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38화 (138/191)

〈 138화 〉 소인배

* * *

낭패였다.

제국 동쪽에서 헤르트와 싸우고 있을 줄 알았던 그가 왔을 줄은 몰랐다. 저들을 위축시키기 위해 꽃아놨던 깃발이 오히려 미끼가 되어버렸다.

"최대한 빨리 아르에나 성에 있는 병사들을 불러라!"

본대가 있는 척 아르에나 성벽에도 병사들을 세워놨었다. 혹시나 저들이 가볍게 두드려볼까봐 병사도 정확히 반으로 나눴었다.

20만이 넘는 제국군을 고작 이만 오천의 병력으로 수성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길가에 돌멩이를 보듯 쌍둥이 성을 지나쳤을 텐데, 하필이면 그가 왔다.

붉은 깃발에 새겨진 검은 칼.

어찌 저 깃발을 잊을 수 있겠는가.

장장 삼십 년을 바라봤던 깃발이다.

저 검에 방패가 깨진 적도 있고, 저 검을 부러뜨린 적도 있다.

"록셀!!!!!!!!!!!!!!!!!!"

"오냐!!!!!!! 제국의 애송이가 겁없이 또 왔구나!!!!!!!!!!!"

록셀 자작이 온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어디서 그런 기백이 나왔는지 70이 넘은 노인의 몸에서 단단한 기세가 줄줄 흘러나왔다.

목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수만 명의 병사들이 보는 앞이다. 절대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아르에나 성을 빠져나온 병사들이 다급하게 우테라 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제국군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알아채지 못한 듯싶었다.

"성문을 내려라. 최대한 천천히, 저들에게 소리가 나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어딘가 제자가 있는 곳을 향해.

이 모습을 보고있는 척후병이 소식을 전달하는데 사흘.

병력을 준비하고 나오는데 하루.

다시 돌아오는데 닷새.

아흐레를 버텨야 한다.

"..."

남은 식량이 애매했다.

본대가 후퇴하며 한 달 동안 먹을 분량의 군량을 놓고 갔다. 그러나 그 중 절반이 아르에나 성에 있다.

다급히 돌아오는 저들이 느긋하게 식량 수레를 끌고 올 시간은 없다.

그러니 남은 식량은...약 13일 치가 남았다.

그래도 버틸만 하다.

아흐레.

늦어도 열흘이면 제자가 돌아오리라.

문제는 사기였다.

쌍둥이 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이 성에서 차출된 주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제국군이었던 병사들은 눈앞에 보이는 제국군을 보며 동요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면 위험하다.

아무리 식량이 많이 남아도, 아무리 화살이 많이 남아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그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전투가 이랬다. 늘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보이는 제국군을 상대로 록셀 자작은 싸워왔다.

"저 붉은 기가 보이는가! 저 검은 칼이 보이는가! 적군보다 아군을 더 많이 죽였다는 슈티엔 후작의 문양이 보이는가!!! 이곳에서 저 문양을 모르는 자가 있는가!!!"

한 번 항복을 했던 병사들은 결코 살려두는 법이 없었다.

헤르트 병사들에게도, 다나크 병사들에게도 저 검은 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대들의 성을! 그대들의 영지를! 그대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뷔른 성으로 돌아갔던 아군이 돌아오고 있다!"

70이 넘은 노인의 목소리가 맞을까.

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성내를 돌아다니던 모습만 보던 병사들은 기백이 넘치는 전설의 귀환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일주일! 일주일만 버티면 아군이 온다! 성벽을 바라보는 제국군의 등을 찌르기 위해 온다! 그대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라!"

"와아아아아아!!!"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함성은 성벽 밑에도, 막사에서 대기하는 병사들에게도 서서히 전염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성벽을 울리는 병사들의 함성을 시작으로, 마침내 길고 긴 인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

­­­­­­­­­

"성급했다."

"...알고 있습니다."

"너답지 않은 모습이었구나."

기나긴 장마가 끝난 초원은 높다란 하늘을 자랑하는 듯 구름을 높이 띄웠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했는가. 장마와 함께 끝난 여름은 발악하듯 햇빛을 쨍쨍 떨어뜨렸다.

"...그 일은 취소하는 것이 어떻느냐."

"이미 뱉은 말입니다."

"..."

뷔른 성을 코앞에 뒀던 왕국군은 한 남자의 주장에 따라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병사들이 찍혔던 발자국을 따라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네가 세운 공적이 적지 않다. 게다가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척후를 넓게 펼치지 않았느냐. 갑작스레 제국군을 만날 확률은 없을 것이다."

"저들의 행동을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이 맞습니다."

사실, 왜 멀쩡히 서쪽으로 오던 제국군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쌍둥이 성으로 향했는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본대가 빠졌다는 위장이 들켰던 걸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를 간과한 걸까.

어쨌든, 내 작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확실했다.

"원래 계획대로 저들이 공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막으면 된다. 단지 저들이 우리의 본대 위치를 빨리 파악했느냐 못 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

"우테라 성이 얼마나 공성하기 까다로운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식량도 충분하고 사기도 높을 것이다. 너무 큰 걱정 말거라."

"...감사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현실적인 조언이었고, 격려였다.

달라진 것은 없다.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저들의 공성을 방해하면 된다.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을 가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참모의 자격이 없음을.

만약 우테라 성을 지키는 지휘관이 스승님이 아니었어도 억지를 부렸을까.

'...아니겠지.'

비를 맞아가며, 산을 타며, 밥을 굶어가며 공적을 세웠다. 그것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까웠다.

아마 모른 척 뷔른 성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날아온 소식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우테라 성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아버님은 제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이기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수십만 명의 목숨보다 스승님이 더 소중한 소인배입니다.

영웅은 대인배나 하는 겁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아는 대인배, 그런 사람이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평범했던 현대인이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껴입은 느낌이었다.

그에 부응하기 위해 대인배를 연기했다. 공명정대하며 총명하기 그지없는 젊은 신성을 연기했다.

그러나... 이제 좀 지친 느낌이다.

구슬 하나로 빌어먹던 삶이 깨진 느낌이다.

'제가 사는 삶은 이렇습니다. 수십만 명의 목숨보다 저의 목숨, 제 주변 사람들의 목숨이 더 소중합니다.'

전쟁 영웅.

젊은 신성.

왕자의 총애를 받는 자.

모두 내겐 과분한 이름표였다.

그저 자기 한 몸 건사하던 직장인에게 붙이기엔 너무나 과분한 왕관이었다.

수없이 많은 병사를 희생시키고, 사람들을 죽이고, 이 대륙을 통일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전에 내 인격이 말라 죽지 않을까.

왕관의 무게를 버티다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점점 더 깊은 사색에 빠졌다.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듯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탈력감이 온몸을 지배한다.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참모 직도 벗어버린 김에 그냥 영지로 돌아간다고 할까. 거기서 그냥 엘라와 시아라랑 아무생각 없이 살까.

그때, 수렁에 빠진 나를 건지는 듯한 후작의 질문에 깊은 사색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질문이 조금 이상했다.

"만약... 내가 우테라 성에 있었어도 그렇게 억지를 부렸을 것이냐?"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합니다."

내게 아버지는 한 명이다.

당연히 그 아버지는 옆에 있는 후작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4년을 넘게 보냈음에도 여전히 후작이라 칭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인정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후작 역시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세계로 넘어와 상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부터 헤르트로 원정을 갔을 때, 그리고 지금 전쟁까지...

군말 없이 나를 믿었던 사람이다. 늘 한결같은 신뢰를 보여줬던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준하는 존재는 맞았다.

그러니 구하러 가지 않았을까. 스승님처럼 왕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을까.

이 세계로 넘어와 모든 인연이 끊긴 나를 기억해줄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거면 됐다."

"...예?"

"훗날 네가 영지를 물려받으면, 자랑스러운 우리 영지를 위해 그렇게 억지를 부리거라.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왕국을 위해 억지를 부려주거라."

"..."

"그러니 스스로 자책하지 말거라. 나는 여전히 네가 자랑스럽다."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 속마음을 들여다 본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알았지.

목이 메는 걸 꾹 참았다.

그러나, 떨리는 입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나도, 왕자님도, 지휘관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전령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을 네가 무리한 이유를. 네 스승님 때문 아니냐."

"..."

"왕국의 영웅이 모든 공적을 던져버리고 구하러 가고자 하는 사람... 아마 왕자님은 질투를 느꼈을 것이다. 네가 왕자님께 억지를 부린 것처럼, 왕자님도 우리에게 억지를 부린 것이다."

"..."

"네가 어떻게 우테라 성의 일을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헤르트에서 몇 번이고 겪었으니까. 그러니 언젠가는 이야기해 주지 않겠느냐."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모두 알고 있었구나. 왕자도, 후작도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후작은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까지 알고 있었구나.

목이 아파왔다.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깨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소인배라는 것에 실망하지 않아서. 내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을 이해해줘서.

그리고 미안했다.

후작의 걱정을 받는 내가 진짜 아들이 아니라서.

"소설 속에 나오는 영웅도 슬퍼할 때가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동료가, 연인이 죽으면 똑같이 슬퍼했다. 그 모습이 영웅답지 못하다 욕하지는 않는다."

4년 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터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인간다움에 매료된다. 자신을 영웅에 투영할 수 있는 증거니까."

"..."

"그러니 자책하지 말거라. 너를 믿어라. 내가 너를 믿는 것처럼."

하늘은 왜 이렇게 맑은지.

차라리 비라도 쏟아졌으면 티라도 안 났을 텐데.

겨우 위로 한마디에 눈물을 흘린 게 쪽팔려 더욱 고개를 숙였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했는가. 장마가 끝난 초원엔 북쪽에서 흘러오는 찬바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18만이 넘는 대병력이 어제 걸었던 그 길을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끝 후미엔, 고개를 숙인 젊은 청년과 미소를 짓는 중년이 나란히 말을 몰며 행렬을 쫓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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