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붉은 성
* * *
드넓은 초원은 피식자가 몸을 숨기기 어렵다. 그리고 그건, 포식자라고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복도 불가능하고, 습격도 불가능했다. 그저 기병의 힘을 믿고 게릴라전을 펼치는 게 최선이었다. 마치 초원의 마적처럼.
"이제 돌아가실 겁니까?"
"하던 건 마무리하고 가야죠."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무 한 그루 없다. 몽골 어딘가라도 해도 믿을 만큼 드넓은 초원뿐이다.
"시원하게 잘 타네요."
"전부 다 불태우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적이 너무 많았어요."
저 멀리 수레에 난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제국군이 보인다. 첫 습격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수레와 병사였다.
"다급하긴 했나 봅니다."
처음과 달리 구릉에 숨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방향을 꺾지도 않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지도 않았다.일 만에 달하는 병력을 믿은 건지, 아니면 우테라 성을 감싼 본대의 상황이 급했는지 곧장 일직선으로 가는 중이었다.
카인은 그런 보급 부대의 뒤를 노렸다. 중앙을 돌파하기엔 적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별 손실 없이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수레를 불태울 수 있었다. 적이 정신을 차리고 대열을 맞추기 시작할 무렵 카인은 미련 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저들이 보이는 곳에서 따라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숨어서 따라가는 게 좋을까요?"
"..."
내 말에 로그멜 경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이 약간 불량하다.
"...저들을 말려 죽일 생각이면 대놓고 따라가는 게 좋아 보입니다."
"그렇죠?"
자기도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한 소리 할까 하다가 말았다.
"기병을 둘로 나누세요. 저들이 쉴 때마다 공격하는 척 움직이겠습니다."
"예."
우테라 성까지 남은 거리는 약 사흘.
사람의 두 다리가 말보다 빠를 수는 없다.
결국 저들은 쫓아내지도, 달아나지도 못한 채 우리를 달고 가야 한다.
"척후를 더 늘리세요. 혹시나 저들의 원군이 올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드넓은 초원이다. 낮게 자란 풀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서쪽을 바라봤다.
우테라 성이 있을 곳을.
자신이 보급 부대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우테라 성이 안전해진다. 그리고 그 성에 있을 스승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는데 식사는 잘하고 계실까.
지난겨울 기침을 그렇게 하시던데 이번 전투가 끝나면 뷔른 성으로 모셔야겠다.
구슬로 직접 스승님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구슬의 사정거리 밖이었다.
잘하고 계실 거다.
이 대륙 그 누구보다 수성을 잘하시니까.
시선을 다시 제국군으로 옮겼다. 여전히 수레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정신이 없다.
감상은 나중에 빠져도 된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지금 식사를 시작하세요. 식사를 끝나는 대로 접근하겠습니다."
"예."
괜히 서쪽을 바라봤나.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무래도, 조금 빨리 돌아가야 할 듯싶었다.
"버텨라! 저들이 곧 물러날 것이다!"
얼굴에 튄 핏방울에 세상이 붉다. 끈적거리는 피가 볼을 타고 흘렀다. 초원 너머로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붉은 세상이 노을로 더 붉게 물들었다.
"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병사가 뒤로 넘어갔다. 어깨를 관통한 화살이 등 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괜찮다. 이 정도면 죽지는 않는다.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그를 뒤로 잡아당겼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곧바로 뒤에 있던 병사가 메꿨다.
"정신 차려라! 괜찮다!"
정말 다행이다. 조금만 밑에 맞았다면 심장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자연히 주변 병사들이 움츠러들었다.
성벽 위로 날아오는 화살엔 눈이 없다. 운 좋게 어깨를 맞고 후방으로 빠질지, 아니면 미간에 꽂힐지는 신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라! 사다리를 밀어!"
안 된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사다리를 통해 올라오는 제국군을 막지 못한다. 한번 저들에게 성벽을 내어주면 다시 밀어내기 힘들다.
부관의 윽박에 병사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얗던 성벽이 붉게 물들었다. 물이 빠져 진흙 구덩이가 된 해자는 붉은 갑주를 입은 시체로 가득했다. 사다리를 올라오는 제국군의 핏발 선 눈이 보인다.
아비규환이었다.
"해가 지고 있다! 급한 건 저들이다! 침착을 유지해라!"
모른다.
정말 급한 게 자신들인지 저들인지 사실 모른다.
그럼에도 부관은 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다독였다.
핏방울이 들어간 왼눈이 따가웠다.
"자리를 지켜라! 사다리를 밀어내라!"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온 제국군 하나를 푹 찔렀다. 피칠갑이 된 얼굴에 다시 피가 튀었다.
여유롭게 얼굴을 닦을 시간은 없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이 귓가를 어지럽게 울린다.
해야.
빨리 져라.
빨리 좀 넘어가라.
손을 타고 흐른 핏물에 검을 잡은 손이 미끄럽다. 부관은 검을 더 꽉 쥐었다.
"헤르트의 방패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조금만 버텨라!"
간절한 소원이었다.
자신의 바람이었다.
자신의 미약한 능력으로는 도저히 우테라 성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방법을 몰랐다. 그저 고함이나 지르고 목이나 딸 줄 안다.
방패가 일어나야 한다.
우테라 성을 지휘할 방패가 필요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검을 너무 강하게 쥔 탓에 손에 쥐가 나기 시작했을 무렵, 기다란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제국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화살이 스친 귀가 그제야 화끈거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탓에 연신 뜨거운 숨이 목을 때렸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도통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해가 결국 떨어졌다.
"적들이 물러난다! 부상자를 옮겨라!"
"와아아아아!"
멀쩡한 병사가 없다. 남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쓴 병사들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뜨거운 함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함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체력이 다한 병사들이 하나둘 성벽에 몸을 눕혔다.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을 힘도 없었다.
"끄응..."
"용케 살았구만."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음세."
하루를 버텨 목숨을 연장한 것에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해가 뜨면 다시 재현될 지옥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어쨌든, 저 해자에 박힌 시체들보단 나은 삶 아니겠는가.
치맛자락에 빵을 담은 아낙네들이 연신 눈물을 흘리며 성벽을 올랐다. 계단에 흐르는 끈적한 피가 아낙네들의 발을 쩍쩍 붙잡았다.
"나는 좀 큰 거로 주소."
"자네만 입인가?"
"자네보다 셋은 더 황천으로 보냈으니 괜찮지."
바닥에 몸을 눕힌 병사들이 기이한 여유를 부렸다. 사선을 넘어 담력이 강해진 걸까.
이 빵 한 조각을 먹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걸까.
아낙네들이 건네준 빵을 든 병사들이 하나같이 빵을 노려봤다.
"...맛은 또 끝내주네."
"..."
어쨌든, 저 해자에 박힌 시체들보단 나은 삶이다.
"우테라 성을 향한 공세가 본격적입니다. 이러다 정말 함락당할지도 모릅니다."
"...록셀 자작이 있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식량도 아직 여유가 있을 테고요."
계산대로라면 아직 보름치가 남았다. 아직 카인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만, 다급하게 공성을 시작하는 저들을 보며 기습이 성공했구나 직감했다.
"분명 우테라 성보다 제국군의 식량이 더 빨리 동날 것입니다. 저희는 원래 계획대로 제국군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럼에도 2왕자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연신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전장에 서서 그럴까. 아니면 카인 덕에 그동안 쉽게 이겨 정신이 해이해진 걸까.
"카인 참모에겐 여전히 연락이 없습니까?"
"...예. 허나 제국군의 반응을 보면 분명 성공한 듯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들이 이렇게 다급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에 2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을 향해 다가가는 최전방 병과는 중갑 보병이다. 물이 빠진 호숫가를 걸으면 맨몸으로도 발이 푹푹 빠진다.
두꺼운 철갑옷을 입은 그들은 더욱 운신이 어려울 터.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공성을 하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럼 원래 계획했던 작전을 유지하겠습니다. 다만, 공성의 기세를 늦추기 위해 내일부턴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하겠습니다."
카인이 작전을 성공했을 거라는 예상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2왕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때 그가 있으면 명쾌하게 답을 내려줄 텐데...
항상 신기할 정도로 답을 딱딱 내리던 그였다. 오늘 따라 유독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잘 타는군요."
"그러게요."
수레를 먹이 삼아 뿜어져 오르는 검은 연기가 푸른 하늘로 치솟는다. 장장 사흘에 걸쳐 적을 괴롭힌 성과가 있었다.
사흘 동안 적들의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빙빙 돌다 일직선으로 달려가면, 제국군은 그때마다 행렬을 멈추고 허겁지겁 대열을 갖췄다.
그러나 순순히 공격해 줄 생각은 없었다.
맹렬하게 달리는 척 저들을 긴장에 빠트려 놓고 유유히 말을 돌려 거리를 벌렸다.
그때마다 제국의 지휘관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알 게 뭔가. 그러라고 하는 건데.
밤에도 다를 것은 없었다.
기병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휴식을 취했고 나머지 반은 숙영지를 맴돌았다.
그리곤 한 시간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격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돌격하다가 다급한 북소리와 함께 숙영지가 분주해지면, 다시 유유히 거리를 벌렸다.
나 역시 잠을 반으로 줄여야 했지만, 저들은 잠을 못 잤다. 그것도 무려 사흘이나.
내가 좀 힘들어도 상대가 괴로워한다면 그것보다 뿌듯한 일이 없다.
원래 인성 질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법 아닌가.
"이제 슬슬 본대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보이네요."
"알겠습니다."
밝은 표정을 한 로그멜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어느새 나보다 그가 더 즐기고 있었다.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숙영지를 돌진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출발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식사를 해결하세요."
"예."
이제는 익숙해진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푸르릉거리는 말에게 당근을 하나 건네주고 바닥에 주저앉아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분명 우테라 성이 보일 것이다. 사흘 동안 보급부대를 따라오느라 서쪽으로 꽤 많이 이동한 상태였다.
시야가 점점 높아진다. 신이 무성의하게 색칠한 듯 온통 초록빛이다.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수레가 보인다. 잠깐 내가 만들어낸 광경을 구경하다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스승님 얼굴이나 볼까.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 설렘과 초조함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더욱더 빠르게 움직였다.
저 멀리 호수가 보인다. 그럼 그 옆에 우테라 성도 보일 것이다.
'...?'
원래 우테라 성과 호수가 거리가 멀었나?
호수와 우테라 성 사이에서 붉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자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자연스레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붉은 정체가 성벽에 새겨진 제국군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얗던 우테라 성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급히 성벽 위를 훑어봤다. 피칠갑을 한 병사들이 연신 성벽 밖으로 창을 찌르는 중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비명과 절규가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스승님.
스승님은 어디 있지?
성벽 위를 빠르게 날았다. 분명 스승님이라면 성벽에 계실 터였다.
수없이 많은 화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 스승님이 입었던 하얀 갑주를 찾아다녔다.
'...'
없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성벽을 돌았지만, 망루엔 부관들만이 있었다.
...왜?
며칠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이번엔 성 내부를 살폈다.
성벽을 넘은 불화살이 가옥을 불태우고 있었다. 사지가 잘린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들리진 않았지만, 들렸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주민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깨끗한 천을 들고 상처를 압박하는 병사들도 보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스승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대전에 계실까.
아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아까보다 조금 느려진 속도로 천천히 내성으로 향했다. 은은했던 불안감이 점점 더 강하게 치솟는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스승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던 나는 전혀 뜻밖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바닥을 드러낸 식량 창고를.
굳은 얼굴의 관리들을...
"로그멜 경."
"예?"
눈을 뜨니 마른 빵을 우물거리는 로그멜 경이 보인다.
여유롭게 그거 먹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우테라 성이 위험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