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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141화 (141/191)

〈 141화 〉 말에는 힘이 있다

* * *

"죄, 죄송합니다. 병사를 더 늘리도록 조치를..."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눈앞의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십 명이 넘게 자리한 지휘 막사가 조용했다.

오직 중앙에 나와 있는 관리만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며칠 분량의 식량이 남았는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 때문일까.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앞에 부복한 보급 관리는 등을 축축하게 적신 땀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약 보름 분량이 남았습니다..."

"..."

20만 명이 먹을 식량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전쟁으로 쌍둥이 성 주변 논과 밭은 황량했다. 관리도 안된 작물은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었다.

"기병이 나타났다고?"

"예, 예... 분명 수없이 많은 말굽 자국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경계망을 뚫고 나타난 지는 모르겠으나..."

저들이 무엇을 기다리나 생각했다.

등을 노리는 왕국군을 향해 부대를 진군하면, 저들은 미련 없이 뒤로 도망갔다.

그러다 다시 우테라 성으로 부대를 복귀시키면, 등을 노리며 접근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때문에 슈티엔 후작은 공성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와 자신의 마지막 전투를 방해하는 날파리 같은 놈들을 당장이라도 모조리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끊임없이 위협만 가하는 그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을 노리는가.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끊임없이 위협만 가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그 대답은 거무죽죽한 얼굴로 보고를 하는 관리의 입에서 나왔다.

"..."

설마 보급부대가 공격당할 줄은 몰랐다.

그제야 슈티엔 후작은 저들의 속셈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알아서 지쳐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후퇴를 해야 하니 공성을 방해하며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다.

참으로 묘안이었다.

어느 누가 그런 계책을 세웠을까.

덕분에 자신들은 저들의 뜻대로 식량이 모자라게 됐다.

시간이 얼마 없다.

보름...

돌아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슈티엔 후작은 본능적으로 이번 전투가 그와의 마지막임을 예견했다. 그러니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나선 안 된다.

둘 중 한 명은 이 전투에서 죽어야 한다.

그게 그와 자신의 운명이다.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생각에 잠겨있던 후작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문을 완전히 잠근다.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면, 본격적으로 공성에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호숫가와 맞닿은 서쪽과 북쪽의 수위가 낮아지면 병사들이 사방에서 성을 공격할 수 있다.

민낯이 드러난 땅은 질척거리고 성벽을 따라 이동하느라 수많은 병사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에 희생당할 테지만, 우테라 성을 공략할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성문만 열리면 된다.

우테라 성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왕국군은 닭 쫓던 개가 된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제국군은 왕국군 본대에게 등을 보일 필요가 없다.

아마 우테라 성이 무너지는 걸 보는 순간 저들은 모든 걸 포기하고 뷔른 성까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날 것이다.

지금부터 살얼음판이다.

왕국군의 본대가 함부로 뒤를 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위협을 가하며, 모든 힘을 다해 우테라 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본대를 견제하는 병력이 너무 적으면 저들이 공격을 올 것이요. 너무 많으면 공성에 힘이 빠진다.

"아르에나 성에도 미리 병력을 보내 성을 점거하라. 우레타 성이 무너지는 순간 공성에서 수성으로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흘 동안, 제국군은 모든 공성을 멈추고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길 기다렸다.

마지막 공성을 위해서.

­­­­­­­­­­

"...큰일입니다."

"..."

자연스레 부관들과 참모들의 시선이 비어있는 상석을 향했다.

록셀 자작이 주민들과 병사들 앞에서 쓰러진 그 순간, 우테라 성은 거대한 혼란에 빠졌었다.

다급히 부관들이 록셀 자작을 내성으로 옮기고 상황을 무마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다.

뒤늦게 단순한 과로로 쓰러졌다고 주민들을 진정시켰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우테라 성은 절망으로 서서히 침식되고 있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원래 지병이 있으셨나 봅니다. 일단 신관이 붙어 치유에 전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그게 벌써 나흘째였다.

"제국군의 보급을 끊었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거네."

상석을 제외한 가장 위편에 앉아있던 선임 부관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아르에나 성으로 들어갔던 제국군이 자신들의 놓고 온 식량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봤기 때문에.

이만 오천 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이었다.

20만 명에 가까운 제국군에겐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병사들은 사기가 바닥나 버렸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호숫가와 붙어있던 북쪽과 서쪽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유롭게 부대가 운신할 정도로 넓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열 명이 나란히 걸을 정도로 수위가 낮아졌다.

"모든 성벽에 병사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은 수성하기에 좋은 성벽이 아닌지라..."

서쪽과 북쪽은 성벽 위에 올라 호수를 바라보기 위해 건축됐다.

사람이 물 위를 뛰어다니지 않는 이상 서쪽과 북쪽은 공격을 당할 일이 없었기에 망루도 없었고, 해자도 없었다.

"무엇보다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는 걸 본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저들이 댐을 터트리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진 않을 거네."

병사보다 주민들이 더 많다.

이곳을 공격하러 왔던 왕국군은 타국이었기에 여차하면 정말 할 수도 있었지만, 우테라 성은 본래 제국의 영토였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성을 지키는 병사들도 제국민들이었다. 다시는 이곳을 다스릴 생각이 없는 게 아닌 이상, 그러진 않을 것이다.

"...남은 식량은 며칠 분인가?"

"...약 엿새 분량입니다."

당초 예상했던 차출량보다 적은 식량이 모였다. 눈앞에서 록셀 자작이 쓰러진 모습을 본 주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식량을 숨긴 탓이다.

전선은 두 배가 됐고, 아르에나 성에 있던 식량을 제국군이 확보함으로써 버텨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그런데 남은 식량은 얼마 없다.

게다가 성을 지휘하던 록셀 자작마저 쓰러졌다.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차라리 항복을 하는 것은..."

결국 나올 말이 나왔다.

가만히 비어버린 상석을 바라보던 선임 부관은 그 말에 결국 눈을 감았다.

입 밖을 나온 말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

그런 생각이 없던 자들도,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던 자들도, 가장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던 자들도 그 힘에 이끌려 항복을 떠올린다.

이제 앞으로 모든 상황에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항복을 떠올릴 것이다.

말이란 건 그런 힘이 있으니까.

"...아직은 아니네."

"..."

"엿새는 더 버틸 수 있어. 우릴 구하러 온 원군이 분명 수를 쓸 것이네."

"...저희가 식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겠습니까?"

...모르겠지.

부대를 반으로 나누어 기만한다는 전략은 본대가 후퇴하기 전부터 준비했다.

그러나 식량도 반으로 나눈 사실은 분명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사람은 생각보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성질이 있으니까.

"일단은... 일단은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야 하네. 우리가 무너지면 제국 영토로 들어간 기병도, 우릴 구하러 온 원군도 모두 위험해져."

"..."

그렇게, 대전에서 시작된 회의는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에 갑작스레 끝이 났다.

그리고 그 회의는 대전에서 진행된 마지막 회의였다.

­­­­­­­­­­­

부우­­­

낮게 울리는 뿔피리 소리가 전장을 뒤흔든다. 거침없이 퍼지는 뿔피리 소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드넓은 초원을 뻗어 나갔다.

성을 향해 접근하는 제국군도, 성벽 위에 선 왕국군도 뿔피리 소리를 들었다.

두웅­­­ 두웅­­­ 둥­­­

성벽을 넘은 북소리가 왕국군의 심장을 진탕시켰다.

어제보다 더 적은 양의 아침을 먹은 병사들이 땀에 젖은 손으로 성벽 밑을 내려다봤다.

낮아진 수위로 해자도 무용지물이 됐다. 흉한 민낯을 드러낸 해자 바닥에 불어터진 제국군의 시체가 보인다.

"저들이 왜 저렇게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지 아는가!!!"

긴장으로 떨기 시작한 병사들이 귓가에 퍼지는 부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시선은 제국군을 향한 채였다.

"그대들이 먹은 아침은 저들이 하루 종일 먹을 분량임을 아는가!!!"

말에는 힘이 있다.

그 말이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사기꾼의 달콤한 현혹일지라도 말에는 힘이 있다.

"우리의 식량을 가져갈 정도로 저들의 수레가 비어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말에는 힘이 있다.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 부관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채 마르지도 않은 진흙을 밟아가며 공격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는가!!!"

말에는 힘이 있었다.

물이 빠진 해자를 보며 절망하던 병사들이 창을 고쳐 잡았다.

부우­­­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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