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버텨라
* * *
"하암..."
참 신기한 일이다.
사람이 걸으면서 잘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도 직접 겪어보기 전엔 믿지 못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자꾸 발걸음이 갈지자로 변했다. 나른하게 떨어지는 햇빛이 자꾸만 눈꺼풀을 내리누른다.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혹여나 십부장이 발견한다면 크게 경을 칠 것이 분명했다.
...
......
깡!
"아악!"
"하멜! 정신 차려라!"
투구를 때리는 타격에 경기를 일으킨 병사가 다급히 몸을 바로 세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레에 몸을 반쯤 걸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잠들었지...? 분명 똑바로 걷고 있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에 얼굴에 피가 쏠렸다. 지들도 반쯤 눈을 감고 갔으면서...
괜히 민망해 투구를 바로 썼다.
사실 아프진 않았다. 그저, 갑작스레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뿐이다.
"내일이면 우테라 영지로 들어간다! 에어로크 왕국군이 언제 기습을 할지 모르는데 잠이 와!"
"...죄송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방향을 바꾸고 구릉과 구릉 사이로만 다니면서 기습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으면서 기습은 무슨 기습.
그럼에도 잘못은 자신에게 있기에 얼굴이 빨개진 병사는 고개를 숙였다.
벌써 이주째 평야를 뱀 똬리 틀듯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직선으로 갔으면 벌써 돌아가는 길이었을 텐데, 보급을 담당하는 지휘관이 유독 심장이 작은 게 문제였다.
하긴, 우테라 성을 공격 중이라는 본대의 지휘관이 말로만 듣던 슈티엔 후작이라니 목이 달아날까 걱정되긴 할 것이다.
덕분에 보급 수레를 호위하는 자신들만 죽어나는 중이었다.
"...너 투구 찌그러졌다."
"뭐?"
옆에서 걷던 병사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자신을 바라봤다. 작게 속삭이는 말이었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주변 병사들이 동시에 자신의 머리통을 살피기 시작했다.
"크흡..."
"큭..."
그리곤 얼굴이 시뻘게지며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
다급히 손을 올려 투구를 쓰다듬으니 과연 옆통수와 뒤통수 사이가 살짝 들어가 있었다.
에이씨...
그래도 그렇지 잠깐 졸았다고 투구를 찌그러트릴 정도로 세게 때리면 어떡하는가. 아무리 품질이 떨어지는 얇은 쇠판이라 해도 여분의 목숨줄인데.
"이거 보고할 겁니다."
"뭐? 그럼 나도 너 존 거 보고할 거다."
"..."
"해?"
"...죄송합니다."
잠깐의 생각만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까운 내 투구...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일반 보병들은 투구는커녕 갑옷도 시원찮다. 그나마 보급부대라고 싸구려 투구를 쓴 자신이 백번 나았다. 어떻게 잘 피하면 화살은 한 번 튕겨내지 않겠는가.
물론 화살을 직접 맞아가며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병사의 다짐과 다르게 투구의 성능을 시험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
부우
"적습이다! 창을 들어라!"
양옆이 구릉이라 시야가 좁았다. 갑작스러운 뿔피리 소리에 나른한 표정을 짓던 병사들이 다급히 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병사들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온 거야! 경계병들은 다 뭐하고!"
병사들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죽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는 이 소리. 분명 기병이 온 것이다.
보병이라면 창 한 번 찔러넣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병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저 마차 밑으로 숨어 들어가 신에게 비는 게 가장 살 확률이 높다.
부우
"기병이 온다! 창을 들어라! 말을 찔러!"
그러나 그 누구도 십인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중갑 보병도 기병을 직접적으로 막아서지 않는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말을 멈출 방법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마침내 설마 하던 병사들의 마지막 희망을 꺾은 기병이 구릉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깃발이 달린 창끝에 햇빛이 반사되며 병사들을 비췄다.
"사, 사, 살려줘!"
기병은 못 막는다. 그것도 구릉에서 뛰어 내려오는 기병들은 더더욱. 적들에게 위치를 숨기기 위해 구릉 사이로 움직인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구릉에 올라선 기병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보급 부대를 향해 내달렸다.
"막아라! 창을 들... 커헉!"
십인장의 단말마를 시작으로 병사들이 다급히 수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말에 치여도 죽고, 기병에게 목이 잘려도 죽는다.
이 넓은 평원에서 기병이 못 오는 곳은 유일하게 수레 밑이었다.
두두두두
사방에서 비명과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수레 밑에서 보이는 세상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미처 기병을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푸른 초원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지고 있었다.
물론, 사지가 제대로 달린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다못해 십 분 전이라도 발견했으면, 그래서 적어도 대열을 만들 시간이 있었으면 희망이 있었다. 무려 오천이나 되는 호위 병력이 바보는 아니니까.
이십만 명이 보름 동안 먹을 식량이 그렇게 허무하게 타기 시작했다.
탄내를 맡은 병사들이 허겁지겁 수레 밑에서 기어 나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왕국군의 칼날이었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가?"
"약 엿새 분량입니다."
"저 멀리 왕국군이 보이는가?"
"예."
"훗날 주민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식량을 차출하면 며칠 정도 더 버티겠는가."
"...길면 보름입니다."
시선이 자연스레 북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르에나 성에 보름치의 식량이 덩그러니 남겨져있다.
기만을 위해 병력이 많은 척했다. 오만의 병사를 반으로 나누어 아르에나 성으로 보냈었다. 당연히 식량도 반으로 떼서 보냈다.
카인의 계획처럼 저들이 당연히 쌍둥이 성을 지나 뷔른 성으로 가겠거니 했다.
어찌 보면, 그리고 계획대로였다면 쉬운 임무였다.
그러나 제국군은 방향을 꺾어 우테라 성으로 다가왔다.
복귀 명령을 받은 병력들이 다급히 우테라 성으로 복귀했다. 당연히 여유롭게 식량 수레까지 싣고 올 여유는 없었다.
반으로 나눈 식량은 그대로였으나 병력이 배로 늘었다. 자연스레 한 달 치 식량이 보름 치로 줄었다.
그리고 제국군이 나타난 지 약 일주일이 흐른 지금, 식량창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네가 보기엔 육 일 안에 제국군이 물러나리라 보는가?"
"...어려울 듯 합니다."
지금쯤 계획대로라면 제국군을 빙 돌아 동쪽으로 향한 기병이 보급 수레를 급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만약 카인이 있다면, 백이면 백 성공했으리라.
"..."
가만히 무릎을 꿇고 갈색 눈동자를 가진 병사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 청년의 이름도 루크라 했다. 가족을 지켜준다더니 자네가 먼저 가면 어떡하는가.
마음에 담은 지 고작 사흘이 안 됐는데...
이제 막 성인이 됐던 앳된 소년을 가슴에 묻었다. 이미 넘칠 만큼 묻고 또 묻었는데, 찢어진 마음 그 빈 공간을 그로 메꿨다.
"주민들 역시 원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계획대로라면 저들의 보급이 끊겼을 거야. 사정을 설명하고 식량을 차출하게."
"알겠습니다."
아흐레 늘었다.
엿새에서 보름이 됐다.
누구의 식량이 더 빨리 떨어지는가.
마음 같아선 하늘을 날아 아르에나 성에 있는 식량을 가져오고 싶었다.
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희망의 빛이 보였지만, 식량 창고가 바닥을 보이면 보일수록 아군의 사기도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식량이 없다는 사실은, 병사들을 포함한 주민들 전부 알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루크의 얼굴을 쓰다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를 대신해 내가 네 가족을 지켜주겠다.
그러니, 편히 눈을 감거라.
주위를 둘러보니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성벽 위 병사들도, 시체를 옮기던 병사들도, 가족을 보며 우는 주민들도.
가만히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도 자신을 바라봤다.
두 눈에 담긴 옅은 희망이 보인다.
그 희망을 덮을 절망도 보인다.
참으로 익숙한 장면이다. 삼십 년 동안 봐왔던 장면이 또다시 반복된다. 결국,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을 운명인가보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제국의 망령 역시 이곳까지 따라왔다.
헤르트를 떠나 에어로크까지.
그 역시 이곳에서 죽으리라.
"...식량은 모자라고 병력은 열세다. 일주일만 지나면 우리는 당장 아침에 먹을 밥을 걱정해야 한다."
"..."
나지막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리기 시작했다. 죽은 자식을 쓰다듬던 아낙네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강력하고, 잔인하다. 그 수는 아직도 십팔만이나 남았다."
"..."
가장 먼저 절망에 잡아먹힌 건 주민들이었다. 하나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창을 든 병사들은 의연한 표정을 연기했으나, 눈빛이 떨리는 건 똑같았다.
그때, 록셀 자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침묵에 빠진 광장을 일깨우는 강렬한 기백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성문은 여전히 건재하다! 성벽은 굳건하고 병사들은 용감하다! 저들의 등을 찌르기 위해 원군이 칼을 갈고 있으며!!!"
늙은 호랑이가 효표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고개를 숙인 주민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들의 군량을 노린 기병이 수레를 불태우고 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친 주민들과 병사들은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저 사람 역시 얼마 전만 해도 침략자였다.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기 위해 몰려온 침략자.
그러나 저절로 열린 성문으로 들어온 왕국군은 절대 자신들을 건들지 않았다.오히려 낮아진 치안을 잡기 위해 성내를 돌아다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식량을 배급했다.
그리고 지금, 그저 버리고 도망가면 쉬운 일을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었다.
성 안의 병사들도, 성 밖의 원군도,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제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그냥 버리고 가면 되는데.
다른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끝까지 버텨라! 그대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버텨라! 그대들을 위해 대신 죽은 병사들을 위해 버텨라!!!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시체를 나르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허리춤에 찬 칼을 들고, 두 손에 들린 창을 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물결은 빠르게 퍼졌다.
자식을 어루만지던 아낙네들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검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아!!!"
록셀 자작은 성이 떠나갈 듯이 울리는 함성을 들으며 눈을 감고 몸을 돌렸다.
"...쿨룩."
조금 무리했나.
시야가 깜깜해지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벌써 나흘째 잠을 자지 못했다. 폐를 찌르는 고통에 단 오 분도 편히 잘 수가 없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아!!!"
"우레타 성을 위하여!!!"
손수건을 든 손이 고통으로 덜덜 떨렸다.
검은 피였다.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품 속으로 숨겼다.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여기선 안 된다. 지금은 절대 안 된다.
간신히 올려놓은 사기가 한순간에 추락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력을 따라가기엔 육신이 너무 늙었을까.
고통을 이기지 못한 몸은 미약하게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결국 놓치고 말았다.
록셀 자작은 땅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