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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137화 (137/191)

〈 137화 〉 마지막 요청

* * *

"목표를 바꾼다. 병력을 북쪽으로 돌려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그 기분 좋은 고통에 슈티엔 후작이 밝게 웃었다.

노란색 깃발, 그 안에 그려진 하얀 방패.

찾았다.

장장 5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문양이 성벽 위에 선명히 걸려있었다.

"예? 후작님. 그게 무슨..."

"계획을 바꾼다. 우린 쌍둥이 성을 먼저 친다."

날파리처럼 달라붙는 지휘관들을 떼어내고 말을 몰아 먼저 움직였다.

그래.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너와 나는 여기서 만나는 게 어울리지 않는가.

우리의 질긴 인연은 역시 전장에서 비로소 끝을 맺을 수 있지 않겠는가.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가 점점 강하게 욱신거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환상통이다. 그렇기에 슈티엔 후작은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군부에 몸을 담은 사람이라면 저 문양을 모를 수가 없다.

장장 수십 년 간 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철벽 같은 자의 문양이다.

다른 지휘관이 저 깃발을 봤다면 분명 공성을 포기했으리라.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오직 저 문양을 보기 위해 관리의 목을 베었다.

노란 깃발 주위로 수많은 녹색 깃발들이 휘날린다. 그러나 슈티엔 후작은 그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위장이다.

이 곳은 에어로크 왕국과 다나크 제국의 전장이다.이미 은퇴한 자의 깃발 따위가 세워질 리가 없다.

그러나 저 깃발이 휘날린다는 건, 제국군을 위축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함이다.

굳이 타국의 명성까지 빌릴 정도로 저들이 급한가.

아니다.

그러니 저 초록 깃발들은 위장이요. 허장성세다.

본대는 모두 후퇴했다.

"저 깃발이 걸려있다는 건 저들의 주 병력이 후퇴했다는 소리다. 부대를 반으로 나눈다. 절반은 뒤에서 올 왕국군은 견제하고 나머진 공성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세세하게 짰던 모든 계획이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앞서가는 후작의 등을 바라보는 지휘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략도 다시 짜고, 부대도 다시 편성하면 된다. 그러나, 한 번 떨어진 목은 다시 붙일 수 없다.

과연, 자신들이 방향을 바꾼 걸 깨달았는지 성벽 위가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급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슈티엔 후작은 가만히 우테라 성을 바라봤다.

잔잔한 호숫가 세워진 백색 거성. 그 뒤로 보이는 두 개의 높은 산. 그와 자신의 마지막 결전지치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수십만이 넘는 병사들의 목숨을 어깨에 지고 있는 죄인들에겐 이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

저 하얀 성벽에 피가 덧칠되고, 해자에 시체가 쌓여 썩은 내를 풍기기 시작할 때쯤이면 그나마 어울리지 않을까.

삼십 년을 넘게 병사들을 죽인 우린에겐 그런 풍경이 어울렸다.

어디 있느냐.

빨리 모습을 드러내라.

슈티엔 후작의 눈이 연신 성벽 위를 살폈다. 그의 문양을 발견했을 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성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강하게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슈티엔 후작은 성벽 위로 올라온 백발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슈티엔 후작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도 봤을 것이다.

자신의 깃발을 봤을 것이다.

붉은 바탕에 검은 칼을 그려진 깃발을 봤을 것이다.

자신이 저 방패를 잊지 못하듯, 그도 검은 칼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록셀!!!!!!!!!!!!!!!"

내가 왔노라.

너를 죽이기 위해 왔노라.

길고 긴 인연의 끝을 맺기 위해 왔노라.

우테라 성을 바라보는 한 마리 야수가 거칠게 표효했다.

­­­­­­­­­

"지금 당장 회군을 해야 합니다."

"..."

"조금의 병력이라도 괜찮습니다.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우테라 성을 지원해야 합니다."

2왕자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아니, 막사 내에 있는 모든 지휘관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중앙을 바라봤다.

"우테라 성이 위험합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

근거도, 논리도 없었다.

다짜고짜 지휘 막사를 찾아온 그는 줄곧 회군을 요청하고 있었다.

뷔른 성이 코앞이다. 뷔른 성을 지키자며 후퇴를 주장했던 그가 돌연 태도를 바꾸고 무릎을 꿇었다.

"...근거는 있는가?"

"...없습니다."

"..."

정말 제국군이 우테라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그 상황을 본 척후병이 소식을 들고 오려면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

그들이 우테라 성을 지나칠 시간은 맞았다.

아마 카인의 말이 정말이라면 지금쯤 척후병이 전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18만의 병력을 다시 회군하자고 주장하는 거네."

...알고 있습니다."

만약 카인의 예상이 틀렸다면, 자신들은 그대로 평야 한가운데서 그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럼 끝이다.

기병의 수가 압도적인 저들을 떼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물자와 군량을 실은 수레만 수백 대가 넘는다. 그들을 떼어내려면 모든 수레를 버려야 할 게 뻔했다.

그래도 끝이다.

군량도, 물자도 포기한 부대는 더이상 전쟁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2왕자는 섣불리 고개를 젓지 못했다. 젊은 참모의 미친 소리라 치부하기엔, 그가 세운 공적이 너무나 많았다.

막사 내 인원들이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그를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늘 자신감이 넘치고 뻔뻔하기까지 했던 젊은 신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

"..."

숙영지에 세워진 임시 막사가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후작의 후계자가, 그것도 이번 전쟁을 전승으로 이끈 영웅이 무릎을 꿇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평소 카인을 시기하던 사람들도, 젊은 나이를 무시하던 사람들도 참담한 그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재정관. 수레를 밀기 위해 필요한 병력이 얼마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물자를 옮기려면 약 삼만 명의 병사가 필요합니다."

"......십만 명의 병사가 먹을 양을 남겨 놓으면?"

그 말에 모든 시선이 왕자를 향한다.

정말 카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작 한 사람의 억지를 정말로 들어줄 생각일까.

부대를 운용함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은 들어가면 안 된다. 수십만이 넘는 병사의 목숨을 짊어진 지휘관으로서는 절대 금기시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럼 일만여 명으로 충분합니다."

"..."

재정관의 대답에 지휘관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조건 반대할 생각이었다.

만약 카인의 말대로 제국군이 쌍둥이 성을 공격하는 것이 사실이라도 반대를 해야 한다.

성은 다시 빼앗으면 되니까.

그러나, 혹여나 그의 예상이 틀린다면...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오는 2왕자의 질문에 그들은 더 큰 충격에 빠져야 했다.

"......그럼... 십오만 명이 회군을 한다면?"

"..."

"왕자님! 정말 회군할 생각이십니까?"

"안 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병사를 돌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참아왔던 말들이 소나기처럼 튀어나왔다. 카인의 능력은 인정한다. 그가 믿을 수 없는 전략을 세우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전략은 근거가 있었다.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주장을 하진 않았다.

만 명도, 오만 명도 아니다.

십오만이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를 말려야 했다.

"대답하게. 십오만 명이 회군을 한다면, 뷔른 성으로 보내야 할 잔여 물자는 얼마나 되는가."

"...십팔만의 병사 중 십오만이 다시 돌아간다면 굳이 뷔른 성으로 보낼 이유는 없습니다."

"왕자님!!!"

거기까지 이야기한 왕자가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왕자는 그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회군을 주장하는 근거가 없다. 그러나 죄인은 아니다. 왜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가.

만약 그의 예상이 틀린다면, 그때 무릎을 꿇어도 될 일이다.

"자네를 믿어도 되겠는가?"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2왕자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언제 그가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가.

뻔뻔한 얼굴로 낮잠을 퍼자던 그가 저렇게 무릎을 꿇을 정도라면, 정말 강한 확신이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언제 카인 참모가 제장들을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적은?"

"..."

"후퇴를 주장한 사람은 카인 참모였습니다. 회군을 주장하는 사람도 카인 참모입니다. 자기가 세운 전략을 모두 파기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도."

"제 스스로 공적을 부수는 꼴입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말 없이 뷔른 성으로 돌아가 가만히 지켜보다 전령의 보고를 받고 그때 돌아가도 될 입니다."

그제야 지휘관들이 가만히 중앙을 바라봤다.

자기가 세운 전략을 모두 파기하고 회군을 요청한다. 참모로서 자질이 없음을 스스로 인증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잘못된 판단 때문에 무려 18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이 헛짓을 한 것이 됐기에.

근거도 논리도 없다.

그건 그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럼에도 말을 꺼냈다. 막사로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

"..."

자신들이 만약 카인이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동안 세운 공적을 제 손으로 까먹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왕자의 말대로 모른 척 넘어가지 않았을까. 어차피 쌍둥이 성은 무너졌을 것이고 뷔른 성을 지키면 된다고 말이다.

진심이구나.

정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영광은 모두 집어던졌구나.

"..."

그럼에도 찬성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가슴으로는 그를 이해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근거가 없고, 논리가 없으니까.

지휘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그에 대한 신뢰 만으로 움직이기엔 너무나 많은 목숨이 달려있었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카인의 입이 열렸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지휘관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이번 회군 요청을 끝으로."

"참모직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동안의 공적을 생각하시어 마지막 요청을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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