.

...그랬으면 안 됐다.

이렇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으면 절대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원래 계획대로 죽은 척 드러누워 있다가 기회를 봐서 뷔른 성으로 도망쳐야 했다.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남쪽으로 움직였다. 호숫가에 세워진 횃불이 멀어지며 서서히 사위가 어두워졌다.

저 앞에 쌍둥이 산이 보인다. 분명 저기에도 제국군이 있다고 했다. 혹여나 산 위에서 자신을 발견할까 더 조심스레 팔을 저었다.

처음 성을 나올 땐 몰랐는데 남쪽으로 한참 이동하다 보니 호수 수위가 높아진 기분이다. 호수 가장자리마다 바닥이 드러나 진흙밭이었는데 조금 사라진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어째 점점 수영도 어려운 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기도 하고...

알 게 뭔가.

자기는 일단 등에 멘 편지만 전하면 된다.

그 후에 좀 쉬다가 우테라 성이 무너지는 걸 보며 원군에 합류해 뷔른 성으로 복귀하면 된다.

다시는 이 지옥 같은 전쟁통에 참여 안 해야지.

이번 포상금만 받으면 한 일 년 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내려오자 제국군이 세워놓은 횃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며 사위가 어두워졌다.

남쪽으로 너무 내려왔나 싶다. 제국군 주둔지를 돌아 왕국군 본대까지 가려면 갈 길이 바빴다. 혹여나 해가 뜨면 들키기 딱 좋았다.

천천히 호수 가장자리로 헤엄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풀벌레 소리, 이제 막 일어난 올빼미 소리... 한참을 물속에 주저앉아 주변을 살폈다.

다 와서 걸리면 이보다 억울한 게 없다.

보따리 속에 든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군에 들켜서 좋을 일은 없었다.

아주 천천히 호수를 빠져나왔다.

혹여나 들킬까 몸을 바짝 엎드리고 풀숲으로 기어갔다. 쌍둥이 산과 가까워져 그나마 풀숲이 높아 몸을 숨기기 좋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점점 더 커진다. 긴장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주인 죽어 이놈아. 좀 천천히 뛰어.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주변을 살피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가만히 있어라."

서늘한 칼날이 목을 겨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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