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36화 (136/191)

〈 136화 〉 촉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아닙니다."

"싱겁기는."

작게 투덜거리며 찻잔을 드는 스승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언제까지 살고 싶으십니까?"

"지금이라도 여한 없다."

"제 자식은 보고 가셔야지요."

"뭐?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스승님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이마에서 빛나던 숫자가 사라졌다.

"엘라와 낳은 자식은 조금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

"엘라를 닮은 딸이 나오면..."

"공주님을 닮았으면 분명 예쁠 것이다."

"그러니 보셔야죠."

"..."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말을 꺼내니 얘가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스승님이 나를 바라봤다.

"그냥 흰소리입니다."

"...흥."

"전쟁이 끝나면 안겨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됐다."

스승님을 뵌 지도 4년이 흘렀다. 참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동네 공원에서 시작된 만남이 사제지간까지 이어졌다.

"흰소리나 하지 말고 후퇴 준비나 잘하거라."

"스승님이 계시는데 괜찮지 않겠습니까."

"다 늙어서까지 써먹으려 하니 내가 제자를 잘못 들인 탓이다."

"저같이 정성 쏟는 제자가 어디 있다고요."

"뻔뻔하기는 세상 제일이긴 하지."

"그래도 나름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

초등학교를 다니며, 중학교를 다니며,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니는 동안 내 인생에 진정한 스승이라 부를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노인은 내 인생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힘들 때면 늘 스승님을 찾아갔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내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때로는 꾸중으로, 때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때로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스승님이 이마를 가렸던 손을 내려 찻잔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숫자가 다시 선명하게 드러난다.

93.

93이다.

96이 아니라 93.

사실 전조는 있었다.

뷔른 성에서 95로 떨어진 모습을 처음 발견했다. 올라가는 모습은 숱하게 봤었다.

그러나 숫자가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땐 그저 일시적인 증상이라 생각해 불안감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그러나 매일 스승님의 능력치를 확인하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쌍둥이 성을 점령하고 우테라 백작의 능력치를 확인할 때 겸사겸사 스승님의 능력치를 확인한 날, 나는 일시적인 증상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무슨 일인가.

어디가 아프신가.

왜 자꾸 능력치가 떨어지는가.

"요즘 깜빡깜빡하는 일은 없으십니까?"

"...노망난 노인네 취급까지 하려는 게냐?"

"그럴 나이시지 않습니까."

"...내가 제자를 잘못 키웠어..."

"농담 아닙니다."

"..."

그제야 진지한 내 표정을 본 스승님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93.

잔인하도록 선명히 빛나는 숫자가 보인다.

"전쟁터에 나올 정도로 아직 정정하다. 네놈이 생각하는 게 뭔지는 알겠다만, 아직 몇 년은 쌩쌩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이 다시 내려간다. 내 불안감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해결할 방법도 없다.

그저, 이 현상이 일시적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랄 뿐이다.

"...이만 나가서 후퇴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내 걱정은 말아라."

"스승님이 계시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쌍둥이 성은 스승님만 믿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노인이 나를 바라본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열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엘라의 자식을 안겨드리겠습니다."

"또 흰소리냐? 얼른 나가기나 하거라."

"..."

심장이 막힌 듯한 강렬한 불안감이 등을 훑는다.

그럼에도 방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스승님이라면 잘 해내실 거다.

분명 계획대로라면 위험한 일도 없다.

그러니, 부디 다음에 만날 땐...

*****

마침내 방문이 닫혔다. 제자가 떠난 방 안에 침묵이 맴돈다.

그제야 록셀 자작은 답답하던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동시에 터져 나온 기침에 록셀 자작이 재빨리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

참 촉도 좋은 놈이다. 록셀 자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 묻은 손수건을 내려다 봤다.

하마터면 제자 놈에게 들킬 뻔했다. 이 모습을 보인 순간 그놈은 분명 모든 작전을 취소했을 것이다.

자신 하나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 다나크 제국을 상대하는 건 자신이 가장 바라던 일이었다.

힘이 모자라 후퇴를 했었다.

힘이 모자라 영토를 빼앗겼었다.

남들은 자신을 보고 헤르트의 방패라 했지만, 자신의 속내가 썩어 문드러져 가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끝내 공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

결국 이런 운명인가 보다 생각했다. 끝끝내 가슴에 한을 품고 죽어야 할 운명인가 했다.

제자를 보며 얼마나 통쾌하던가. 헤르트보다 약한 나라로, 약한 부대로 제국을 연신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그리고 돌고 돌아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던 기회가 왔다.

사십 년 가까이 쌓였던 한을 드디어 직접 풀 기회가 왔다.

제자와 본대는 뷔른 성으로 후퇴한다.

자신이 할 일은 5만의 병사로 우테라 성을 수비하는 것.

이 정도라면 식은 죽 먹기다. 사십 년 넘게 매일같이 해왔던 일이다. 겨우 각혈 몇 번 한 거 가지고 취소할 수는 없다.

록셀 자작은 본능적으로 이게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가슴 속에 쌓인 한을 풀 마지막 기회.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떠올랐다.

190이 넘는 신장.

거구에 맞는 거대한 검.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얼굴 흉터.

이번 전쟁에서 혹여나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다. 제자 놈이 그를 시원하게 격파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질기고 질겼던 운명은 끝인가 보다.

아마 제국 동부에서 헤르트와 싸우고 있겠지. 그곳의 그의 주 무대였으니까.

그러나 언젠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제자가 제국을 삼키고 삼켜 언젠가 제국이 왕국이 되고, 땅덩이가 하나만 남게 된다면 결국은 만날 것이다.

록셀 자작이 가만히 피 묻은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때까지만 살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살아서 그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다.

자신이 못 다한 인연의 끝을 제자가 끝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부디...

록셀 자작은 간절히 기원했다.

질기고 질긴 운명이 자신을 직접 찾아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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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후퇴한 것을 깨달은 제국군은 분명 말머리를 돌려 쌍둥이 성을 공략할 겁니다."

18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후퇴를 시작했다. 쌍둥이 성을 돌아오는 저들을 피해 뷔른 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럼 저희는 쌍둥이 성으로 향하는 제국군을 뒤따라갑니다."

저 멀리 우테라 성이 보인다. 저기 성벽 어딘가 스승님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성벽 위로 노란 바탕에 하얀 방패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인다. 헤르트의 국왕이 직접 내려준 스승님의 깃발을 급하게 만들어 걸었다.

그것 만으로 우테라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었다.

"거리는 무조건 하루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 이상은 가능하지만, 그 이하는 위험합니다."

쌍둥이 성을 공략하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뒤를 치겠다는 협박을 한다. 안 그래도 성의 두 면만 공성이 가능한 우테라 성은 공략하기가 까다롭다.

"저들이 저희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면, 그땐 뷔른 성으로 후퇴합니다."

싸워주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희가 쌍둥이 성을 공략하는 것도 안 된다.

하루 거리를 유지하며 저들의 신경을 긁는다.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을 한다.

"그와 동시에 저희는 기병을 돌려 저들의 보급로를 끊습니다."

왕국군이 보유한 기병의 수는 기껏해야 2천이 안 된다.

그러나 수레를 끌고 오는 저들의 보급부대를 자르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병력이다.

그러니 더더욱 제국군과의 대회전은 불가능하다.

저들의 기병을 막을 방법이 전무하니까.

"...죽이지 않고 저들을 뒤로 물리게 한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만 명도, 이만 명도 아닌 이십만 명은 그 자체만으로 군량을 까먹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싸우면 진다.

공성을 해줄 리는 없다.

그러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한다.

구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제국군과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 물을 수 있지만, 이전 아르에나 후작과의 일전이 있었기에 다행히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성공만 한다면 뷔른 성도, 쌍둥이 성도 빼앗기지 않고 저들을 물리칠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이 작전의 한계를 한 달로 봤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모두 소모하고 새로운 보급이 오지 않아 후퇴하기까지의 최대 시간을 한 달로 계산했다.

때문에 우테라 성의 식량 역시 5만 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을 제외하고 전부 뷔른 성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쌍둥이 성이 함락당하면 큰일이었으니까.

수많은 수레가 부대의 뒤를 따랐다. 자연히 행군 속도가 느려졌다.

여유는 있다. 구슬로 확인한 제국군은 아직 쌍둥이 성을 지나치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던 우테라 성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며칠 전부터 등을 감싸는 불안감이 떨어지질 않는다.

괜찮을 것이다.

스승님이니까. 헤르트의 방패이자 살아있는 신화 아닌가.제국의 공성도, 수성도 모두 익숙하실 것이다.

그러니 믿는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일부러 불안감을 무시했다.

그러나, 뷔른 성에 도착하기 하루 전 확인한 구슬은 전혀 뜻밖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쪽으로 오던 제국군이 갑자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노란 깃발이 펄럭이는 우테라 성을 향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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