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39화 (139/191)

〈 139화 〉 삭월

* * *

"...자네 나이가 몇인가?"

"이제 열여덟입니다!"

아직 콧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 병사였다. 성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관심을 표하자 긴장이 됐는지 창을 잡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이름은?"

"루크입니다!"

참 흔한 이름이었다. 제자가 사는 영지에도 루크라는 꼬마가 한 놈 있다. 그놈과 닮은 갈색 눈동자다.

"여기가 자네 고향인가?"

"예!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록셀 자작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들어 젊은 병사의 어깨를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겨우 이름과 눈동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담겼다.

록셀 자작은 부디 저 청년이 끝까지 살아나길 바랬다.

이미 마음속에 묻은 사람이 너무 많기에.

"저들의 움직임은?"

"별다른 행동은 없습니다. 어제처럼 날이 밝으면 움직일 듯합니다."

수없이 많은 별이 우테라 성을 비춘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승달 세 개가 산 너머에 걸렸다.

고개를 들었던 록셀 자작은 자연스레 제자를 떠올렸다.카인은 특히 저 밤하늘을 좋아했다.

헤르트에서도, 영지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제자는 밤마다 늘 밤하늘을 바라봤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걸까. 무엇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바라볼까.

늘 장난기 넘치던 제자 놈도 밤하늘을 볼 때면 무언가를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었느냐.

"쿨럭!"

다급히 품에 들은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폐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밤공기가 찹니다."

"...괜찮네. 잠깐 기침이 나온 것뿐이야."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다. 혹여나 부관들이 볼까 입 주변을 대충 닦고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어렴풋한 시야 사이로 붉게 물든 손수건이 보인다.

"..."

온 힘을 다해 허리를 꼿꼿이 폈다. 뒷짐을 진 두 손이 벌벌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만 명의 병사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쓰러지면 모든 게 끝이다. 그러니 절대 쓰러지면 안 된다.

며칠만 기다리면 된다. 이틀을 버텼으니, 일주일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럼 제자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제자에겐 끝까지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이깟 병 하나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헤르트의 방패라는 이름표를 단 스승의 자존심이었다.

'엘라의 자식은 보고 가셔야죠.'

'전쟁이 끝나면 안겨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잔정도 많은 놈이었다.

속에 품은 그리움에 사무치게 힘들어하면서도 늘 주변을 신경 쓰고 다녔다.

그래.

내가 네 자식은 보고 가마.

그저 공주님을 닮은 딸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절대 얄미운 제자 놈의 자식이 보고 싶은 건 아니다.

밤하늘에 박혀있던 달들이 어느새 산 너머로 사라지며 새벽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다시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전투를 준비하게. 주민들을 깨워 아침을 준비시키고 아낙네들을 시켜 성벽 위로 음식을 나르게."

"알겠습니다."

사위가 점점 밝아지며 저 멀리 주둔군 막사에 꽂힌 붉은 깃발이 보인다. 저기 어딘가에서도 슈티엔 후작이 자신의 노란 깃발을 보고 있을 것이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거라.

나를 대신해 네 목을 자를 놈이 다가오고 있으니.

질긴 운명의 종지부를 마침내 찍을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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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면 우테라 성이 보일 겁니다."

그 말에 지휘 막사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뷔른 성을 코앞에 두고 우테라 성으로 다시 복귀를 시작한 왕국군은 그 이튿날 저녁에 빠르게 다가오는 전령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던 지휘관들은 우테라 성이 포위됐다는 전령의 보고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마 저들도 우리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겁니다. 원래 계획대로 전면전은 무조건 피하고 위협만 주는 거로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2왕자의 말에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래전에 정리한 계획이다.

저들의 기병을 막을 방법이 없는 이상 대회전은 절대 불가능했다. 거리를 두며 저들의 시선을 뺏고 기병을 뒤로 돌려 보급로를 차단한다.

"우테라 성에 약 삼 주 분량의 식량이 남았다고 계산하면, 우테라 성보다 제국군의 식량이 먼저 동날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제국군은 뒤로 물러나야 하리라.

아무리 강한 기병이라도 말이 달릴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 역시 우리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을 의식해 보급로를 최대한 숨기고 척후병을 사방으로 운용할 텐데, 괜찮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말에 지휘관들이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이 작전의 핵심이자 가장 큰 공을 세울 기회였지만, 입을 여는 지휘관은 없었다.

제국의 영토까지 몰래 숨어 들어가 적들의 보급로를 찾아야 한다. 혹시나 너무 빨리 발각되거나, 적들의 함정에 빠진다면 전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성공한다면 단숨에 전쟁 영웅이 되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큰 임무였다.

"제가 직접 기병을 지휘하겠습니다."

"카인 참모 자네가?"

"예."

숨은 적 찾아내기는 내가 전문 아니겠는가.

언덕 뒤에 숨든, 기병을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든, 땅속으로 숨을 게 아니라면 내 손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자네가 움직인다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혹여나 함정이 있거나 적들에게 들켰다면 주저 없이 후퇴하게."

"알겠습니다."

2왕자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왕자의 표정을 본 몇몇 지휘관들이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 정도 질투는 받아야 전쟁 영웅 아니겠는가.

꼬우면 너희들이 아르에나 후작도 잡고 성문도 마법처럼 열고 하지 그랬어.

왕자에게 숙였던 고개를 다시 세우니 후작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사람은 왜 다 안다는 듯이 웃고 있는가. 사람 민망하게...

며칠 전 후작 앞에서 펑펑 운 일이 생각나 시선을 피했다. 그날 이후로 모든 중압감을 떨치고 일어난 것까진 좋았는데 후작 보기가 영 거북했다.

"그럼, 모든 계획은 세웠으니 내일 바로 우테라 성까지 접근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카인 참모. 언제 출발할 건가?"

"오늘 밤이 삭월이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적들의 시선을 피하는 데 좋겠지. 무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다.

지휘관들의 눈이 긴장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주.

이주 후에는 어떻게든 이 전쟁의 결과가 나타나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밤 바로 출발하려면 할 일이 많았다.

'금방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떠올랐다.

70이 넘은 몸으로 직접 미끼가 되어 제국군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꼭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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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척후 둘."

"예."

그 말에 로그멜 경이 자연스럽게 땅을 박차고 나갔다. 발굽을 헝겊으로 감싼 말이 소리 없는 사신이 되어 사라졌다.

저 시체들은 아침이 밝은 후에야 동료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을 죽인 정체가 우리 군의 척후였는지, 아니면 기병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캄캄한 어둠, 세 개의 달 중 두 개가 가려진 삭월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위가 어두웠다.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이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초원을 밝기기에는 그 힘이 모자랐다.

"이 근방만 벗어나면 제국군의 경계망을 벗어난다. 그때까지 최대한 천천히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왕국군을 빠져나온 기병들은 밤을 틈타 서쪽으로 움직였다. 우테라 성과 제국군이 있는 동쪽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푸르릉.

강하게 조인 재갈이 답답한지 말이 연신 불평을 터트린다.

조금만 견디거라.

경계망을 벗어나면 풀어줄게.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드리며 품속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봐도 신기합니다."

"자꾸 의심하면 어떻게 됐었죠?"

"..."

그 말에 테레스 산맥에서 머리를 박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로그멜 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하러 가는 거예요. 로그멜 경 작위 받고 싶지 않아요?"

"작위... 말씀입니까?"

"준 남작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해주세요. 방해하지 말고."

"...예."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지나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구슬을 완전히 품속에 집어넣었다.

주변에 보이는 척후병들은 모두 정리했다.

나머진 처리하러 가기엔 너무 멀었거나, 헝겊으로 감싼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였다.

어차피 해가 뜨기 시작하면 더 이상 어둠에 몸을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제부턴 전속력을 다해 이동할 때였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후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 겁니다."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기병들이 재빨리 말에서 내려 발굽을 감싼 헝겊을 치우고 재갈을 풀었다.

푸르릉.

오냐. 많이 답답했구나.

이제 달리자.

한 번 원 없이 달려보자.

호쾌하게 고삐를 잡아챘다. 그동안의 답답함을 풀겠다는 듯 말이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작다면 작고, 많다면 많을 2천의 기병이 점점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녹색 깃발을 꽂은 기병대가 한줄기 선이 되어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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